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너희의 싸움은 나와는 상관없다(2)2021.09.28.
“설운. 계방의 좌익찬. 조사의의 난에 주상전하의 어명을 받아 공을 세웠다?”
“예, 큰아비.”
한양에 사람을 보내 정보를 모아 오라는 백달원의 명령은 채 몇 시진이 지나지 않아 성공적으로 끝났다. 불과 몇 시진 만에 백달원의 손으로 정보가 들어온 것이다.
“그게 전부인가?”
“예.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 넘기고.”
본래 한 사람에 대해 파악한다는 것은 오랜 기간과 자금이 투자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정의 당상관에 준하는 대신들의 경우에는 그런 정보들이 알아서 축적되어 있었지만 설운의 경우에는 별 정보가 없었다. 애초에 은월루 같은 곳에서 주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방매…… 그냥 매분구입니다.”
“……매분구?”
“예. 한양 임방에도 출입 기록이 있습니다. 제법 그래도 상재가 있어 한양제일매분구라는 소리를 듣고 다녔다고 합니다.”
“상재가 있다? 계집이?”
“예. 또 독하기가 보통이 아니랍니다. 헌데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백달원은 자신이 손에 쥔 정보가 이미 은월루에 의해 한차례 가공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여아는 별 볼일 없는 아이군. 그러면 이 자는.”
“감찰방의 동군영 장령입니다. 보빙사 여의손의 부정을 고발한 그 젊은 관리.”
“주상께서 아끼신다는?”
백달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과거에 장원급제를 했으나 고작 춘추관 서기관으로 있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비록 백달원이 양반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생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무리에 편중하려면 그들의 세상에 대해서 잘 알아 둬야 했기 때문이다.
“장원급제를 한 이가 고작 기사관이다?”
“익주동가의 장남이라 하더이다.”
“그 때문에 그런 인재를 기사관으로 삼지는 않았을 터.”
익주동가라면 얼마 전에 세외에서 들어온 괴한들에 의해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가문이었다. 그곳의 가주인 동만익이 두문동의 생존자라는 것까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백달원은 그것이 동군영이 춘추관 기사관이 된 이유는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부패할 대로 부패했었던 고려라면 모를까,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조선은 인재가 부족한 초기였기 때문에 유화적인 정책으로 많은 이들을 품었기 때문이다.
“응?”
그러던 백달원은 공란으로 남겨진 동군영의 지난 행적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은월루에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있더냐?”
“예.”
“어사구나.”
백달원의 두 눈이 광채를 발했다. 과연 그의 경륜은 무시할 것이 되지 못했다. 단박에 그 공란의 의미를 알아챈 것이다.
“아이들에게 용모파기를 보여 주거라. 어디서 봤는지, 행적을 알아야 하니.”
“예, 큰아비!”
백달원은 곧바로 보부상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발가산의 부상청은 전국의 보부상들이 모이는 곳인 만큼, 금세 동군영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나왔다.
“안변?”
“예.”
“조사의로구나. 조사의. 그때 활약한 것이 틀림없으렸다.”
춘추관 기사관을 하던 자가 행적에 밝혀지지 않은 공란이 있고, 그 이후에 감찰방 장령으로 품계가 훌쩍 뛰어서는 보빙사와 함께 일본국에 다녀왔다? 보통 공을 세우지 않고서는 그렇게 훌쩍 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동군영의 지난 행적이 어사였고, 그 기간 중 조사의의 난을 해결한 공이 있다면 그런 파격적인 승진과 임금의 총애도 이해가 갔다.
“그랬어. 그러니 주상전하께서 그 젊은 선비를 아끼는 것이다. 허어…….”
그렇다면 백달원은 훨씬 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일이 아니구나. 자칫하면 주상전하와 조준 대감을 필두로 한 사대부의 신경전이 될 수 있음이야. 허어…….”
