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너희의 싸움은 나와는 상관없다(1)2021.09.25.
“기름 냄새?”
“네. 분명해요.”
“백달원이란 늙은이는 그럴 만한 깜냥도, 능력도 없는 노인인 듯 보였는데.”
“난세를 거쳐 무려 개국의 공(功)으로 오도도반수에 임명이 되었고 조선의 모든 주군에 임방을 세운 자라고 들었어요.”
설운의 말에 방매가 이견을 제시했다. 설운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노인이 나를 속인 건가.”
“백달원 정도의 경륜을 쌓은 자에게 나리는 아해에 불과하니까요. 더군다나…….”
방매가 멈칫하자 만우가 이어서 말했다.
“문과 급제도 아니시고, 무과 급제시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만 아예 서책을 손에서 놓은 것은 아니오!”
설운이 만우에게 발끈하며 말했다. 만우가 자신에게 무식해서 속아 넘어갔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뭐,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요. 말이.”
만우는 발끈하는 설운을 보면서 손을 내저었다. 설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노인의 경륜은 서책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얻을 수 없는 경험이 가미되어 있지 않습니까.”
책이라면 무공서 이외에는 쳐다본 적도 없는 만우가 태연하게 말했다. 설운은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동 장령님의 무고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이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설운은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만우 때문에 돌려서 말했다. 만우는 피식 웃었다.
“뭐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백달원의 입에서 사실을 실토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백 가지도 넘습니다요.”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설운이 눈이 동그래져서는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중원에 있을 때 그곳에서 배워 온 고신법만 해도…….”
“고, 고신은 안 됩니다!!!!”
설운은 만우가 얼마나 살벌한 인간인지 미처 잊고 있었다. 설운이 다급히 소리치자 만우가 정말 괜찮다는 듯 말했다.
“겉으로는 하나도 태가 안 나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요. 노인이니 장담은 못 하지만 절묘하게 점혈로 고통을 극대화시키는 혈만 몇 군데 찔러도…….”
그런 혈을 찔리면 깃털로 코를 간지럽혀도 칼로 콧속을 후비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아무리 고통을 줘도 극도로 간지럼을 느끼는 혈도 압니다!”
만우가 두 눈을 반짝였다. 방매는 그런 만우를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설운은 이마를 탁 하고 짚었다. 중죄인이나 대역 죄인이 아닌 다음에야 고신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국법으로 금지된 일이었다. 설운이 그리 말하자 만우는 눈을 또르르 굴렸다.
“안 걸리면 되지 않습니까?”
“안 됩니다. 안 돼요! 정말로.”
설운은 필사적으로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그런 설운을 보면서 혀를 쯧 하고 찼다.
“아니, 설운 나리가 도통 미덥지가 않아서 말이지요. 말 한마디만 하십쇼. 그러면 백달원이가 정말 자기 입으로 사실을 술술 실토하게 만들어드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결국 설운은 제 입으로 만우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새삼 설운은 동군영이 저 양반을 어떻게 데리고 다녔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말이 그냥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럴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을 피 말리게 만들었다.
“우리 똥구녕 나리의 무고함을 입증하여야 하니 설운 나리께서 방법을 찾아내시지 못한다면 할 겁니다?”
만우가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설운은 만우의 걸어 나가는 등을 보면서 이마를 탁 하고 짚었다.
“힘내세요.”
“아닙니다 옹…… 이 아니라 방매 낭자.”
방매가 옹주라 부르는 것을 끔찍이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에 타협을 해 낭자라 부르기로 한 설운이었다. 방매는 그마저도 닭살이 돋는다면서 싫어했지만 그렇게 부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상왕의 수양딸이자 임금의 여동생인데 이름을 부르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수행원이 아니라 짐이야 짐.’
남들이 보기에는 설운이 두 수행원을 대동하고 다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설운은 누가 보더라도 양반이었지만 만우와 방매는 양반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는 완전 정반대였다. 설운이 이 두 사람을 모시고 다니는 셈이었다. 실제로 오는 내내 마부 노릇을 한 것은 설운이었다.
“일단 기름 냄새가 난 것은 확실하니까 기름이 많이 쓰일 만한 곳을 조사해 보시는 건 어때요?”
