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살려야 되는 이유를 말해 봐(4)2021.08.21.
“주이의만(足利義満: 아시카가 요시미츠)?”
“예, 폐하. 국왕직을 내린 일본국의 인물이옵니다.”
“그런 자가 짐에게 장계를 올릴 일이 있던가?”
“그자는 대국인 대명(大明)에 감화되어 폐하를 하늘의 아들(天子)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충성스런 자이옵니다.”
“흐음…….”
금으로 치장이 된 화려한 옥좌에 앉은 명나라의 황제, 영락제는 수염을 몇 차례 쓰다듬은 뒤 장계를 펼쳐 들었다. 명나라 안에서만 올라오는 장계를 받아 보다가 다른 나라에서 올라온 장계라니 궁금증이 생긴 것이다.
“천마신교. 천마신교의 이야기로구나.”
“길을 빌려 달라 했던 그 무도한 무뢰배들 말씀이시옵니까?”
“그렇게 말하면 듣는 자가 섭하겠구나. 많은 재물을 냈거늘.”
영락제는 껄껄 웃으며 장계를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그렇게 장계를 읽어 내려가던 영락제의 얼굴이 멈칫하고 굳었다가 풀어졌다.
“검주. 그자가…….”
영락제는 고개를 들어 옆의 환관에게 말했다.
“치욕의 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부로를 들여라. 물어볼 것이 있다!”
“존명!!!!”
“검주라…….”
영락제의 손에 들린 장계가 꾸깃거리며 구겨졌다.
“짐이 있었다면 그런 치욕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영락제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황실의 치욕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소문이 널리 퍼졌다가는 황실의 권위가 추락할 것이기 때문에 영락제는 황위에 올라 그와 관련된 자들을 모두 처형했다. 물론, 충성스러운 자들이나 죽이기 아까운 자들은 남겨 놓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부로고, 조선에 보냈던 언살이었다.
“천마신교. 생각보다 쓸모가 없는 놈들이로고.”
정파와 사파를 아우르는 단일 세력으로는 최강이라며 떠들어 대던 천마신교의 마군자라는 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결국, 천마신교도 강호의 무뢰배에 지나지 않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검주…….”
명나라 건국 이래 어쩌면 황실에서 겪었던 가장 치욕스러운 날이었을지도 모를 그때의 일을 떠올린 영락제의 아미에 깊은 주름살이 패였다. *****
“부 공공(公公). 부 공공!!!”
“허억!!!”
황제를 가장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환관이 제독동창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면서 달려오는 소리에 잠시 오수(午睡)에 빠져들었던 부로, 부 공공의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허억, 허억.”
제독동창이라 함은 황제의 사병 조직인 창위(廠衛) 중 동창의 우두머리로, 무공을 익힌 환관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가 선발되었다. 그 중 제독동창인 부로는 치욕의 날 때, 그 자리에서 검주의 신위(神位)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이들 중 하나였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어서!”
동창의 무리는 무려 일천이나 됐다. 정확히는 검주에게 그 치욕을 당한 이후 동창의 숫자를 일천까지 늘린 것이다. 두 번 다시 강호의 무뢰배 따위에게는 당하지 않겠다는 황실의 의지가 드러난 것이지만, 한 번 진 것은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역사였고 사실이었다. 아무리 사람의 입을 막으려고 해도 불가침 조약을 맺은 무림에까지 그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은 아무리 명나라의 황실이라도 해도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 어찌하여 나를?”
부로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러 온 환관을 쳐다봤다. 환관은 그런 부로에게 말했다.
“치욕의 날 때 있었던 일. 그때의 일에 대해 폐하께서 궁금하신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꿈을 꾸었는가.”
일각 정도밖에 안 되는 오수였지만 부로의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황제가 그때의 일을 물어볼 것을 미리 알기라도 했는지 그때의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그때, 부로는 환관이 아니었다. 금의위의 고수였었다. 그런 부로가 환관이 된 이유? 간단했다.
“검주, 그자의 이름이 어찌하여 다시 폐하의 입에서 나온다는 말인가.”
