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큰아비 백달원(3)2021.09.18.
“그러면 독한 놈들이지요. 머리도 비상한 놈들이고.”
만우는 설운에게 말했다. 적어도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는데 있어서만큼은 하오문보다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놈들이 없었다. 그들은 별 볼일 없는 무력을 가지고도 수백 년 동안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부상들도 하오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그럴 것이다.
“아마 지금쯤 나리가 오는 것까지 알고 있을 겝니다.”
“보부상들의 정보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소리십니까?”
설운의 말에 만우는 피식 웃었다.
“설운 나리는 무과에 급제하여 궐에 계셨으니 모르시겠지요. 하지만…… 이놈은 조선에 들어온 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았지만 알겠던데요.”
“무슨.”
“보부상들이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지.”
설운은 만우의 말에 답할 말이 없었다. 만우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보부상들이 조선에 얼마나 많은지 이전까지는 알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설운은 무예를 익혀 무제에 급제해 세자저하만 지키면 됐었기 때문이다.
“이미 발가산으로 가면서 본 보부상들만 해도 수십이 넘습니다. 그러니 나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지요.”
보부상들은 두 발로 한 지역의 물건을 다른 지역으로 나르는 일을 한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정보는 첫 번째 보물이었다.
“그러면 저 불은…….”
“간단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이번 일, 똥구녕 나리를 구하려면 우리가 저기 백달원이라는 늙은이에게 들어야 할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보빙사 여의손에게 삼을 팔았다…….”
설운의 눈이 커졌다. 방매가 옆에서 손바닥을 짝 하고 쳤다.
“맞다! 인삼(人蔘)을 사사로이 거래하면 판 사람도 산 사람도 끌려간다고 하던데.”
조선에서는 분명 사사로이 다른 나라의 물건을 들여와 팔거나, 조선의 물건을 다른 나라에 가서 파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신단만 어디서 나간다고 하면 그들에게 몰래 물건을 대려는 사람들이 문 밖에 줄을 서는 것이다. 그중 가장 이문을 남기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삼이다. 그렇기에 조정에서는 삼을 사사로이 기르는 것도, 거래하는 것도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를 엄격하게 처벌했다.
“국왕도 걱정하는 조준 대감과 막역한 관계라는 여의손의 치부를 제 입으로 인정하는 것도 모자라 삼을 사사로이 재배하고 내다 팔았다는 것까지 백달원이란 늙은이가 토설을 해야 한다?”
만우는 픽 하고 웃었다. 이건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와도 간단한 선택지였다.
“당연히 삼을 팔지 않았다고 시치미를 떼지 않겠습니까, 나리?”
“……그럼 저것도.”
“삼밭을 불태우는 것이겠지요.”
“이런!!!”
휙!!! 설운이 말 등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손에 내공을 일으켜 수레와 연결된 끈을 끊어냈다.
“먼저 가겠습니다. 이랴!!!!!”
“음. 한 발 늦은 것 같기는 한데.”
끼익! 쿵! 앞에서 균형을 잡아 주던 말이 사라지자 수레가 뒤로 기울었다. 그 바람에 방매가 허공에 팔을 허우적거렸다.
“꺄악!”
만우가 그런 방매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볼을 긁적인 만우가 몸을 일으켜서는 수레의 끝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사뿐. 두두두두!!
“같이 가시지요. 백달원이란 늙은이의 면상을 보려면 설운 나리랑 같이 있는 것이 편할 것 같아서요.”
설운이 놀란 눈으로 뒤를 쳐다봤다. 말 엉덩이 위에 방매를 안은 만우가 사뿐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말 엉덩이가 미친 듯이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만우는 평지에 서 있는 것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설운은 고개를 돌렸다. 만우의 끝을 알 수 없는 무위에 놀랐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더 이상 크게 놀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랴!!!!!”
설운이 탄 말이 엉덩이에 만우가 꼿꼿하게 선 채로 발가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향해 질주했다. ***** 화르르륵!!!! 발가산의 둔덕에 불길이 맹렬하게 일어났다. 그 때문에 그곳에서는 한창 난리가 난 상태였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날뛰면서 물을 나르려 했지만, 도구가 딱히 없이 발만 동동 구르며 불길이 타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증좌. 증좌를 남겨야 한다!’
설운은 그 모습을 멀리서부터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주상전하가 고작해야 계방의 좌익찬인 설운에게 내린 어명이었다. 그러니 어명을 반드시 성공적으로 완수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설운은 평소에 잘 쓰지 않던 머리를 박박 긁어서는 울렸다.
‘저 자는.’
그때 설운의 눈에 다른 보부상의 부축을 받으며 헐레벌떡 삼밭으로 달려오고 있는 백달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흔히 볼 수 있는 노인처럼 생겼지만, 백달원은 보부상들을 한 손에 쥔 권력가다. 문반이나 무반은 아니어도, 상왕의 구명은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막대한 이득을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라 출발할 때부터 생각한 설운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 보빙사 여의손이 백달원에게 직접 삼을 은밀히 구입한 것이라면, 백달원이 한양의 조정 대신들에게 어디까지 손이 뻗쳐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검주 대협.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이고, 말만 하십쇼, 나리.”
만우는 묘기를 부리는 것처럼 말의 엉덩이 위에 서 있었다. 만우는 바로 눈앞에서 삼밭이 불타오르는데도 별반 다급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동군영을 꽤나 아끼던 모습과 비교하면 의외의 모습이기는 했다.
