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너희의 싸움은 나와는 상관없다(3)2021.10.02.
조준은 저 선비들의 머릿속 깊숙이 박힌 무(武)에 대한 천시를 느낄 수 있었다. 허나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조준은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균형이었다. 오행이 균형을 이루듯, 문(文) 역시도 무(武)와 균형을 이뤄야 하는 것이지 어느 하나가 득세하는 순간 재앙이 찾아온다.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졌던 바로 그때처럼. 또한 조선 역시도 무(武)가 없이 문(文)만 독보하였다면 절대로 썩어빠진 고려를 타파하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의 문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나라가 세워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파벌을 지으려 드는 것일꼬. 전하께서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지 십분지 일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조선이 세워지고 십수 년이 흘렀다. 그렇게 되니 슬슬 신진사대부라 불리던 사대부들, 유학과 경전을 읽은 이들이 세력을 꾀하려 하는 것이다. 정도전에 의해 사병이 혁파되어 무(武)의 힘이 줄어들고 조선의 기틀을 다지면서 문(文)이 득세하자 선비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조준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임금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또한 얼마나 능력이 뛰어난 자인지. 때문에 정도전과 남은이 정안군이 아닌 이방석을 세자에 봉해야 한다고 할 때 정안군의 편을 들어주었던 조준이다.
‘조선에는 능력 있는 자가 필요하니까.’
정통성과 명분이 같은 선상에 있다면 능력이 있는 자가 임금이 되어야 한다. 조준은 그리 생각하여 함께 뜻을 했던 동지인 정도전, 남은과 멀어졌다. 그 결과 삼봉(정도전)과 의령(남은)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대감마님. 손님이 드셨사옵니다.”
“오늘은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 아뢰어라!”
조준은 또 다시 선비들이 찾아온 줄 알고 하인에게 그리 말했다. 하지만 그때 문이 열리더니 웃는 얼굴에 염소상을 한 자가 들어섰다. 그 사람을 본 조준이 환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정!!!”
“영상께서 고초가 심하신 모양이옵니다.”
“허허헛. 좌상께서 오신 줄 알았다면 내 버선발로 나갔을 것을.”
“저까지 있으면 유생들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들어왔습니다?”
“허허헛!”
조준이 기껍게 웃음을 터뜨렸다. 좌정승 하윤(河崙)의 방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준이 그런 하륜을 흘겨보면서 짐짓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조정의 일은 나 몰라라 하고 사직했던 그대가 아닌가?”
“으하핫. 아직도 그것을 마음에 두십니까?”
작년에 하윤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사직을 했었다. 당시 지괴(地怪) 등의 천재지변이 일어나 임금을 대신하여 하늘에 용서를 구하기 위해 몇몇 대신들이 자발적으로 사직을 한 것이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임금이 다시 불러 하윤을 의정부 좌정승 자리에 앉히기는 했지만 조준은 틈 날 때마다 그것을 서운하다 말하며 하윤을 곤란하게 하곤 했다.
“그래.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신가?”
그렇게 웃음기가 사라질 때쯤, 조준이 하윤에게 물었다. 하윤은 그런 조준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주상전하께서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뭐?”
하윤의 말에 놀란 조준이 일어나 의복을 가다듬고 차림새를 살폈다. 그리고는 정갈한 자세로 앉아 하윤에게 말했다.
“말씀하시게.”
어지(御旨)를 통해 하교가 내려온 것은 아니나 임금의 전언이었다. 예를 다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윤은 그런 조준에게 말했다.
“전서 여의손의 일로 선비들과 유림에서 말이 많은 것을 주상전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시겠지. 전하께서 모르시는 일이 있겠는가?”
하윤은 조준의 임금을 향한 굳건한 충심에 웃었다.
“주상전하께서 알 수 없는 무인의 무리와 춘추관의 기사관이던 동군영이라는 선비를 자주 만나시면서 총애하시는 것도 사실이옵니다.”
“……그런가?”
무도한 무뢰배들과 임금이 어울린다는 선비들의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조준이 임금을 의심하진 않았다. 임금이 이유 없이 그들과 어울리는 것은 아니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선비와 유림, 사대부는 동군영이란 젊은 선비가 동만익의 아들이란 것 때문에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동만익이면…….”
“두문동의 사건 이후 조정을 등지고 익주로 내려갔던 선비이옵니다.”
