295. 검주, 돌아가다(2)2021.10.26.
“조준.”
만우의 투명한 눈알이 조준에게로 향했다. 만우와 눈을 마주한 조준이 흠칫했다. 그리고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입술이 퍼렇게 변한 조준이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맹수?’
자신이 사냥감이 되고, 자신을 사냥감으로 삼은 맹수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목에서 일어난 좁쌀만 한 소름 때문에 뒷목이 서늘해진 조준이었다.
“검주!”
“뭐.”
그것을 본 임금이 급히 나섰지만 만우는 그런 임금에게도 불퉁하게 말했다. 권희달이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의 상황에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서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만 두게.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니까.”
“여의손, 그놈이 이 자 때문에 그리도 방약무도하게 굴었지. 그러니 아예 죄가 없는 건 아니야.”
만우는 조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조준의 심령을 억압하던 그 기세는 사그라들었다.
“그런 놈들을 거르지 않고 제 이름을 팔아먹을 수 있게 둔 것 자체가 이 자의 잘못이야.”
“어찌 사람이 완벽하겠는가!”
“적어도 노력이라도 해야지. 국왕인 당신이 그렇듯이.”
하륜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임금과 만우가 말을 주고받는 것이 완벽하게 동등한 관계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칼자루는 만우 쪽에 많이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임금이 만우에게 그만 둘 것을 부탁하고 있었으니까.
“아…….”
하륜은 머릿속에서 만우에 대한 상식을 아예 깨부수고는 새롭게 정립했다. 임금은 철혈이라 불릴 정도로 냉혹하지만 동시에 현군이다. 성군이라 부를 수는 없으나 조선의 기틀을 단단하게 만들고 천년왕조로 만들 그릇과 역량이 충분히 되는 현군이다. 그런 임금이 만우를 동등하게 대한다는 것은 단 한 가지를 의미했다.
‘일개 무인의 저력이 조선 전체와 비슷하거나 그에 준한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아무도 막아 낼 수 없는 무인. 휘둘러지는 검의 예기가 그 어떤 것으로도 피할 수 없고 막아 낼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재앙이다. 믿기 힘들지만 하륜은 만우가 그런 존재쯤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머릿속의 상식을 깨부수고 조선과 만우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저 자는 지존(至尊)이다.
“그나저나 천자가 왜 창위를 조선까지 보내온 거지?”
“그것 말인가.”
다행히 만우는 조준의 일을 그냥 넘어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임금의 표정이 안도한 듯 잠시 풀렸다가 다시 설핏 굳었다. 창위의 존재를 만우가 알고 있다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다.
“명에서 검주 만우, 그대를 압송하여 보내라는 칙서가 도착했네.”
“본주를?”
만우의 눈이 커졌다. 설마하니 명에서 그런 내용으로 칙서가 왔을 줄은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건륜제가 섣불리 만우를 불러들이고 무시했다가 일이 벌어진 지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이 오른 황제가 자신을 불렀다?
“그 수모를 지우고 새로운 역사를 쓰고 싶다는 거군.”
만우가 중얼거리자 임금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이미 만우가 명나라 대신들에게도 이름을 떨쳤다는 것은 지난 번 사신의 일로 임금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역시. 그대 성격이라면…… 명천자를 한 대 치기라도 한 건가?”
임금이 만우에게 묻자 조준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역사를 보면 그런 방약무도한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장 이의민만 해도 제 손으로 황제의 허리를 부러뜨려 죽이고는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 인물이 역사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설마. 본주가 그리 막 나가지는 않지. 그저 그 창위 놈들을 싹 쓸어버린 것뿐. 금의위는 환관으로 만들어 버리고.”
“…….”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놀라냐는 말투로 만우가 태연하게 말했다. 만우가 입은 자줏빛 무복이 흡사 핏빛처럼 보였기 때문에 조준이 눈을 스윽 하고 돌렸다. 만우는 피식 웃어 보였다.
