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큰아비 백달원(4)2021.09.21.
만우의 이룡검이 우웅 하며 소리를 냈다. 만우의 머릿속에 불가사리가 시원하게 울어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꾸어어엉-!!!]
불가사리는 만우가 일본국에서 마교의 절대고수들과 벌였던 피가 튀는 결투에 아직 배가 부른 듯 만우에게 철을 달라고 보채지 않았다. 소서노가 녹색 영체로 쑥 하고 검에서 나와서는 만우 옆에 둥둥 떠올랐다.
[이제는 불에도 검을 휘두르느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니까?”
쑤악!!!! 만우가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거대한 검풍이 몰아쳤다. 본디 바람이란 불을 더 크게 만드는 법이었다. 하지만 만우가 휘두른 검의 바람에는 검압(劍壓)이 실려 있었다. 몸체를 부풀려 나갈 수 있는 공간 자체를 바람이 불을 짓누르면서 없애 버린 것이다. 파악!!! 그렇게 만우가 검을 휘두르자 주변의 불이 퍽 하고 꺼졌다.
“…….”
“…….”
불을 끄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커다란 나무통에 물을 담아오느라 헐떡이던 보부상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만우가 그렇게 몇 군데의 불 자체를 통째로 짓눌러서 없애 버리자 불의 기세가 확 하고 줄어들었다.
[이런 식으로도 검을 휘두를 수 있구나!]
소서노는 눈을 반짝하고 빛냈다. 물론 모두가 만우처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 앞에서 검을 휘두르는 놈은 미친놈이라며 손가락질을 당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허나 만우는 검을 휘둘러 불을 껐다. 아니, 끈 것이 아니라 불을 압살시켜 버린 것이다.
“늦었네.”
하지만 만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설운이 만우에게 부탁한 것은 불길이 삼밭을 모두 태워 버리기 전에 막아 달라는 뜻이었다. 그래야 이곳에서 인삼을 키우고 있었고, 백달원이 그것을 사사로이 거래하여 보빙사 여의손에게 판매하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길은 삼밭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삼밭만 집어삼킨 게 아니라 주변에도 불을 질렀네. 영악한 노인네야.”
불길이 삼밭만 집어삼킨 것도 아니었다. 불길이 삼밭뿐 아니라 주변의 둔덕 전체를 집어삼켰기 때문에 삼밭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그냥 산에 불이 난 듯이 보이게끔 만든 것이다.
“근데 이렇게 빨리 탈 수가 있나?”
본래 불이란 늘 연기와 함께 타오르기 때문에 멀리서도 보이기 마련이다. 설운과 만우는 하늘 위로 타오른 연기를 보자마자 거의 곧바로 말을 버리고 경공으로 내달렸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에 불이 난 것 자체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둔덕 전체에 불이 붙어 타 버렸다는 소리다.
“의심이 가는데.”
만우는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그때 불이 다 꺼진 것을 확인한 방매가 만우에게로 다가왔다.
“이상한 냄새가 나.”
“그렇지? 나도 그래.”
“아니, 진짜 냄새.”
방매가 코를 벌름거렸다.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만우의 코에는 온통 매캐한 냄새 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냄새? 난 안 나는데?”
방매는 코를 벌름거리다가 눈을 번쩍 떴다.
“기름!”
“기름?”
“응. 기름 냄새가 나.”
만우는 신기한 표정으로 콧구멍을 크게 하고 냄새를 맡아 봤다. 하지만 만우에게는 아무리 맡아도 기름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난 안 나는데.”
“기름이야. 내 코를 무시하지 말라고. 매분구라는 게 그냥 하는 게 아니거든!”
방매가 턱을 빼들고는 허리춤에 손을 척 하고 얹었다. 만우는 그런 방매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하지만 방매의 말이 맞다면, 이렇게 빨리 불이 둔덕 전체로 번진 것이 말이 됐다.
“기름이라. 그 귀한 걸 막 쓴다고?”
“서북면이랑 동북면에서 한양으로 보내는 물건들이 이곳에서 모인다고 장터 아재들에게 들었어. 고래 등 기와집만 한 창고가 몇 개나 있다고 했으니까.”
“흠…….”
조선 북부의 물류가 발가산에 모였다가, 이곳에서 다시 분배되어 조산 남부로 내려가는 구조라면 기름을 구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의 우두머리인 백달원이 쓰겠다고 하는데 누가 내어 주지 않겠는가. 적어도 이곳 발가산과 보부상들이 있는 곳에서는 백달원의 말이 왕의 말보다 더 크게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양공(陽功)을 익힌 놈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만우가 기감으로 이곳을 쫙 훑어봤지만 무공을 익힌 무인의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냥 기름만으로 이렇게 큰 불이 금방 났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양공을 익힌 무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일반 심공을 익힌 무림인들과는 달리 양공과 음공(陰功), 빙공(氷功) 등을 익힌 무림인들은 손에서 불을 뿜고 한기를 뿜어내는 것이 가능한 이들이었다. 허나 그 수가 많지 않았다.
