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조천사(朝天使)(1)2021.08.24.
태평관(太平館)에 나간 임금의 눈에 요동총기(遼東摠旗)라는 자가 들어왔다. 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기다리고 있다가 임금을 보고는 허리를 숙였다.
“조선의 국왕을 뵙습니다!!!”
“먼 길에 노고가 크다. 씻을 물과 잠자리, 따뜻한 식사를 내어주어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장패라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총기(摠旗)면 하급 무관이다. 명나라에서는 50명을 이끄는 자를 총기라 부른다. 그렇게 장패라와 다른 이들이 물러가자 임금은 칙서를 펼쳐 들었다. 화려한 종이 위에 명나라 황제의 옥새가 찍혀 있는 것을 보니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 황제의 칙서였다.
“흐음…….”
임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칙서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건주(建州)를 명이 영토로 만들기 위해 건주위(建州衞)를 세우고, 그곳 올량합(兀良哈)의 대추장(大酋長)인 어허출(於虛出)을 건주위 지휘사(指揮使)로 삼겠다는 칙서였다. 특별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임금에게는 썩 달가운 칙서는 아니었다.
“끝내 명 황제가 건주를 탐낸다는 말인가. 자신의 장인을 그 자리에 앉힌다는 소리군.”
임금은 턱을 쓸어내렸다. 이미 이와 관련된 칙서가 한 번 명에서 오기는 했었다. 그 칙서가 왔을 때 임금은 건주가 조선의 영토임을 증명할 수 있는 고려조의 윤관이 동여진을 정벌하고 세운 비(碑)를 찾으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는데, 결국 명나라가 건주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하려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조선은 절충 지대 없이 곧바로 명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다. 어떤 식으로든 명나라의 간섭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뜻이다. 거기에 명 황제가 건주위 지휘사로 임명하려는 어허출이라는 자는 임금이 연왕(燕王) 시절 첩으로 삼은 여자의 아비였다. 즉, 장인인 것이다. 오랑캐였기 때문에 정실은 안 되나 그것만으로도 어허출이란 자를 조선에서 함부로 대하기는 까다로워진 셈이다.
“오도리 만호인 동맹가첩목아가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을 터.”
하지만 건주에 있는 군벌은 울량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도리가 있었으니, 그 오도리의 만호가 바로 동맹가첩목아다. 그와 오도리 여진족은 20년 전부터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면서 동북지방을 책임졌던 상왕, 태조와도 인연이 깊은 자였다.
“도승지를 불러오라. 내 친서를 보낼 것이다.”
“예, 전하.”
상선이 허리 숙여 대답을 하고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런 상선 대신 임금의 앞에 권희달이 창백한 안색으로 부복했다.
“전하!”
“운검! 쉬라고 했거늘 어찌 나왔는가!”
놀란 임금이 권희달에게 말했다. 권희달의 창백한 안색에 그가 현재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 고스란히 티가 났다.
“전옥서에 그자들을 가두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소장, 걱정이 되어 누워 있을 수가 없었나이다.”
“끙…….”
임금도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전옥서(典獄署)는 죄인들을 관장하는 관서였다.
“의금부에 하옥할 죄는 아니었으니, 따로 방도가 없었다. 대낮에 저잣거리에서 별시위의 군졸들이 죽었다. 거기에 무고한 양민들 중에서도 죽은 이가 나왔으니…….”
조선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애초에 임금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검주와 그 일행이라고는 하나 국법은 지엄한 법이니.”
국법이니 이것만큼은 양보를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테니 말이다.
“검주가 아주 생각이 없는 자는 아니니, 아직까지 조용한 것이겠지.”
그것 때문에 기껏 불러 놓은 동군영도 내금위에게 맡겨 놓고 아직까지 만나지도 못했다. 어제 저잣거리에서 일어난 일이 하도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니 이번에는 명 황제에게서 칙서가 날아왔고 말이다.
“검주와 그 일행들 중 처음 본 자가 있다고 했나?”
“그렇사옵니다, 전하.”