“재밌네. 이래서 사람이란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이지. 지금의 황제라고 다를 줄 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보고 꽁무니 빠져라 도망간 그 환관 놈이 화경이라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뜻은 창위 전체의 실력이 올라갔다는 뜻이다.
“그뿐만이 아니지.”
임금은 만우에게 조선이 처한 상황을 차분하게 알렸다. 명의 말을 따르더라도 문제고, 따르지 않더라도 문제인 현 상황을 말이다. 명에서는 조금의 손해도 없다는 것까지 강조한 임금은 만우를 슬쩍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자신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임금의 표정에 만우가 피식 웃었다. 이토록 상세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임금이 알아서 알려줬다는 것은 뻔히 노리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게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에 만우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남이 부리는 수작에 넘어가 주는 건 내 취향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대충 맞춰 주도록 하지. 본주를 먼저 건드린 것은 황제이니.”
자신이 벌였던 수많은 일들이 축소되어 알려졌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동이족이기에 그 대단한 중화(中華)의 자존심으로 사실을 외면하는 것일까. 자신이 마교주와 휘하의 천마대와 진혼대를 단신으로 쓸어 버린 일이 명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다. 한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먼저 건드린 그 연유가 무엇일까. 명나라라는 거대한 나라를 제 손에 넣었다는 오만함 때문일까 아니면 만우를 상대할 방법이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초대장을 보냈는데 또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는지라.”
검주 만우는 오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준은 만우가 예의를 입에 담았다는 것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조준은 절대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철혈이라 불리는 임금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그의 성격 역시도 십 할 파악했기 때문에 정도전과 척을 지고 임금의 편에 섰다. 저 오연한 표정은 천성적으로 오만하고 거만하기 때문에 나오는 표정이 아니었다. 칼밥을 먹고 살아가는 이들을 모두 아래로 굽어보는 절대자의 표정이었다.
‘대단한 자.’
그렇게 생각하자 조준은 만우란 인물에 대해 호기심이 와락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이 세상에 난 자들 중 거의 십 할은 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평민과 양반이라는 굴레, 자신의 선조가 쌓았던 공덕과 업보의 굴레, 휘몰아치는 시류 속 일어난 변수에 의해 정해진 운명의 굴레 등등. 허나 어찌 보면 저 만우라는 자는 그 운명의 굴레를 제 손으로 벗어던진 자다. 오직 검 한 자루, 그리고 눈부신 무예에 대한 재능과 피와 살을 깎는 듯한 노력으로 다다른 무(武)를 손에 쥔 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 기꺼이 그대를 보내줄 수밖에.”
임금이 만족스럽다는 듯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찰방의 장령 동군영을 사헌부 종3품 집의에 한시적으로 임명한다. 또한 집의 동군영을 조천사 부사로 임명한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동군영이 화들짝 놀라서는 쿵 하고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만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난번처럼 얹혀서 가는 게 아니라 아예 사신으로 임명하겠다?”
“정사(正使) 역시 그대들이 아는 자로 임명을 할 생각이네. 그리해야 그대가 움직이는 데 편할 터.”
“아는 자?”
“그대란 골칫덩어리를 조선으로 들여온 자가 있으니, 그 치가 끝까지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설미수?”
임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수고했다. 창아.”
“후우. 쳇. 겁쟁이 놈들. 성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으니 소리치는 보람이 없습니다, 아버님.”
북실북실한 모피를 갑주 안에 받쳐 입은 남자가 땋은 머리를 흔들면서 자리에 앉았다. 몸에서 김이 모락거리면서 올라오는 것이 방금까지만 해도 격하게 움직였음을 알 수 있었다.
“원래 그런 놈들이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왜구나 다른 도적놈들에게 짓밟혔을 놈들이니.”
동맹가첩목아는 눈을 지그시 뜬 채 조선의 국경을 쳐다보았다. 허나 그렇게 말하는 동맹가첩목아와 그의 오도리 부족이 공격하는 건 국경의 작은 성채 하나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되었다. 물러나자.”
“허나 아버님. 명 황실에서는…….”