‘혹시나.’
혹시 조선에도 그런 이들이 있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의심을 한 만우지만 아무것도 기감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데.’
만우는 일단 설운에게 결과를 말해 주고 백달원이란 노인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발걸음을 설운 쪽으로 옮겼다. 번쩍!
[꾸엉?]
순간 무언가를 느낀 이룡검의 검신, 불가사리가 울음소리를 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
“아이고. 혹시 한양에서 오신다는 설운 나리 되십니까?”
허름한 지팡이를 짚고 남루한 무명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노인, 백달원이 설운을 보고는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설운은 그런 백달원을 보고 멈칫했다. 상왕을 도와 오도도반수라는 그럴듯한 직함까지 얻었고 조선 팔도 보부상들의 우두머리라는 그가 이렇게 쉽게 무릎을 꿇을 줄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경험이 일천한 설운은 그런 백달원을 보면서 처음부터 말렸다.
“맞네.”
“죄송합니다요. 진작에 나가서 직접 뫼셔야 하는데 갑자기 이렇게 큰 불이 난 터라…….”
백달원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촌부 같은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그 태도가 딱 양반을 무서워하는 전형적인 촌로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설운은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예상한 백달원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에 고개를 숙인 백달원은 속으로 조소했다. 천한 출신이라고 하지만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가지각색의 사람을 만나 봤던 백달원이다. 그런 백달원에게 저런 어린놈을 다루는 것 하나쯤이야 어려울 일이 하나도 없었다. 화르륵!
“어이쿠!!!!”
그렇게 고개를 조아린 백달원에게 옆에서 타오르던 불똥이 탁 하고 튕겼다. 그러자 놀란 백달원이 뒤로 벌러덩하고 자빠졌다. 설운은 그런 백달원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도저히 앞의 인물이 그 백달원이라는 것을 연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법으로 금한 인삼을 은밀하게 재배하여 보빙사 여의손을 비롯한 한양의 조정 대신들에게 손을 뻗치고 있다는 보부상들의 큰아비. 그러면 조금 더 무언가 있어 보이고, 무게도 있고 그런 이가 백달원일 것이라 생각한 설운인데 그게 아니었다.
‘뭘 잘못 안 건가?’
종내에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설운이었다. 그러자 설운은 이 촌로를 추궁해도 나올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이르렀다.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냥 무지렁이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휴우.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나리. 너무 놀라서…… 으윽!”
백달원이 몸을 일으키다가 허리를 움켜쥐었다. 노구에 그렇게 놀라 넘어졌으니 어디 상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추궁할 의지를 쭉 빼놓는 백달원의 모습에 딱딱하게 굳었던 설운의 어깨가 풀렸다. 긴장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본 백달원이 보부상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는 설운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 부상청에 누추하지만 모실 준비를 해 놨으니 그 쪽으로 안내를…….”
“몸이나 추스르시게. 무리하지 않아도 되니. 길 안내를 할 보부상 하나만 붙여 주시고.”
설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노구의 백달원에게 무언가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 많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기가 공교롭기는 하나.’
백달원이 설운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큰 소리로 보부상 하나를 불렀다.
“예, 큰아비.”
“귀하신 분이니 각별히 신경을 써셔 모셔라. 부상청으로 어서!”
“예. 큰아비. 나리. 저를 따라오시지요.”
설운은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백달원을 보면서 눈가를 한 번 찌푸리고는 보부상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설운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백달원의 눈빛이 삽시간에 뒤바뀌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려보는 듯한 맹수의 눈빛으로 바뀐 것이다.
“대충 속여 넘긴 것 같긴 한데.”
백달원의 연기는 가히 일품이었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촌로의 연기를 거의 완벽하게 해낸 것이다. 백달원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방심은 하면 안 된다. 아주 맹탕은 아니야. 어려 보이는 자이길래 쉽사리 속여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백달원은 자신의 연기를 본 설운이 실망하는 기색을 눈치챘다. 설운의 눈은 흔히 젊은 관리들에게서 볼 수 있는 눈이었다. 내려진 임무를 반드시 완수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공을 세우겠다는 그런 젊은 관리의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운은 혈기왕성하고 성급한 젊은 관리들과는 달리 침착하고 차분했다. 백달원은 나이에 맞지 않는 그 침착함과 차분함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의 연기가 설운에게 완벽하게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뭐 하나만 묻겠습니다요.”