권희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일검에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그 여자는 처음 본 얼굴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 여자를 검주와 그 일행들이 지켜 냈다. 별시위의 군졸들을 죽이고 무고한 양민을 죽인 그 여자를 말이다.
“끄응…… 복잡하구나. 복잡해.”
어제 그 사건이 하도 컸기 때문에 대충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처리할 수가 없었다.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형조에서 아주 벼르고 있었다. 그러다 괜히 쓸데없는 희생이 더 생겨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임금의 이마에 주름이 하나 더 늘어났다.
“동군영을 탄핵하겠다고 나선 상소들도 그렇고, 어제 일도 그렇고. 왜 그자들만 나타나면 이런 사단이 벌어진단 말이냐.”
임금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하고 눌렀다.
“헌데 전하.”
그런 임금에게 권희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임금이 고개를 들어 권희달을 쳐다봤다.
“옹주께서도 전옥서에 계신데 그것은 어찌하실 것이온지…….”
“하아…….”
임금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
“으허허헛. 전옥서라니. 신기한 곳이로고.”
척일이 허허허 웃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척일도 전옥서에 끌려온 것이다. 대종사라 불렸지만 척일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 자들은 사실 몇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본인이 손녀인 척사영과 함께 전옥서에 들어가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사영아?”
“……그렇지 않습니다, 할아버님.”
전옥서에서는 그 난리를 친 만우 일행을 당연히 모두 찢어 놓았다. 그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척일은 언제나 그렇듯 딱딱한 척사영을 보면서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무엇이 그리 걱정된다고 울상이느냐?”
“울상이 아니옵니다. 그저…… 불편할 따름이옵니다.”
척사영은 자신들을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면서 쳐다보고 있는 왈패들과 눈이 마주치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전옥서에는 옥사의 수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여러 명이서 한 옥사를 써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범죄자들 사이에서는 누군가 새로 오면 응당 서열을 정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는 왈패들이 노인인 척일과 예쁘장하게 생긴 척사영을 보고는 우습게 보고 달려든 것이다.
“저들 때문이냐?”
척일이 고개를 돌려 왈패들을 쳐다봤다. 왈패들은 모두 왼쪽 뺨이 시뻘겋게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척사영에 대해 더러운 소리를 하다가 척일에게 뺨을 한 대씩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화경의 고수인 척일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손이 아주 매웠다. 왈패들이 뺨 한 대에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당연히 깨어난 왈패들은 앞에서 설설 기었다. 그 덕분에 척사영과 척일은 옥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푹신한 가죽 위에 엉덩이가 시리지 않도록 편하게 앉아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척일은 지금 상황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헤벌쭉 웃으며 척사영을 쳐다봤다.
“그놈. 난 찬성이다. 사위로 삼기에 딱 좋은 놈이야.”
“……예?”
할아버지의 난데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에 척사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척일이 팔꿈치로 척사영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그놈. 타고난 운명도 기세만으로 짓눌러 버리는, 그놈 말이다.”
척사영의 얼굴이 흠칫하고 굳었다. 척일이 가리키는 대상이 설마 만우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으, 은공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네 은인이라는 그놈. 만우라는 놈 말이다. 마음에 쏙 들더구나. 암. 우리 곡산척가의 사위가 되려면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 거!!!!”
척사영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척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척사영의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격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척일의 나이는 그냥 괜히 먹은 것이 아니었다.
“설마. 고백했다가 거절을 당한 것이냐?”
“…….”
척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척사영의 새빨개진 얼굴이 답을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척일은 그런 손녀를 보면서 혀를 끌끌 하고 찼다.
“그러니까 너무 어려서부터 무예만 주구장창 익히게 하는 것이 아니었거늘. 우리 손녀면 얼굴도 된다, 집안도 좋다, 에잉 쯧쯧…….”
척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소싯적에 나름 풍류공자로 이름을 날렸던 척일이다. 조선이 건국되기 전, 고려일 때는 남녀의 연애가 훨씬 더 자유로웠으니 말이다. 그때의 경험을 떠올린 척일이 척사영에게 말했다.
“가르쳐 주랴?”
“……?”
