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큰아비 백달원(2)2021.09.14.
‘이젠 모르겠다.’
그러는 옹주인 방매도 설운을 좌익찬 나리라 불렀다. 때문에 설운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 부르는 호칭이 뭐가 대수라고.’
부르는 호칭이 뭐가 대수겠는가. 호칭만 그렇지, 지금도 보면 말을 끄는 것은 설운이었다. 방매와 만우는 수레 위에서 뒹굴뒹굴하면서 놀고 있었으니 말이다.
‘말이라도 그렇게 들으면 다행이지.’
문득 이 둘과 함께 1년도 넘게 돌아다닌 동군영의 노고가 어땠을지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는 설운이었다.
“그런데 만우.”
“왜.”
만우는 고개를 수레 벽 쪽으로 돌린 채로 대답했다. 목소리가 울려서 나왔지만 방매는 턱에 손을 괴고는 만우에게 물었다.
“그 마교 아저씨들은 어떻게 된대?”
“마교 애들?”
만우는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나도. 내가 걔네 신경 쓸 때냐. 똥구녕 나리만으로도 머리 복잡해.”
“그래도! 몇 달을 같이 했는데.”
옥령에 의해 죽을 뻔 했으면서도 방매는 옥령을 비롯한 마교의 고수들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만우는 혀를 쯧 하고 차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알아서 탈옥을 하든지 하겠지. 그냥 옥사에 갇혀서 가만히 죽을 놈들이냐?”
“죽을 놈들? 극형에 처할 수도 있는 거야?”
방매가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코웃음을 쳤다.
“당연한 거 아니야? 죽은 군사들이 몇 명인데. 그것도 한양 한복판에서.”
“도망치면 더 큰일 나는 건 아니야?”
“큰일 나겠지. 근데 그건 국왕이 알아서 할 일이고오오-!!”
만우는 다시 벌러덩 드러누웠다. 흔들리는 수레 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었다. 만우는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개성삼이니까 개성에서 팔았겠지. 옮겨 준 놈들이 있을 테지.”
만우는 보부상들을 떠올렸다. 동래에서도 한양에 올릴 뇌물을 지고 움직이던 놈들이었다. 그러니 여의손도 분명 개성삼을 개성에서 구입해서 보부상을 통해 옮겼을 것이다. 그게 가장 눈에 띄지 않고 안전하게 옮길 수 있는 방법이었을 테니 말이다.
“아, 언제 도착하는 거야 대체!!!!”
저 멀리 부상청과 보부상의 총본산인 발가산이 흐릿하게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
“정말입니다. 정말이에요.”
삼복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코에서도 누런 액체가 주욱 하고 더럽게 늘어졌지만, 삼복은 그것을 닦아 낼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군께서 조선의 군사들에게 붙잡혀 끌려가시었다?”
“그렇습니다요. 예. 그렇고 말구요.”
삼복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삼복의 주변으로는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인 하오문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숨이 붙어 있는 이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 마일의 잔혹한 손속에 죽은 것이다. 그런 삼복의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마일에게 함부로 덤빈 대가였다. 마일이 투귀대의 참모 역할을 한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실력이 없다면 투귀대의 일원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마가(魔家)의 일원들이 대대로 천마신교의 군사 역할을 해 왔기에 그들의 무공보다는 머리가 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지만, 천마신교에서는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무공이 없다면 인정받을 수 없었다. 천무적인 무(武)의 재능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뛰어난 머리로 무공을 익혔다. 그래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경지는 고작 절정이 끝이지만, 그 정도만 돼도 제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다. 그렇기에 마일은 투귀대 안에서 최약체지만, 반면 겨우 삼복이 최고수인 하오문에서 마일을 막을 수 있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네놈이 동원할 수 있는 하오문도의 수는?”
마일은 감정이 섞이지 않는 눈으로 삼복을 쳐다봤다. 삼복은 눈물이 가득 고여 온 세상이 일그러져 보이는 와중에도 머리를 굴렸다. 생존본능.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삼복이었다.
“이, 이백이 최대입니다.”
“고작?”
