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 조천사(朝天使)(3)2021.08.31.
“만우랑 다른 사람들은요?”
“전부 함께 모시라는 주상전하의 명이 있었나이다. 밖에 내금위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그럼…… 궁으로 가나요?”
“예. 옹주마마.”
궁으로 간다는 소리에 방매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궁이란 곳이 불편하기만 하지,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는 것을 저번에 한 번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설운은 그런 방매에게 말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들어갈 생각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주부.”
설운의 눈이 다시 매서워졌다. 그의 눈이 주부에게로 향했다. 수양딸이라고는 하나 주상전하의 여동생이다. 그 여동생이 옥사에서 천것들과 드잡이질을 하고, 나장은 때리기까지 했으니 그들을 관리하는 주부의 책임을 따지자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새어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오. 오늘 이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 내 귀에 들린다면…….”
초절정의 초입에 들었던 설운은 전쟁을 겪고 스스로를 수련하면서 어느새 초절정의 경지에 익숙해졌다. 그런 초절정의 기세가 주부에게 쏟아졌으니, 주부는 다리가 달달 떨리면서 이마를 바닥에 쿵 하고 찧었다.
“그,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믿어 주시옵소서.”
“내 믿겠소이다.”
설운이 방매를 극진히 모시는 자세로 뒤를 따라 나갔다. 방매가 나가고 난 옥사 안에서 멍한 표정의 매분구들과 기절한 큰 언니들 위로 서늘한 바람이 내려앉았다가 사라졌다. ***** 주창을 비롯한 옥령과 마교의 투귀대는 전옥사에 그대로 남았다. 임금이 명한 것은 만우와 만우 일행만을 전옥사에서 빼내 궁으로 데려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감찰 나리는?”
만우가 설운에게 물었다. 설운을 비롯한 내금위 군사들은 만우와 만우 일행을 궐로 안내했다. 최대한 은밀하게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빠른 지름길이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앞뒤 설명은?”
“해 드리려고 했는데 이 사달이 나는 바람에. 명에서도 친서를 보낸 터라 전하께서도 공무가 바쁘셨고 말입니다.”
“아주 난리가 났겠구먼. 난리가.”
만우의 그 말대로, 궐 안에서 다시 만난 동군영은 만우와 다른 이들을 보면서 호들갑을 떨어 댔다.
“자네들은 어찌하여 입궐한 겐가?”
“국왕이 불렀으니까 왔지.”
만우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궐 안에서 태연하게 대답하는 만우의 표정에는 주변 사람들의 기분 따위는 손톱만큼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만우의 오만함 때문에 내금위 군사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는 것을 만우도 아는 것이다.
“그만. 해산!”
설운은 그러다가 한 번 더 난리가 날 것 같아 얼른 내금위 군사들을 해산시켰다. 만약 내금위 군사들에 의해 난리가 나면 그때는 궐 안에서 난리가 나는 셈이었기 때문에 어서 떨어뜨려 놓는 것이 상책이었다.
“역시. 내 손녀 사윗감다워. 암.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척일이 그런 만우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척사영이 그런 척일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만 좀 하라는 얼굴이었지만, 척일은 곡산척가에서도 유명한 사고뭉치였다. 사고뭉치의 성질이 나이가 든다고 해서 쉬이 고쳐질 리 없다. 하지만 방매가 그런 척일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 문제다.
“뭐예요?”
방매는 산발이 된 머리에 여기저기 할퀸 자국이 성성한 얼굴로 척일을 보면서 도끼눈을 떴다. 그런 방매의 박력이 대단했기 때문에 그 척일이 움찔했다.
“이 여아는 또 누구인고?”
“대종사. 옹주마마십니다.”
“아! 상왕전하가 새로 들였다는 그 수양딸?”
옹주라고 하기에는 행색이 남루했고 여기저기 다친 흔적까지 있었지만 척일은 방매를 기억해 냈다. 이상한 귀신이 빙의한 아리따우면서도 괴물 같은 처자가 마지막까지 뒤쫓던 여인이 바로 방매란 것을 목격했었기 때문이다.
“누가 사윗감이라는 거예요?”