아직 조선이란 나라는 기틀이 완전하게 다져진 나라가 아니었다. 조선임을 명명하고 새로이 왕조를 연 것이라고 해 봤자 십 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수백 년 이어진 고려 왕조에 비해 조선 왕조의 뿌리는 그 근간부터가 얕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같이 손을 붙잡고 조선 왕조를 세웠던 이들의 머릿속에 슬슬 다른 생각이 들어앉기 시작할 때였다.
“흐음…… 흐음…….”
깊은 고민에 잠긴 백달원의 입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살면서 큰일을 겪어 온 백달원이라고는 하나 시류에 휘말린 것이 대부분이지, 지금처럼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준 대감께 보낸 서신의 답은 언제 오는 것이냐!!!”
백달원이 답답하다는 듯 괜히 곁에 선 보부상들에게 다그쳤다.
“최, 최대한 빨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큰아비.”
“너무 늦다. 늦어. 움직임이 늦단 말이다.”
백달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의 보부상들은 백달원이 왜 이리 초조해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혹여 모르니 만약을 대비하여 퉁소에게 차질 없이 준비를 하라 이르거라.”
“!!!!”
보부상들이 퉁소란 이름에 놀라 고개를 들고 백달원을 쳐다봤다. 백달원은 자신을 쳐다보는 보부상들을 돌아보면서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하고 찼다.
“퉁소는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패다. 이를 활용해야 저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 말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예, 큰아비!!!”
*****
“오! 이건 분합 아니어요?”
“…….”
방매는 일부러 말하는 목소리를 올려 보부상들에게 말했지만 그런 방매에게 돌아온 것은 깔끔한 무시였다. 하지만 방매는 기죽지 않았다. 이 정도의 노골적인 무시로 기죽기에는 방매의 얼굴이 너무 두꺼웠다.
“이거 얼마에요? 한양에 가져가서 팔면 잘 팔릴 것 같은데.”
“파는 것 아니니 가슈!”
발가산은 조선팔도의 보부상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보부상들이 서로 값나가는 물건을 교류하는 장터도 있었다. 한 지역의 물건을 가장 이문이 남는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서 파는 것이 보부상들의 주된 상행위였기 때문에 이런 교류가 활발했다. 각 주군의 임방에서도 이런 식으로 보부상들이 교류와 거래를 하면서 정보가 도는 것이었다.
“돈은 있다니까요?”
“아, 안 판다니까 그러네!”
사람이 사겠다고 해도 보부상이 안 파려고 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야 방매가 부상청이 있는 발가산에 들어온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위에서 무슨 말이라도 내려온 듯 보부상들이 방매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적대적이랄까. 그래도 막무가내 식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을 걸어도 대꾸를 해 주지 않거나, 지금처럼 방매가 친근하게 굴어도 쌀쌀맞게 구는 정도였다.
“아니. 보부상이 파는 걸 꺼려하면 어떻게 해요! 내가 비싸게 사 준다니까!”
“안 판다고!!!!”
방매가 칫 하고 소리 내고는 손에 든 분합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보부상에게 말했다.
“조금 사 줄까 했더니. 이거 한양에 가져가도 저잣거리에는 내놓을 생각도 하지 말아요. 이런 거 파려고 내놓았다가는 뺨만 맞으니까.”
보부상이 그런 방매에게 도끼눈을 떠 보였다. 하지만 그 정도에 기가 죽을 방매가 아니다.
“하! 뭘 봐요!”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옥령에게서 쫓겨 다녔던 방매였다. 초절정 고수의 살기도 받아 봤는데 한낱 보부상의 도끼눈쯤이야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치사하게 말이야. 보부상이란 작자들이 담합해서는 사려는 사람을 따돌려?”
방매가 주변의 보부상들한테도 손가락질하면서 소리쳤다. 누가 보더라도 행패에 불과했지만 그런 방매를 쳐다보지도 않는 보부상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래봬도 내가 한양제일매분구야! 한양에서 나 보기만 해 봐! 그 물건 안 좋다는 소문 쫙 다 내 버릴 테니까!!!”
방매는 빼액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장터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방매는 장터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언제 화냈냐는 듯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다.
“기름을 파는 보부상은 없는데.”
