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검주, 돌아가다(1)2021.10.23.
제독동창이란 자리는 절대로 낮은 자리가 아니다. 실질적으로 동창에 권한을 발휘하는 가장 높은 자리로 천자의 숨겨진 검이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천자의 곁에서 떠나는 일이 없었다. 그런 제독동창 부로가 사신단의 무장으로 변장을 하여 조선까지 온 이유는 간단했다.
[소신이 직접 검주 만우를 황상의 위대하신 그림자 아래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끌고 오겠나이다. 부디 허락해 주소서. 만세, 만세, 만만세.]
천자에게 만우에 대해서 들은 후로 매일 같이 꿈에서 만우가 나왔다. 꿈에서 나온 만우는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부로의 좋지 않은 곳을 검집으로 후려쳤고, 남성성을 잃었던 그때가 자꾸만 꿈속에서 나왔던 것이다. 꿈은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정신적인 피해가 쌓여 꿈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부로는 주화입마에 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악몽에서 깨어나 운기조식을 해 내부를 가라앉혀야만 했다.
‘나도 화경이다. 화경에 올랐는데, 검주를 압송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다가는 자신이 주화입마로 먼저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부로는 결심했다. 과거의 멍에에 당당하게 맞서기로 한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이후 부로는 그 누구보다도 필사적으로 노력을 해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올랐다. 거기에 가장 성취가 높은 그를 위해 천자가 직접 귀한 영약들을 하사하였기 때문에 내공 역시 삼 갑자가 넘었다. 대개 어릴 때부터 추궁과혈과 영약을 밥 먹듯이 받고, 5살부터 검을 잡고 내공을 닦은 강호무림의 장문인들이 화경에 도달하면 1갑자 반 정도의 내공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부로는 무려 그 두 배에 달하는 내공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내공의 크기로 실력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허나 내공이 많다고 하여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었기에 부로는 자신이 있었다. 지금 자신의 수준 정도라면 당장 중원에 나가도 무림십좌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자신한 것이다.
[금의위 오십과 동창무인 오십을 붙여 주마. 조선 사신단의 호위로 위장을 하여 짐을 위하여 검주를 잡아오라!]
조선의 국왕과 대신들에게 명나라 무인들의 위상과 실력을 보여주기도 할 겸, 천하제일인이라는 검주 만우를 잡아 명성도 높일 겸 하여 천자는 마음을 크게 썼다. 무려 백 인이나 되는 창위를 붙여 준 것이다. 비록 사신단은 그들을 일개 호위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창위 백 인이면 무림정파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제외하고는 하룻밤에 전멸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최소 절정 이상의 무인이 백 명이나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로는 자신이 과욕을 부렸음을, 과거의 악몽에 쫓겨 인생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음을 직감했다. 퍼뜩
“부 공공. 괜찮으십니까?”
만우에 의해 다시 한번 남성성이 날아가는 악몽을 꾼 부로가 눈을 번쩍하고 떴다. 그런 부로를 동창무인 중 하나가 부축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여긴 어디냐.”
“모화루(慕華樓)이옵니다.”
모화루라면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었다. 부로는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런데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입었던 옷과 다른 옷이었다.
“내가 어찌 돌아왔느냐?”
“무관이 정신을 잃은 부 공공을 부축하여 왔습니다.”
“내 의복은?”
의복 이야기가 나오자 동창무인의 표정이 변했다. 부로의 표정이 하얗게 변했다.
“……실수를 하시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환복을 시켜드리고…….”
“크윽.”
부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니까, 불타 버린 전옥서에 간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 사신 놈이 얼마 전 전옥서가 타고 죄인들이 모두 도망갔다는 것에 명나라 무관들이라면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면서 자랑질을 해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죄인들 중 무림인들이 있었다는 것에 사신 놈이 신이 나서는 부로면 그 흔적을 보고 단초를 찾을 수 있다고 하는 바람에 전옥서에 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우를 본 것이고.
“…….”
부로는 자신이 만우를 보고는 놀라 기절한 것도 모자라 똥오줌을 지렸다는 것에 할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가능했다.
“현경. 현경이다.”
“예?”
부로는 두 눈을 부릅뜨고는 동창무인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검주 만우. 그 자가 현경에 올랐단 말이다!”