“어허출이 지휘사가 된 것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느냐?”
“그럼 아버님은 괜찮으십니까?”
“창아. 형님께서 그러실 리가 없지 않느냐.”
오도리 부족의 대추장인 동맹가첩목아 옆에서 그의 아우인 범찰이 형을 두둔했다. 나이가 제법 든 둘과는 달리 동맹가첩목아의 아들인 동창은 한창 혈기가 왕성할 때였다.
“결국 이는 명에서 우리를 이용해 먹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신께서 나이가 드셨다지만 살아있는데 말이다.”
동맹가첩목아는 이성계가 동북면을 다스리던 시절 그의 의형제가 되었던 29인의 여진족 추장 중 하나였다. 허나 그것은 빛바랜 과거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이성계와 교두보 역할을 하던 여진족 출신의 이지란은 묘에 묻혔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그들에 대한 조선의 관계는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허나 여전히 여진족에게 이성계는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결국 조선이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명에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다.”
“허나 어허출 그 작자가 거들먹거리는 꼴을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아버님!”
어허출은 올량합의 대추장이다. 하지만 그의 위세는 건주(만주)에서 자못 대단했는데 그의 딸이 연왕, 지금은 영락제가 된 명 천자의 첩이었기 때문이다. 정실이 아닌 후궁이라고는 하나, 변방의 오랑캐나 다름없는 여진족의 여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는 것만으로 어허출의 올량합이 가장 큰 세력을 건주에서 구가하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동맹가첩목아의 오도리에 명정의 칙서가 도착한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어허출에게 온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무려 어허출의 올량합을 밀어내고 건주위 지휘사 직을 제수해 왔기 때문이다. 단, 전제조건은 조선의 국경을 흔들고 조선에서 압송해 올 죄인 하나를 데려가는 것뿐이다.
“모용 쪽에서는 연락이 있었는가?”
“곧 사람을 보내온다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헌데 아버님. 어찌하여 모용세가에 사람을 보내셨는지…….”
“난 본 적이 있었다.”
동맹가첩목아는 혈기왕성한 아들을 보면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젊을 때에는 동창보다 훨씬 더 혈기가 넘쳤었다. 그런 동맹가첩목아가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일이 있었다.
“범찰. 너도 봤었겠지. 무신, 그분을.”
“…….”
동맹가첩목아는 이성계를 따르겠다며 의기를 투합하고 그의 의동생이 되었던 29명의 추장 중 하나였다. 동맹가첩목아가 그런 맹세를 한 이유는 간단했다. 살기 위해서.
“창아. 네가 좋은 말과 창과 검이 있다고 하나면, 너는 한 번에 몇이나 상대할 수 있겠느냐?”
“저 말입니까? 저는…… 서른! 아니 마흔까지도 가능합니다!”
동창은 오도리 부족에서도 내로라하는 장사였다. 그리고 용맹하기가 제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 때문에 혈기가 왕성한 그의 말처럼 서른에서 마흔의 전사를 상대하기는 가능할 것이다.
“백, 이백의 전사는 어떠하느냐.”
“저 혼자…… 말씀이십니까?”
동맹가첩목아의 말에 동창의 눈이 커졌다. 제 아무리 타고난 장사인 그라고 해도 백 명이나 되는 전사와 싸운다면 아마 지쳐서 결국은 죽고 말 것이다.
“그럼 아버님께서 보셨다는 것이…….”
동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건주에서 나고 자랐다. 조선에서도, 명에서도 변두리였기 때문에 보고 자란 것이 늘 같았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말을 듣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 한 번도 두 눈으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백 아흔 넷.”
“예?”
동창이 반문했다. 동맹가첩목아는 허공을 바라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동창은 아버지의 눈 안에 일렁이는 두려움을 보고는 흠칫하고 놀랐다.
‘두려워하신다고?’
동북면의 만호인 이성계에게 무려 29개나 되는 부족의 추장들이 충성맹세를 하고 의형제를 맺었다는 것은 동창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이성계의 인품에 반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난 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