그런데 바로 그때 백달원의 표정이 싸악 하고 뒤바뀌었다. 누군가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 했는데, 낯선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온 저 젊은 관리와 동행한 남녀.’
입은 의복을 딱 보아하니 역졸과 다모쯤 되어 보이는 듯했다. 설운을 보좌하는 이들이란 것을 한눈에 알아본 백달원은 짐짓 모른 척을 했다.
“자네들은 누구인가?”
“백달원 어르신 되시죠?”
백달원이 물었지만 만우는 못 들은 척 되물었다. 백달원은 젊은 관리 앞에서는 굽실대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꼬장꼬장한 촌로 연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눈살을 좁혔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네놈들은 누구냐고 물었다!”
백달원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금방 버럭 하자 만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맞는 모양이네. 성격이 더러워.”
“뭐, 뭐라?”
백달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 백달원이 주변에 눈짓을 하자 주변의 보부상들이 만우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런 고얀 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처음 보는 놈들인데, 한양에서 온 촌놈들이냐?”
보부상들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만우와 방매를 둘러쌓았다. 만우는 그런 보부상들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이고. 난 모르겠다. 가서 설운 나리한테 밭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는 거나 알려드려야겠다.”
“왜 네가 찾아낸 척을 해? 나 아니면 몰랐잖아!”
보부상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포위를 했음에도 만우와 방매는 태연했다. 그 전에 백달원이 만우가 한 소리를 듣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기름? 그게 무슨 소리냐?”
“에이. 왜 모른 척을 하실까, 어르신이.”
만우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빙긋 웃는 얼굴로 백달원을 힐끗 쳐다보고는 둘러싼 보부상들의 어깨를 툭툭 밀쳤다.
“아욱!”
“억?”
가볍게 민 것 같았는데 만우가 슬쩍 슬쩍 손을 댄 보부상들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리고는 그 틈으로 유유히 걸어 나온 만우는 방매와 함께 사라졌다. 다 알았다는 듯한 미묘한 미소만을 흘린 채 설운이 사라진 쪽으로 뒤쫓아 사라진 것이다. 백달원이 그런 만우를 보면서 인상을 썼다.
“저놈은 뭐지?”
백달원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땡땡거리면서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백달원의 감은 귀신처럼 설운보다 만우가 훨씬 더 무서운 놈이라고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큰아비. 큰아비!!!”
그때 둔덕 아래에 있던 보부상들이 헐떡이면서 올라왔다. 그리고는 백달원에게 자신이 본 것을 헉헉대면서 말했다. 한 자루의 검으로 둔덕 전체에 일어났던 불을 퍽퍽 꺼뜨린 만우의 활약을 자신이 본대로 이야기했다.
“역졸 차림을 한 검의 고수라.”
검을 휘둘러 불을 끈다는 것은 상상해 보지도 못한 백달원이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보부상을 통해 모여든 소문 중에는 그런 것들이 가끔 있기는 했다. 곡산척가 무인들의 이야기나, 상왕의 가병인 가별초의 이야기들. 특히 상왕은 한 대의 화살로 용을 잡았다는 소리도 있었다. 설운을 따라 온 역졸이 검의 고수라 불을 검으로 껐다면 그 이야기도 전혀 허황된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큰아비. 그것보다 기름 냄새를 맡았다는 말이 그 젊은 수사관의 귀에 들어가면 더 큰일이 아닙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야.”
백달원은 시선을 돌려 만우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봤다. 수십 년을 보부상으로 살아오면서 극도로 감이 발달된 백달원의 육감이 계속해서 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연회를 크게 열고, 찔러줄 것들을 준비해. 회유할 수 있으면 뇌물로 회유를 해야 하니. 그리고…….”
백달원은 결심을 한 듯 칼처럼 날카로운 안광을 두 눈에서 뿜어냈다.
“상왕 전하와 한양의 조준 대감께 서신을 보내. 살 길을 만들어 둬야 하니.”
“예, 큰아비.”
보부상들은 백달원의 긴장한 눈빛을 보고는 바짝 군기가 들어서 일사불란하게 대답했다.
“주상전하께서 아끼신다는 그 젊은 선비에 대해서도 모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모아. 저 정도의 검객을 수사관의 수행원으로 삼아 보내실 정도라면…….”
저 정도 검의 고수라면 겸사복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임금이 겸사복을 보냈다면 이번 사건의 결과는 어찌 보면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놈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그놈.”
만우라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변수의 등장에 백달원의 눈빛이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