“거, 검주를 보신 것이옵니까?”
동창무인의 눈이 커졌다. 전옥서에 간 것은 사신과 부로 단 둘이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모화루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 분명하다. 내가 그자를 어찌 잊을까.”
화경에 오른 부로는 확신할 수 있었다. 화경에 오른 자신의 경지로 만우를 보는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만우의 경지가 전혀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만우의 경지가 화경이 아닌 그보다 더 위라는 뜻이다. 만우가 현경에 도달했다는 것에 부로는 얼굴이 하얗게 되서는 동창무인에게 말했다.
“서 대인에게 가서 이르라. 우리 창위는 먼저 명으로 돌아갈 터이니 알아서 오시라고.”
“부 공공. 허나…….”
부로와 창위는 자신들의 정체를 사신에게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부로는 그런 것 따위는 귓등으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래 봤자 제독동창인 자신의 앞에서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뭐. 불만 있으면 와서 직접 따지라고 하거라. 우리 창위는 이번 일에서 빠진다!!!!”
만우의 등장에 혼백이 달아날 정도로 놀란 부로의 결정은 신속하고 단호했다.
“현경의 무인을 압송해 갈 자신이 있으면 네놈이 직접 잡아오든가 하거라.”
“아, 아닙니다.”
남성성이 없다고는 해도 여전히 목숨은 중요했으니까. *****
“전서 여의손의 관직을 박탈하고 3년 유배형에 처한다. 또한 오도도반수 백달원은 태형 열 대로 죄를 다스린다.”
형조에서 나온 판결에 동군영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반면 대전에 엎드린 여의손은 어깨를 부들거리며 떨었다. 자신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의손은 몸을 일으켜 따질 만한 깜냥은 없었다. 애초부터 영의정인 조준과의 관계만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일이 크게 될 리도 없을 그저 그런 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의 관심은 동군영이나 여의손에게 쏠려 있지 않았다. 고려가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췄다 알려진 삼한제일검(三韓第一劍)의 제자이자 스스로를 삼한제일검이라 밝힌 젊은 무인에게 모든 눈이 가 있었다.
“소장이 졌습니다.”
이번 사건의 가장 중요한 자문역을 한 삼한제일검의 갑작스런 등장에 거부감을 표한 대신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거부감은 순식간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전 삼한제일검의 제자인 새로운 삼한제일검에 대해 운검이자 조선제일검인 권희달이 나서 사실을 밝혔기 때문이다. 조선제일검이 삼한제일검에게 패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허니 삼한제일검이 하는 말이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조선제일검, 아니 조선제이검이 된 권희달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우를 만남으로 인해 자신이 알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충분히 강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향상심. 안주하지 않는 자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마음이다. 그리고 무예에 대한 열의는 권희달도 결코 작지 않았다.
“개경 인근 발가산 둔덕에 있는 삼밭을 발견하였고, 오도도반수 백달원이 그를 태우고자 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 니다. 이후 화기를 다루는 무공을 익힌 자를 백달원이 도공으로 위장하여 보호하고 있었던 것을…….”
만우는 중간중간 존대를 써야 할 때마다 마뜩치 않은 티를 팍팍 냈지만 대신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갑작스레 등장한 만우와 일의 경과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만우의 등장과 권희달의 인정으로 인해 만우의 발언 자체가 강력한 증거로서의 영향력을 끼쳤다. 더군다나 백달원을 추포해 와 심문을 하였고 그 결과 전서 여의손의 말이 거짓으로 판명이 난 것이다.
“계방 좌익찬 설운과 삼한제일검 만우에게 국법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을 가상하게 여기는 바, 쌀 다섯 섬과 비단…….”
만우는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포상 목록을 읽어 내려가는 임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을 옥죄는 듯한 의복 때문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만우 정도면 숨을 쉬지 않고 귀식대법 같은 것을 펼치지 않아도 반시진은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리와 의복이 뭐라고 만우를 무던히도 괴롭히고 있었다.
‘성격 같아서는!’
삼한제일검이고 뭐고 그냥 꼬투리 잡는 놈들을 잡아다가 한 열흘 정도 서까래에 매달아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하지만 여긴 무림이 아니고 임금이 있는 조선이었다. 만우가 임금이 될 생각이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니 이 웃기지도 않은 광대놀음에 맞장구를 쳐 주기로 한 것이다.