척사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척일이 홀홀 웃고는 척사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이내 척사영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더니 척일에게서 화다닥 하고 멀어졌다.
“하, 할아버님! 어, 어찌 소녀가 그런…….”
“크흘흘. 남자가 별 것 같으냐? 그 만우란 놈도 남자다. 남자야. 홀홀홀.”
“허, 허나 소녀는 이미 방매란 아이와 약조를…….”
“강한 남자를 낚아채는 것은 용감한 여인만이 할 수 있는 법이니라!”
척일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옥사 안에서 손녀에게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상한 지도를 하는 척일이었다. *****
“…….”
딱, 따닥
만우는 손가락으로 딱딱한 옥사의 바닥을 두들겼다. 그런데 그런 만우의 주변으로 숨 쉬는 소리도 새나갈까 두려워 조심히 쉬는 사람들이 있었다.
“술을 처드시고 계셨다?”
“대, 대장님. 그, 그게 아니라…….”
“대협. 그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 먹는 것으로 다투는 짓이라고 했던가. 그 대가를 감령과 폭혈도 일행은 톡톡히 겪고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그 난리가 벌어질 때 주량 싸움을 한다고 술에 절어 있었던 감령과 폭혈도 일행은 만우보다 먼저 전옥서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만우 앞에는 문형일이 낙지처럼 바닥에서 꿈틀거리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하필이면 운이 없게도 만우와 딱 같은 옥사에 걸린 문형일이었다. 감령과 필두, 그리고 위문을 비롯한 마교 삼인방은 다른 옥사에 갇혀 있었지만 전부 만우의 시야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문형일 꼴이 나지 않기 위해 만우에게 뭐가 됐던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현경의 고수 앞에서 초절정 고수들이 그리 주눅이 들어 있으니 당연히 평범한 삼류 범죄자들은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딱 봐도 그냥 보통 한가락 하게 생긴 것이 아닌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시비를 걸지 않아도 딱 각이 나왔기 때문에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숨소리라도 새어나갈까 알아서들 조심하고 있었다.
“저…… 옥 매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옥령이 걱정이 되었던 것인지 백영이 아주 조심스럽게 만우에게 물었다.
“미친 귀신 쓰인 애?”
“그건 귀신이 아니라 혈성…….”
“알아.”
만우가 딱딱 단답으로 끊어 말하자 백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더 묻지 않아도 만우의 심기가 심히 불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우는 백영에게 툭 내뱉듯 말했다.
“겁에 질려서 알아서 도망가던데. 그게 뭐 어렵다고 주창 놈도 그렇고, 애걸복걸, 안절부절…….”
“도, 도망간다고요?”
“그래.”
“마, 말도 안 됩니다! 혈성이 어떻게, 아니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에 교에서…….”
“내가 한가하게 술이나 처마신 네놈과 농담 따먹기를 할까.”
만우의 눈가가 싸늘해졌다. 백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은 여전했다. 혈성(血星). 그게 무슨 날파리도 아니고, 쫓아낸다고 해서 쫓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혈성이 한 번 발동이 되면, 만족할 만큼의 피를 먹여 줘야만 했다. 그게 아니면 점점 저 혈성의 폭주가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해지면서 폭주하게 된다. 그렇게 폭주를 하게 되면 그만큼 되돌아오는 부작용도 컸다. 다름 아닌 옥령의 정신에 큰 타격이 갔던 것이다. 옥령은 자신이 혈성의 껍데기가 되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를 손에 묻혔다는 것에 큰 충격을 입곤 했다. 그녀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무력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또한 마인이라고는 하나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해야만 했다는 것에 옥령은 늘 힘들어했다. 그 저주스러운 혈성이 가져다 준 오성으로 옥령이 초절정 고수에 오를 정도로 무공을 익힌 이유는 간단했다. 무공을 극성으로 익히고, 경지를 뛰어넘어 초인(超人)의 경지에 다다르면 혈성을 극복하거나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길까 하는 소망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주스러운 혈성의 굴레를 집어던지고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것. 그것이 옥령이 무공을 그리 혹독하게 수련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동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