나간 만우 대신 방매가 옆에서 설운에게 조언했다. 설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방매 낭자께서는…….”
“저도 한번 돌아다녀 볼게요. 아마 설운 나리보다는 절 더 만만하게 생각할 테니까요.”
매분구도 엄밀히 말하면 보부상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생리를 가장 잘 아는 것이 바로 방매였다. 설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매에게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이런 보부상 몇 놈들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아요!”
방매가 팔에 없는 알통을 만들어 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설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고 작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충녕군 마마를 모시는 것이 더 쉽겠어.”
만우와 방매를 보조하는 일이 애를 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충녕군은 따분하기는 해도 애답지 않은 애어른이기 때문에 서책 보는 것을 좋아해 어려울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아. 한양 가고 싶다.”
오자마자 백달원에게 깜빡 속아 넘어가고, 날뛰는 만우와 옹주인 방매에게 혼이 쏙 빠진 설운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 설운이 그리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먼저 부상청 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만들어 둔 건물에서 걸어 나온 만우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대놓고 감시하고 있으면 대체 어떻게 하라고.’
나름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만우를 쳐다보는 감시의 눈길이 곧장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감시자를 붙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응?’
하지만 이내 감시자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만우는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기 때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생각이지 대체?”
백달원이라는 노인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쨌건 만우는 부상청에서 곧바로 빠져나와 보부상들의 편의를 위해 지어 놓은 숙소를 지나쳐 서북면과 동북면에서 한양으로 보내오는 물품들이 쌓인 창고 주변을 한 바퀴 스윽 하고 돌았다.
“흐음…….”
상왕으로부터 발가산 전체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기 때문에 보부상들로 가득했다. 가족을 데려와 살고 있는 보부상들도 있는 모양인지 가정을 꾸린 이들도 있었고, 그런 보부상들을 상대로 또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보부상들로 이뤄진 온전한 마을 하나가 발가산에 있는 셈이었다.
“역시 최고의 빚은 바로 목숨 값인가.”
마을 하나가 제대로 된 관아나 관리도 없이 부상청과 백달원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도 세금도 내지 않고, 여러 부역에 대한 의무도 없는 온전히 보부상들을 위한 땅이었다. 그게 전부 조선의 임금을 구해 준 보답이었으니, 확실히 백달원이 만호로 있던 이성계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이 그에게 내려온 절호의 기회를 잘 잡아챈 셈이다.
“이러면 찾기 힘든데.”
발가산에 만들어진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만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무공의 흔적이었는데 말이야.”
삼밭에서 만우가 본 것은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던 흔적이 아니었다. 만우는 그때, 삼밭에서 무공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화기(火氣)를 사용하는 무공이었는데 말이지.”
방매는 그 방화 현장에서 기름 냄새를 맡았지만, 만우는 무공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 발가산에 무공을 쓰는 무인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만우가 연기를 보고 도착하기까지 걸린 짧은 시간에, 삼밭을 통째로 불살라 버릴 정도의 제법 강한 화기를 사용하는 무공을 가진 무인이 말이다.
“열양공(熱陽功)이라.”
냉기나 화기를 다루는 무공을 익힌 무림인은 강호에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무공들은 익히기가 대단히 까다롭기 때문에 대부분 실전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빙공(氷功)의 경우에는 세외의 북해빙궁이 있다고는 하지만, 열양공(熱陽功)을 익힌 무림인은 적어도 만우가 활동할 때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냉기와는 달리 화기는 사용하는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소림의 달마대사가 창안한 구양신공(九陽神功)이 있다고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소림사에서도 구양신공을 익힌 자는 지난 백 년 간 나오지 않았을 정도다. 그만큼 열양공은 위험한 무공이기 때문이다.
“열양공을 익힌 자와 한 번 겨뤄 보고 싶었는데.”
주작과 한 번 겨뤄 본 만우는 자연의 속성인 화기나 냉기를 이용하는 무공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톡톡히 경험해 보았다. 하지만 주작의 경우야 인간이 아니라 신수(神獸)였으니 제 아무리 현경의 초입인 진인에 도달한 만우라고 해도 상대도 되지 않고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익힌 열양공이라면 과연 어떨까.