“또한 이번 일로 인하여 무고함을 겪은 감찰방 장령 동군영에게 일본국에 다녀온 일까지 감안하여…….”
동군영이 비로소 완벽하게 혐의에서 벗어나 포상까지 받게 된 것을 들은 만우는 참았던 숨을 짧게 내뱉었다. 어쨌든 이제 일이 마무리가 된 것이다.
‘그 환관 놈은 왜 튄 거지.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것인데…….’
만우는 전옥서에서 만난 환관이 튀었다는 것을 듣고는 께름칙함을 느꼈다. 나름 명 천자를 보필하는 창위 중 하나인 동창이 일개 무장으로 변장을 하고는 사신단에 껴서 조선까지 들어왔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명에서 수년을 보낸 만우는 그들의 위세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물론 그 창위를 박살 내 놓은 것 역시 만우지만, 적어도 그들이 변장까지 하면서 조선에 들어올 족속들이 아니란 것은 알았다.
“이상으로 논공행상을 파하겠소. 감찰방 장령 동군영과 삼한제일검, 영상과 좌상은 잠깐 남으시게.”
임금은 만우를 바라보는 대신들의 눈이 뜨겁다는 것을 느꼈지만 깔끔하게 그들의 관심을 사전에 차단했다.
“이만 경들은 물러가시오.”
고려가 흉하고 조선이 흥한 후 양반들이 사사로이 사병을 가지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됐다. 고려의 병폐 중 하나인 호족들의 세력을 없애고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조선의 집권세력이 된 사대부 양반들이 조선제일검을 조선제이검으로 만든 삼한제일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리 없었다. 제 몸 하나 챙기는 것은 모든 양반들이 혈안이 되어 아낌없이 재물을 투자하는 것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허험.”
대신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대전에 남은 것이 동군영과 만우, 조준과 하륜이 되자 임금은 꼿꼿하던 허리를 풀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동 장령. 고생이 많았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동군영이 넙죽 엎드렸다. 전서인 여의손과 그를 위시한 유림의 선비들이 맹렬하게 공격하는데 그를 위해 힘을 써 준 사람이 임금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은 피식 웃었다.
“과인에게 고마워할 것이 아니네. 역졸 하나 제대로 뒀다고 생각하시게.”
“…….”
동군영은 고개를 대전 바닥에 처박은 채로 눈을 힐끗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잔뜩 심술이 난 만우의 표정이 동군영의 눈에 들어왔다.
“풋.”
그런 만우의 얼굴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자신의 잘못을 안 동군영이 헙 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후우…….”
만우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전립을 묶고 있던 끈을 풀었다. 그러자 전립에 달려 있던 수실이 스르륵하고 만우의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임금 앞에서 더럭 전립을 벗은 만우의 모습에 조준과 하륜의 눈이 커졌다. 이내 조준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무례하다!!! 지금 무엇 하는 겐가!!!”
만우가 스윽 눈을 돌려 조준을 쳐다봤다. 조준이라면 만우도 한 번 어떻게 생긴 양반인지 보고 싶었다. 전서 여의손이 믿는 우군이란 사람이 조준이란 것을 들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금이 조준과 하륜을 함께 남긴 것을 보면, 흉금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사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만우는 조준을 향해 말했다.
“본주가 한 번 참는다.”
“뭐, 뭐…….”
조준은 임금과 만우의 사이을 몰랐기 때문에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하륜은 명나라 사신 유사길에게 대하는 만우를 봤기 때문에 임금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불쾌해하지 않으신다.’
임금은 그냥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만우가 하는 언행이나 행동에 조금의 불쾌함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철혈이라 소문이 날 정도인 임금인데, 그런 임금이 조용하다는 것은 만우의 언행이 허가된 것이라는 뜻이다.
“크음…….”
하륜이 본 것을 조준도 본 모양이었다. 조준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으니까.
[과인은 조선을 다스려야지, 그자의 칼에 맞아 죽고 싶지 않소이다.]
조준의 머릿속에 임금이 했던 말이 다시금 스쳐지나갔다. 그게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