중원의 하오문을 떠올린 마일의 손에서 마기가 일렁였다. 물론 내공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삼복에게는 마일의 손 위로 아지랑이 같은 것이 보인다고만 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저 아지랑이에 모두가 죽었다. 그것도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고, 관절이 틀어지면서 뼈가 부서져서는 끔찍한 고통 속에 죽었다. 분근착골. 마일이 삼복의 입에서 진실을 얻어 내기 위해 수십의 하오문도들을 죽인 수법이었다. 무림에서 금기시 된 고문 방법이지만 주군의 행방을 찾아야 하는 마일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마일은 그의 주군이자 천마신교의 교주인 주창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의 별호처럼 하늘(天)도 부숴 버릴(破) 생각이었으니까.
“저, 정말입니다. 주, 중원에서 오신 분 같은데…….”
마일이 삼복을 살려 둔 이유는 간단했다. 마일은 조선말을 하지 못했다. 반면 삼복은 중원의 하오문과 연락을 주고받고, 중원에서 사람이 오면 대접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한어(漢語)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중원의 하오문과는 달리 조선의 하오문은 아직 뿌리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수가 현저하게 적고 또 은월루라는 놈들이…….”
“은월루?”
마일의 눈이 빛났다. 그 순간 삼복의 머릿속이 팽팽거리며 돌아갔다.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섬전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은월루 놈들에게로 이 괴물을 안내할 수 있으면.’
마일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삼복은 마일이 두려웠다. 지금까지 삼복이 만나 온 이들은 적어도 사람의 목숨을 거둘 때 한 번 정도 생각은 했다. 하지만 주군의 구출이라는 목표만을 가진 마일은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사람의 목숨을 거둘 때도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그냥 인형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이 괴물을, 은월루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면?
‘구호탄랑(驅虎呑狼)!’
조조의 책사 순욱이 유비와 원술로 하여금 서로 상잔하게 하여 세력을 약화시킨 계책을 말한다. 삼국지를 아는 삼복은 그 와중에도 마일을 몰아 눈엣가시인 은월루를 쳐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으, 은으로 만든 초승달을 새기고 다니는 놈들입니다. 저, 저희 하오문은 그놈들에게 밀려서 수가 적습니다요. 흐흑…….”
삼복은 마일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빌었다. 제발 마일이 하오문이 아니라 은월루로 가 주기를 바란 것이다.
“은으로 만든 초승달이라.”
마일의 눈이 심유하게 빛났다. 교에서 내린 명령에 따라 검주의 약점을 잡기 위해 한양을 돌아 봤던 투귀대였다. 안 그래도 그때 그런 놈들을 보기는 했었다.
“안내해라.”
“예. 옛?”
삼복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마일의 눈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은월루란 놈들이 있는 곳으로. 놈들을 이용하여 전옥서에 있는 주군을 탈출시킬 것이다. 그러니…….”
부르르!!! 마일의 손에서 일어난 마기가 삼복을 짓눌렀다. 삼복은 자신의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X됐다!’
마일을 은월루에게 떠넘겨 자신은 횡액을 피해 가려고 했었던 삼복이다. 그런데 자신이 앞장서서 제일 먼저 은월루 놈들에게 죽게 생겼다.
“안내해라!!!!”
마일은 자신이 삼복의 다리를 이상한 각도로 돌렸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주군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삼복이 다리 때문에 움직이지 못해도 그 쓸모없는 다리 따위는 얼마든지 잘라 줄 의향이 있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주창이지, 삼복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 알겠습니다요.”
그런 기세를 마일의 눈에서 읽어 낸 삼복은 입을 꾹 다물었다. 변명 따위가 통하지 않는 상대란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삼복은 돌아간 다리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이판사판이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다!’
그럼에도 삼복은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떻게든 살아날 길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난 산다! 살 거라고!!!!’
삼복의 소리 없는 절규가 울려 퍼졌다. *****
“설운?”
“예 큰아비.”
“개성을 통과했으니 발가산에 나타나겠구나.”
“오가는 보부상들이 봤다고 합니다요. 수레를 끌고 오고 있다고요.”
백달원의 주도 하에 열린 회의에서 많은 이야기들과 정보들이 오고갔다. 보부상의 눈과 귀가 있는 곳이면 그 정보가 부상청 총본산이 있는 발가산으로 전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작에 만우 일행의 소재는 백달원에게로 도착했다. 백달원은 그 짧은 시간에 설운까지 알아낸 것이다.
“은월루에게 정보 값은 넉넉히 지불해.”
“예. 큰아비.”