“알고 있네. 알고 있어. 들어 본 적 있네.”
이성계에 반대하여 항의하기 위해 두문동으로 들어간 선비들을 불화살로 쏴 태워 죽인 것이 바로 지금의 임금이다. 즉, 동군영의 가문은 조선에 반대했던 역도의 가문이었다. 임금이 역도 가문의 선비를 감싸고돌고, 수상한 무인 무리들과 자주 만난다는 소문이 도니 선비들이 불안감을 느껴 뭉치려고 하는 것이다. 새롭게 연 조선 왕조에 유림을 제외한 다른 견제 세력의 등장이 달갑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왕조 말기에 문벌과 호족들에 의해 괄시를 당했던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유학 세력들의 세상이 열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진짜 목적이 아니겠지. 아닌가?”
“물론입니다.”
하윤은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그들에게 명분을 준 것도 자명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주군이자 이 나라의 임금은 결단을 내렸다.
“조준 대감께서 그런 움직임으로 모이는 선비들을 한 곳으로 모아 세력을 만드시고, 그곳의 수장이 되시기를 바란다는 것이 주상전하의 뜻이옵니다.”
“……!!!”
조준의 눈이 커졌다. 잠시 고심하던 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궐이 있는 방향을 향해 깊숙이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조준이 하윤에게 말했다.
“내 전하의 명을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이행하겠노라고 전해 주시게.”
어차피 명분이 주어졌고 그들의 움직임을 강제할 수 있는 명분이 없다면 기회를 열어 주는 것이 더 나았다. 그런 것 없이 무조건 압제만을 하다가는 불만만 극에 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예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들면 된다. 임금은 그 수단으로 조준을 택했다. 조선의 기틀을 만든 개국공신에 영의정인 조준은 현재 조정 대신의 대표자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임금은 충성을 바치는 조준을 자신 대신 유림에게 목줄을 채워 끌고 다닐 사람으로 점찍은 것이다.
“내 조만간 궐에 들겠다 전해 주시게. 저…… 떠벌이들과 말일세.”
그렇게 하기로 한 이상, 조준은 하윤에게 말했다.
“그때 맞춰 전하께서 준비하신 것들을 풀어 놓으시면 될 것이야. 저 떠벌이들이 제 눈으로 직접 보면 찍소리도 못 할 증좌를 말일세.”
“……아시고 계셨습니까?”
하윤의 말에 조준이 빙긋 웃었다.
“영의정 자리에 있다 보니 원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이런 저런 소문들이 들리더군. 그리고…….”
조준이 하윤을 쳐다보며 말했다.
“전하께서 자주 만나신다는 수상한 무인들, 나도 만나 볼 수 있겠나?”
하윤의 눈이 커졌다. ***** 천만다행이도 호선의 상세는 빠르게 좋아졌다. 혈성의 기운과 선기가 서로 상극이었지만 500년 간 선기를 수양하면서 시간을 보낸 호선의 회복력을 혈성의 기운이 압도한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거기에 감령과 필두, 문형일도 있었기에, 김향은 무서울 것 하나 없이 마포나루의 한적한 곳에 있는 한 허름한 초가집에 쳐들어갔다.
“조 씨 할아범을 납치해 가고 방매 언니의 사향을 훔쳐간 작자들이 있는 곳이에요!”
“하오문 놈들이 그러면 그렇지.”
감령을 비롯한 중원에서 온 일행들은 단숨에 그 초가집이 하오문의 안가란 것을 알아보았다.
“하오문 냄새가 난다, 나.”
감령이 킁킁거리면서 초가집의 문을 빵 하고 박찼다. 그런데 기세 좋게 문을 찼던 감령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뭐야? 누가 벌써 와서 헤집었는데?”
필두가 그게 무슨 소리냐며 감령의 어깨를 밀치고는 들어왔다. 그런데 감령의 말대로 초가집 안에는 이미 수많은 하오문도들이 다양한 자세로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죽었어.”
문형일이 그들의 맥을 짚어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오문도들 중 살아있는 놈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지 마.”
문 밖에서 감령과 필두, 문형일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호선이 김향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김향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와서 선수를 친 거지?”
문형일이 걸어 나오면서 호선에게 말했다.
“마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투귀대의 흔적인 듯한데…….”
“투귀대? 그 마교? 다 전옥서에 있잖아요?”