곡산척가의 대종사면 임금도 존대를 한다. 제대로 정립된 무예의 맥이 고려 말기를 거치며 거의 끊어진 조선이었기 때문에 곡산척가가 그만큼 중요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곡산척가는 무예 실력이 출중한 장수 재목이 여럿 있는 아주 중요한 세가 중 하나다. 그런 곡산척가의 대종사에게 방매가 도끼눈을 뜨고 있는 셈이었지만, 척일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래. 우리 손녀 사윗감이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옹주마마라. 허허헛.”
척일은 만우에 대한 모든 것이 좋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옹주가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도 철없는 얼굴로 저 정도 경쟁자는 있어야 한다면서 좋아했으니 말이다.
“약조를 한 사람이란 게 옹주마마더냐?”
“…….”
궐 안에서 때 아닌 촌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감령이 눈치 없이 만우에게 은근슬쩍 말을 하려다가 옆구리를 얻어맞고는 바닥을 굴렀다.
“헙.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대장님.”
“꺼으으으으…….”
감령이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바닥을 굴렀다. 한 대만 맞았는데 잔뜩 마신 술이 다 깨는 느낌이었다. 진작에 운기로 술기운을 다 날려 보내긴 했지만 말이다.
“한 마디만 해 봐.”
만우는 아예 그쪽에서 오가는 소리를 듣지 않기로 했다. 척일이 대체 뭘 믿고 척사영을 밀어붙이는지 모르지만,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고의적으로 신경을 끈 만우는 동군영에게 말했다.
“그래. 국왕이 왜 우리까지 부른 것 같아?”
동군영은 유일하게 일행 중에서 이쪽으로 머리를 쓸 수 있는 사람이다. 다른 이들은 무공 빼고는 딱히 바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군영은 그런 만우의 질문에 ‘아’ 하고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쳤다.
“보빙사 기억나는가?”
“아. 개성삼 내다파려다가 걸린 인간? 그 인간이 왜?”
동군영의 말을 들으니 대략 짚이는 것이 있었다. 보빙사의 권리를 이용해 밀수까지 하며 재산을 불리려고 한 자이니만큼, 탐욕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탐욕은 대부분 공포를 이겨낸다. 동시에 자신이 고작해야 감찰방의 장령에게 그 치욕을 당했다는 것에 복수를 하려는 의지가 충만할 것이다. 그러니 분명히 무슨 야료를 부렸음이다.
“날 탄핵했네.”
“탄핵?”
“내가 보빙사를 겁박하고, 사사로이 이득을 편취하였다고 하네. 보빙사가 무슨 공작을 벌인 것이 틀림없네.”
“그 자가 한 행동은?”
“증좌가 없네. 우리의 주장일 뿐이지. 동래 임방에서 자네와 옹주마마가 단서를 얻었다고는 하나 그 주범을 잡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흠.”
만우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 일본국까지 가서 그 개고생을 하고 왔는데, 밀수를 하려던 놈이 되레 여론을 조작해 이쪽을 공격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생들이 상소문을 올린다 하네. 여의손, 그자가 유림에도 끈이 닿은 모양이야.”
“탐욕스러운 자니까. 그런 쪽을 신경 쓰지 않았을 리 없지.”
“일단 전하를 먼저 뵈러 가시지요.”
설운은 이야기가 길어지자 만우와 동군영에게 말했다. 만우는 동군영에게 물었다.
“국왕이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거 아닌가?”
“……유림을 무시했다가는 정사(政事)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네. 유림은 대신들까지 움직일 수 있으니까. 과거에 급제한 조정의 대신들이 어디서 수학했을 것 같은가?”
심지어는 동군영도 본가가 있는 익주의 향교에서 과거 준비를 했다. 한양의 성균관과 조선 전체의 향교에서 수학(受學)하는 자들이나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이나 전부 눈에 안 보이는 거대한 인의 망(網)을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조선을 세운 사대부들이 개국공신이란 점을 들어 점점 유림을 통해 그들의 영향력이 부각되고 있었다.
“국왕이라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군.”
“어느 집단이 수장 마음대로 돌아갈까.”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우는 그런 복잡한 것은 모른다. 검 한 자루, 무공이면 많은 것이 해결되는 곳에서 살다 왔기 때문이다.
“들어가시지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만우와 동군영, 그리고 척일만이 함께 했다. 설운의 안내를 받은 만우는 상선의 안내를 받아 뒷문을 통해 대전에 들어갔다.