“불. 불을 꺼 주십시오.”
“저 불 말씀이십니까?”
만우가 턱짓으로 산의 둔덕을 가득 메운 불길을 가리켰다. 설운은 말을 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완전히 꺼 달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불길이 더 번지는 것만 막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삼밭이 있다는 증좌가 되니까!”
“알겠습니다!”
방매가 만우에게 빼액 하고 소리를 지르자 만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닷!!! 휙!! 말 엉덩이를 발가락 끝만으로 가볍게 박찬 만우의 몸이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렸다. 방매를 품에 안고서도 초절정의 경신법으로 몸을 띄운 것이다.
‘백달원.’
지팡이에 의지한 채 난리가 났다는 표정으로 보부상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 백달원의 얼굴이 설운의 눈에 가득 담겼다.
‘국법과 주상전하를 우롱한 것이라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두두두두!! *****
“으아아아!!”
“발버둥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만우의 신형이 허공에서 한 차례 휘청거렸다. 갑자기 만우가 공중으로 붕 하고 떠오르자 놀란 방매가 자신도 모르게 발버둥을 쳤기 때문이다. 웬만한 경신법의 고수가 아니라면 사람을 품에 안은 채로 그처럼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우는 진인(眞人)에 올라 현경의 초입에 다다른 경지로 거의 어거지로 내공을 대량으로 쏟아 부어 몸을 가볍게 만든 것이었다. 아쉽게도 기천에는 보법 이외에는 딱히 경공이나 경신법이라 불릴 만한 공부가 없었기 때문에 만우가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도 바로 그 부분들이었다.
“이, 이렇게?”
“어. 꼼지락거리지 말고! 떨어질 뻔 했잖아!”
방매는 만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아래에서 불길이 이글거리며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붙어 있자 금세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내 볼인가?’
방매는 그 열기가 자신의 얼굴에서 나는 것만 같았다. 다 커서는 남정네의 품에 안겨 있다니. 그렇게 남사스러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매를 부끄럽게 한 만우는 오히려 야속하게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으니, 방매는 괜히 심술이 났다.
‘많이 안아 봤다는 거지?’
그래도 자신도 여인인데, 그런 자신을 품에 안고도 만우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척 무사님이나 옥령 언니에 비하면…….’
주변에 비교할 만한 여자들이 그 둘 밖에 없었다. 김향은 너무 어렸고, 호선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이 방매에게는 최악이었다. 그 비교 대상이란 것이 중원과 조선을 통틀어 견줄 만한 이가 몇 없었기 때문이다.
‘하오문의 그 여자도 있었지.’
거기에 임수미까지. 임수미와 옥령은 사람이 그렇게 많고 넓다는 중원무림에서도 별호에 화(花)가 들어갈 만큼, 아름답기로는 손에 꼽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척사영은 곡산척가의 일원으로 배경부터 시작해 특히 무공이 만우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여인이었다.
‘후. 비교가 안 되네 비교가.’
그 여인들과 비교를 하면 당연히 패배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방매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 있어. 괜히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데이지 말고.”
치솟아 오르는 불길을 훌쩍 뛰어넘어 착지한 만우가 품 안에 안겨 있던 방매를 안전한 곳에 내려놓았다. 방매의 얼굴이 시무룩했지만 그 이유를 알기에는 만우란 남자가 너무 무던했다. 무공에 있어서는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미숙하기만 한 만우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면서 살아가야 할 시기에 명나라를 유배되어 떠돌아다니고 무공을 익힌 다음에 홀로, 혹은 따르는 몇몇과만 중원을 유랑했기 때문이었다.
“저…… 있잖아.”
“응?”
방매가 그런 만우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앞에서는 불길이 일렁거리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방매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밭도 아니고. 보부상들이 급해 보이는 표정으로 여기저기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만 그것보다 방매에게는 이 질문이 훨씬 더 중요했다.
“척 무사님이나 옥령 언니, 아니면 그 하오문의 임수미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뭐?”
만우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뜬금없었기 때문이다. 화르륵!!!! 방매도 이런 질문을 물어보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하지만 앞에서 불길이 하도 일렁이는 덕분에 발개진 얼굴을 감출 수 있어 그냥 눈을 딱 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응? 무슨 생각이 드냔 말이야.”
“걔네들?”
만우는 볼을 긁적였다.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지금 대답하는 것이 무언가 중요할 것 같다는 예감은 들었다. 왜인지 도저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냥 사람이지 사람. 나랑 별 관계없는 사람.”
“진짜?”
방매가 눈을 크게 떴다. 만우는 방매의 표정이 밝아지자 자신이 대답을 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답을 잘하면 뭐가?’
방매에게 대답을 잘하면 뭐가 달라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어쨌든 된 것이다.
“됐지?”
“응, 됐어.”
짤막한 대답이었고 부가적인 설명도 없었지만 방매는 만족하기로 했다. 그냥 사람이라고 대답하는 만우가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히히.”
방매가 거대한 불길을 향해 홀로 뛰어드는 만우의 모습을 보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수줍게 웃어 보였다.
“난?”
방매가 만우의 등에다 대고 작은 소리로 수줍게 내뱉은 한 마디가 탁탁거리며 튀어 오른 불꽃과 함께 허공으로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