백달원은 은월루와도 친밀한 관계였다. 보부상들이 조선 전체에 깔려 있다고는 하지만 조정 대신이나 관리에 대해서 알아내기 위해서는 고급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4품 장령 나부랭이라고 생각했는데, 좌익찬이 직접 올 정도로 그 동군영이란 선비를 주상전하께서 중히 여기시는 줄은 몰랐구먼.”
백달원은 입맛을 다셨다. 동군영이란 존재에 대해서 이제 알았다는 것에 입맛이 썼기 때문이다. 진작에 알고 있었더라면 여의손에게 개성삼을 팔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하면 좋을까…….”
백달원은 손가락을 딱딱 하고 튕기며 고민했다. 설운이 수사관으로 부상청에 오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보빙사 여의손의 개성삼을 실제로 밀수를 하려고 하였는지, 아닌지.’
그래서 여의손이냐 동군영이냐,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이냐를 가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조준 대감이냐, 주상전하냐, 선택을 해야 하는 거겠군.”
백달원은 주름진 얼굴로 고민했다. 어느 한 쪽을 함부로 선택한다고 그렇게 가벼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빙사 여의손에게 팔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주상전하께서 아끼시는 신하를 공격하는 셈이 되고.”
딱딱.
“보빙사 여의손에게 팔았다는 것을 증명하면 조준 대감을 비롯한 사대부들과 척을 지게 되는 것인가. 더불어…….”
부상청이 보부상들도 나라에서 사사로이 거래를 금지한 삼(蔘)을 재배하여 사익을 취하려 했다는 사실 때문에 분명히 문제가 될 것이다. 백달원이 여러 가지 특혜를 받아 일개 보부상으로 지금 그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상왕 때문이었지 지금의 주상 때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정해져 있군.”
백달원은 쓰게 웃었다. 주상전하의 편을 들면 조준 대감을 비롯한 사대부들과 척을 지게 되는 것은 물론, 사사로이 사익을 취하려 했다는 혐의까지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상청은 끝장이다.
“삼밭에 불을 질러라. 거래장부도 모두 불태우도록 하고.”
“크, 큰아비! 그것들을 모두 불태우면…….”
“대감들의 약점 역시 사라지겠지. 허나.”
보부상들은 조선에서도 가장 낮은 계층에 속했다. 그런 보부상들이 조선 전역의 주군(州郡)에 임방을 세우고 보부상들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 건국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여전히 보부상들의 처우는 열악했기에, 백달원은 보부상들의 큰아비로서 힘을 기르고자 했다. 정보, 삼(蔘) 그리고 조선 대신들의 인망(人網). 중앙에서 도태되거나 외면 받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 세 가지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기에 쥐려고 했다. 헌데 그것을 지키려다가 주상의 진노를 받아야 될 수도 있으니 아예 뿌리부터 그 흔적들을 지워 버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우리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뿌리가 약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아깝더라도 버릴 수 있는 용단을 내려야 하는 법이다. 큰아비인 백달원의 과감한 결정에 보부상들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요!”
*****
“어? 불이다!”
개성의 발가산은 보부상들의 총본산인 부상청이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발가산 주변으로 보부상들의 고을이 만들어져 있는 셈이었다. 상왕은 백달원에게 직접 옥도장을 내리고, 부상청의 현판을 내려 백달원을 치하했다. 보부상들이 모여서 만든 고을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을 때, 방매가 손을 들어 가리켰다.
“불?”
갑자기 고개를 치켜든 말을 진정시키느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던 설운이 놀라서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발가산 둔덕 너머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불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 거리에서 보일 정도의 연기라면 꽤 큰 불일 것이다.
“웬 불?”
수레 뒤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던 만우도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설운의 표정이 싹 바뀌어서는 만우에게 말했다.
“검주 대협. 아무래도 보부상들이 수상합니다.”
“보부상이란 놈들이 하오문과 비슷했다고 했으면.”
만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우에게 보부상들은 하오문과 비슷한 성질을 띠고 있었다. 먼저 사회의 최하층의 구성원들이 소속이라는 점이었다. 좀도둑, 기생, 기둥서방, 백정 등 외면 받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로 이뤄진 하오문과 직접 짐을 들쳐 메고 어디에 정착하지 못하고 전국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보부상들은 여러 면에서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