삼밭에서 기름이 쓰였기 때문에 기름을 찾아 장터에 나온 방매였다. 하지만 사실 보부상들이 가지고 다니기 힘들고 무거운 기름을 팔 리 없었다. 파는 기름이라고 해 봤자 분칠을 하고 화장을 할 때 쓰이는 머릿기름 정도가 다였다.
“어디서 기름이 난 거지?”
방매는 머리를 굴렸지만 답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방매의 눈이 커졌다.
“비키시오! 비켜!!”
달그락 달그락 소달구지가 끌고 가는 수레 위에 놓인 상자가 방매 옆을 지나가면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금속이나 목재가 부딪치면서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작으면서 내구도도 약한 도자기가 나무 상자에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였다.
“자기?”
백자나 청자는 양반들이 좋아하는 기호품으로 아주 비싸게 팔린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만들 수 있는 도공은 평민임에도 상당한 대우를 받는다.
“자기…….”
자기를 구워 내기 위해서는 가마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가마는 아주 고온의 불을 다뤄야 하기 때문에 특별히 불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가마터는 물과 장작을 구하기 쉬운 곳에 있었다.
“……기름. 그래, 기름.”
방매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더니 방매에게 답일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송진과 송유.”
발가산에 백정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에서 나온 기름이 나올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송진과 송유가 있었다. 둘 다 소나무에서 나오는 것으로 송진은 소나무에서 나오는 진액이고, 소나무의 가지를 태워 나오는 기름이 송유다. 그리고, 둘 다 불화살에 쓰이는 재료로 아주 잘 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가마터에 가 보자.”
방매는 수레가 오면서 낸 바퀴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
“위험한 자들이옵니다! 그런 자들을 주상께서 신임하신다는 것은…….”
“흐음…….”
조준은 두 눈을 감은 채 신음을 흘렸다. 그런 조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영상(領相) 대감.”
조준은 꾀꼬리처럼 떠들어 대는 선비들의 말에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시간이 지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조준이 눈을 떴다. 조용. 조준이 눈을 뜨자 각자 자신이 할 말을 하기에 바쁘던 선비들이 입을 다물었다.
“주상전하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으니 그대들은 더 이상의 말로 나를 곤혹하게 만들지 마시오.”
“허나 대감!!! 이는 보빙사로 일본국에 다녀온 여 전서(典書)가 한낱 감찰방의 장령 따위의 모함에…….”
선비 중 하나가 조준에게 말하려 했다. 조준은 손을 들어 그 선비의 입을 막았다.
“그 역시도 내가 아는 바요. 허나 이 역시 주상전하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으니. 이렇게 모여 주상전하께서 아무런 결정도 내리시지 않은 일에 말을 나누는 것도 불경에 속한다는 것을 모르시오?”
“…….”
조준의 일갈에 선비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중에는 당하관에 속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어쨌든 사대부들을 든든하게 떠받치는 유생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허나 나 역시 전하께서 그런 불미스런 무리를 곁에 두신다는 것은 저어되는 바. 전하를 알현하고 직접 고견을 들을 터이니 더 이상 말을 하지 마시오.”
상소에도 만족하지 못한 선비들이 조준의 집에 찾아와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며 떠들어 대는 것 때문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조정에서 보는 공무만 해도 바쁜데 퇴궐하여 돌아오면 이런 할 일 없는 자들이 하릴없이 죽치고 앉아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 떠들어 댔다. 이제는 듣기가 지겨웠다.
“이만들 돌아가시오!”
“예, 영상 대감. 그러면 영상 대감만 믿고 돌아가겠습니다.”
선비들이 조준의 축객령에 일어나 인사를 하고서는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 뒷모습이 꼭 저자에 몰려다니는 왈패들 같아 보였기 때문에 조준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아프군. 머리가 아파.”
조준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든 이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웅웅 울리는 듯했다. 만약 자신을 세뇌시켜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였다면, 그건 반쯤 성공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 학문을 조금 닦았다 하여 그것으로 왕조를 만들었다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