옥령은 물론이거니와 주창을 비롯한 다른 투귀대의 고수들은 전부 전옥서에 잡혀 있었다. 하지만 문형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자리에 없던 이가 하나 있소.”
“아! 그…… 유생처럼 생긴 그자를 말하는 건가요?”
500년 묵은 영물이 교태 섞인 여자의 말투를 따라한다는 것에 처음에는 질겁했던 문형일이지만, 결국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질겁만 하기에는 인간으로 둔갑한 호선의 외모가 너무 아름다웠다.
“파천서생이라고?”
감령이 문형일을 쳐다봤다. 문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마교의 고수가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까.”
“이런…….”
감령이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문형일이 감령을 쳐다봤다.
“파천서생 마일이라면 절정에 불과하지 않나?”
“그 작자가 무서운 건 무공이 아니라 이거야 이거.”
감령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만우만 쫓아다녔고, 비주류로 취급 받았던 문형일이었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중원무림의 세력이나 주요 인물의 정보에는 그리 밝지 않았다. 하지만 녹림산적의 총채주인 감령이나 장강수적의 총채주였던 필두는 아니었다.
“무림맹의 제갈가와 지략으로는 용호상박이라는 마가(魔家)의 일원이야. 쉬울 리 없지. 거기에 파천서생은 그 마원의 아들이라고. 마교의 차기 총군사 자리에 오를.”
“흠. 머리가 똑똑한 양반이라는 거지. 그런데 그냥 평범하던데.”
문형일은 태평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령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작자가 움직였다는 것은 이미 모든 지략이 짜였다는 소리야. 투귀대와 움직일 때는 매번 전장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기 때문에 그 작자가 할 일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고.”
군사 혹은 책사라 불리는 이들이 가장 두려운 점은 번뜩이는 통찰력이나 직관력, 혹은 임기응변이 아니었다. 그때그때 변하는 전투 상황에 맞춰 임기응변을 발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은 오히려 전쟁 경험이 많은 장수들이나 무인들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사, 혹은 책사들은 그들이 완벽하게 짠 판 위에서 움직일 때 비로소 무서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배 위에서나, 검이 막 날아다니는 곳에서 군사가 뭘 하겠어. 뭐, 절정도 약한 수준은 아니지만.”
절중 수준만 되어도 명나라에서는 변두리의 한 성(省)에서 최강자 소리를 듣곤 한다. 그만큼 중원이란 땅이 크기도 하지만, 절정이란 수준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감령이나 필두, 문형일의 눈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그 파천서생이 무언가를 준비했다?”
“아마 제 주군을 구해내기 위한 것이겠지. 그러니까…….”
필두와 문형일이 말하고 있을 때, 초가집에서 가장 늦게 나온 마익후가 예의 그 딱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늦었다.”
“뭐?”
“불이다!!!”
놀란 필두와 문형일이 마익후를 쳐다본 찰나, 감령이 손가락으로 저 멀리를 가리키면서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허…… 그 파천서생이란 양반. 미친놈이야 혹시?”
전옥서가 있는 방향에서 치솟은 검은 연기에 문형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그의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어딜 갔다가 이제 오십니까.”
“음? 무슨 일 있습니까, 나리?”
설운이 기다렸다는 듯 만우를 맞이했다. 만우는 한 시진이나 발가산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지만, 열양공을 익힌 무인의 단서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옷까지 챙겨 입으시고?”
만우는 설운이 의복을 빼입고 있었다는 것에 고개를 갸웃했다. 설운은 딱히 신분을 숨긴 채 발가산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관복을 입고 있었다.
“부상청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오늘 연회를 연다고요.”
“연회?”
만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부상청이라느니, 오도도반수 같은 길고 복잡한 이름을 달았을 때부터 백달원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대충 눈치를 챘던 만우다.
“노인네가 양반 흉내를 어지간히도 내고 싶은 모양입니다요.”
명예욕과 신분 상승. 백달원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두 가지의 가치일 것이다. 설운은 그런 만우의 말에 뭐라 반박하지 않았지만 표정을 보니 수긍하는 듯했다.
“백달원이 무엇을 꾀하고 있는지 직접 만나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왜 찾으셨습니까요?”
설운이 그리 말하는 것은 이해했다고 치자. 그런데 왜 자신을 찾았단 말인가. 자신은 고작해야 일개 역졸로 따라왔을 뿐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