“왔나?”
“전하.”
“흠.”
“오랜만에 뵙소이다.”
동군영은 그 자리에서 철퍼덕 엎어졌지만 만우와 척일은 꼿꼿했다. 그나마 척일은 최소한의 예의라도 보였지만, 만우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일 따름이었다. 그런 만우를 보고 열을 내는 이는 다행히도 대전에 없었다. 임금이 만우는 자신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호. 역시 손녀 사윗감.”
그것을 처음 안 척일은 놀라기는커녕 기뻐하는 듯했지만.
“일본국에 다녀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동 장령.”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여의손의 상소와 동군영의 장계를 모두 받아 본 임금이다. 임금은 동군영의 노고를 치하한 다음 만우와 척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 간다고 하더니.”
“갈 수도, 안 갈 수도 있는 법이지. 본래 부평초 같은 것이 인간의 의지고 운명 아니던가?”
임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우가 어울리지 않게 선문답 같은 말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임금은 혀를 끌끌거리며 찼다.
“그냥 걱정되어 갔다고 하면 될 것을.”
“그러려고 날 입궐시킨 것은 아닐 테고.”
“검주, 그대가 조정의 대신들을 쓸어버린다고 날뛰기 전에 데려온 것이네. 조선이 걱정되어서 그런 것이지.”
임금은 그렇게 말했다. 만우는 그런 임금의 말에서 동군영을 탄핵한 여의손과 유림처럼 복잡한 또 다른 무언가가 깔려 있음을 눈치챘다.
“한양 한복판에서 그 난리를 쳤는데, 말이 안 나오기를 바라는 겐가?”
“……쩝.”
그것에 대해서는 만우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옥령에게 혈성이란 것이 있는 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하필이면 전부 자리를 비웠을 때 터질 줄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거기에 평소에 옥령의 행동거지가 워낙 조신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을 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건 미안하게 됐군. 병사들이 많이 다쳤는가?”
“……그것 때문에 문제가 더 커질 수도 있네.”
조선의 임금 심정으로는 감히 자신의 군사를 죽인 옥령이란 여인을 능지처참시켜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감정적으로 움직이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왕의 덕목은 아니었기 때문에 분노를 다스리고 있는 상태였다.
“아. 참고로 본주와 그치들은 관계가 없네. 본주가 일본국에서 그들이 속한 집단의 우두머리의 목을 썰었거든. 뭐, 반역자로 몰려 쫓기는 처지라 내게 고마워했지만.”
혈세천마는 소교주 주창의 아버지다. 하지만 주창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만우에게 오히려 고마워했다. 마교의 지존이 타락했다는 것에 주창은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남의 손을 빌렸다고는 하나, 그 덕분에 마교의 기강을 새로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관계가 없다?”
임금의 눈이 번뜩였다. 만우가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으니 그럼 투귀대의 고수들을 처벌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 그놈들이 얌전히 옥사에 있는 건 나 때문이지. 잡아다가 국문한다고 하면 도망치려고 할 텐데…….”
만우는 전옥사의 옥사를 떠올리고는 허공에서 손을 휘적이며 가늠했다.
“저기, 한 대 얻어맞고 죽을 뻔한 창백한 운검 다섯은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놈이 그 아들놈이야. 나름 강한 놈이지.”
척사영의 표정이 변했다. 주창을 이기지 못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지면 주창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노인네 정도는 있어야 그놈 잡고. 나머지는 뭐, 이런 애들 보내면 되니까.”
만우는 완숙해진 설운이나 좌익찬이라던 세자의 호위무사인 이찬을 떠올렸다. 그 둘은 초절정이었다.
“저도 있습니다, 은공.”
척사영이 임금 앞임에도 불구하고 만우가 자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자 말했다. 임금의 시선이 척사영에게로 향했다.
“내 손녀요. 허허헛.”
척일은 대단한 팔불출이었다. 임금 앞에서 끼어든 손녀를 나무라기는커녕 자신의 손녀라면서 함박웃음을 지었으니 말이다. 임금은 그런 척사영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곡산척가에 미래를 책임질 동량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있소.”
“그게 바로 우리 손녀요. 허허헛.”
“사내라면 더 큰일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척사영은 딱 봐도 비범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임금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척사영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척사영에게는 약점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