“빙후(氷后)와 겨뤘을 때도 진짜 죽을 뻔했는데.”
냉기를 다루는 빙공을 익힌 무인과는 비무를 했던 적이 있었던 만우다. 북해빙궁 궁주의 아내인 빙후와 비무를 했었는데, 그때 자칫 잘못 했으면 크게 내상을 입거나 죽을 뻔했다. 만우의 내공마저 얼려 오는 빙공의 가공할 만한 한기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것이다.
“잘 됐다.”
한때 비무광으로 무림의 명숙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만우의 두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제발 강해라. 제발 강해라.”
삼밭을 태운 정도로는 제 아무리 만우라고 해도 정확한 실력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열양공을 다루는 내공만은 제법이라는 것이다. 만우의 두 눈이 호선을 그리며 이곳저곳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훑었다. *****
“백달원?”
“보부상 큰아비입니다 아씨.”
어리는 오랜만에 광문자가 직접 보고를 위해 찾은 것을 보고는 보고할 내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게 만우와 연관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확실히 아저씨가 직접 와서 말해 주실 만한 내용이네요.”
은월루는 만우와 그의 일행, 그리고 마교의 고수들이 한양 한복판에서 벌인 일로 인해 벌집을 들쑤셔 놓은 것처럼 바빴다. 백주대낮에 저자에서 일어난 이 일련의 흉흉한 사건이 돈이 되는 지재(知才)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은월루는 정보를 사고파는 지재상인이기 때문에 재물의 냄새가 난다는 곳에 귀신처럼 모든 인력을 파견해 아주 작은 증거라도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 남은 흔적은 무공을 익힌 자에게는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상승의 투로가 흔적으로 여기저기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은월루에는 광문자가 있는 덕분에, 그것이 재물이 된다는 것을 단박에 깨닫고는 그 현장에 모든 인력이 투입되어 있는 와중이었다.
“한양에 있다가 이제는 또 개성까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모양이군요.”
어리는 부상청에서 들어온 지재 구매 요청에 만우가 한양이 아니라 개성에 있음을 단박에 눈치챘다. 광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지 루주께서 결정을 하셔야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웬만한 정보와 지재에 관한 건은 아래에서 알아서 해결했다. 은월루에는 어리와 광문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은월루를 한양과 조선 최고의 지재 상인으로 거듭나게 한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리까지 보고가 올라오는 경우는 딱 한 가지뿐이었다. 은월루 내에서도 지재의 분류가 특상급으로 분류되어 있을 경우다. 은월루에서 다루는 정보는 각각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특급, 특상급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다. 그중 특급 이상의 지재는 반드시 어리를 통해서 결정이 나도록 되어 있었다.
“백달원이 왜 그분의 정보를 원하는 거죠?”
“아무래도 보빙사 여의손과 동군영 감찰방 장령 사이의 갈등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음…….”
정보에 밝은 어리답게 근래 조정에서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사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에 그분, 만우가 나섰다면 은월루에서 취할 행동은 단 하나뿐이었다.
“적당히 걸러내서 주세요. 전부 주시지는 마시고.”
“그렇게 하시기로 결심하신 겁니까?”
“만우 대협과 백달원. 아저씨는 누구 선택하시겠어요?”
광문자도 선택지가 별로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달랐다. 사실상 보부상이 전국의 주군에 구축한 임방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막대한 정보량은 은월루에게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온 방대한 정보를 가공하여 돈이 되는 지재로 바꾸는 것이 은월루의 역할이었는데, 만우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은 그런 보부상과 척을 지겠다는 뜻이었다.
“차라리 백달원과 반대편에 서는 게 낫지요. 죽는 것보다는.”
광문자가 어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씨의 말이 맞긴 하지요.”
살행(殺行)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광문자였다. 비록 손을 씻고 그 세계에서 나와 어리와 은월루를 위해 살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광문자도 만우를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1년, 아니 10년을 준다고 해도 만우의 암살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어리의 결정은 죽느냐 사느냐에서 사는 쪽을 택하는 아주 간단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백달원에게 갈 지재의 질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