그날 만우에 의해 폐인이 된 사람이 여럿이다. 그때의 만우는 자신을 불러 놓고 뒤통수를 치는 이들을 철저하게 응징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그래서 다시는 자신에게 그런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그것을 만우는 황궁에서도 똑같이 했을 뿐이다. 그렇게 폐인이 된 사람 중, 다행히도 부로는 단전이 부서지지는 않았다. 단지, 만우가 내지른 검집이 남자에게는 대단히 좋지 않은 곳에 맞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금의위의 당당한 고수였던 부로는 환관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무공을 아꼈던 건문제에 의해 그는 동창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제독동창이라는 지고한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만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금의위의 고수일 때보다 부로는 훨씬 더 강해졌다. 만우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매진할 수 있는 것이 무공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남성성을 잃으면서 더욱 매진할 곳은 무공밖에 없었다. 무공이라도 고강해야 자신의 남성성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달한 경지가 화경. 전(前) 금의위의 고수였던 제독동창 부로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급히 대전으로 달려가 영락제의 먼발치에 무릎을 꿇은 채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는 크게 답했다.
“신 제독동창 부로! 폐하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나이다!!!!”
“부로! 짐에게로 가까이 오라!!!”
영락제는 그런 부로를 자신의 옆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장계를 들어 부로에게 보여 주었다.
“짐은 무공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허니 무공에도 능통하고, 무림에 대해서도 지식이 있는 그대를 부른 것이다.”
“이것이…….”
“일본국에서 올라온 장계이니라. 천마신교의 교주란 자가 길을 빌려 달라고 했던 것에 대한 장계 말이다.”
“…….”
조심히 장계를 펼쳐 든 부로의 눈이 커졌다. 그곳에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검주라는 자. 홀로 천마신교의 교주라는 자와 그의 수하들을 압살했다고 한다. 이 검주라는 자가 그날, 황궁에 단신으로 들어와 단신으로 나갔던 그자가 맞는 것이냐?”
“어찌…… 어찌…….”
부로는 멍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만큼 장계에 쓰인 내용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무공을 익힌 부로였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제독동창!! 폐하의 앞에서 그 무슨 추태요!!!!”
환관 하나가 부로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부로가 그 자리에 철퍼덕 엎드렸다.
“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신, 너무 놀라 나머지…….”
영락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독동창 부로라면 동창의 최고수다. 금의위장과 비교해도 한 발 앞선 실력자라는 것이 내부의 평가다. 그런데 그런 부로가 이리 놀랄 정도라면 그 검주라는 자가 범인(凡人)이 아니라는 뜻이다.
“제독동창! 짐의 말에 대답하라!”
“존명!!!!”
부로가 이마를 땅에 박았다. 영락제는 수염을 쓰다듬은 뒤 부로에게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욕스러웠던 그날, 검주라는 동이족의 무공이 정녕 동창과 금의위를 단신으로 누르고 황궁을 빠져나갈 정도였더냐.”
부르르르 부로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영락제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부로의 저 반응은 황제인 자신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그날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나온 공포란 것을 눈치챈 것이다. 공포로 군림하는 것은 황제여야만 한다. 영락제는 진중해진 표정으로 부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그렇사옵니다. 그날, 검주 그자는…….”
관과 무림은 불가침의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동창과 금의위의 고수들은 자신들이 절대로 무림의 무뢰배들에게 실력이 뒤쳐진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불가침 조약만 아니라면, 그들도 자신들의 발밑에 무릎이 꿇려진 채 대명(大明)의 백성으로 황제의 명에 복종해야 할 것이라 자신했다. 그랬던 그들의 자신감은 단 한 명의 사내에 의해서 무참히 깨졌다. 검주 만우.
그자는 한 자루의 검 그 자체였다. 자신들이 휘두르는 검은 만우에게 닿지 않았다. 아니, 자신들이 휘두르는 검은 그에게 한 줄기 미풍만큼의 위력도 없었다. 그날, 부로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이 버들나무 가지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표횰했고, 강맹했다. 부드러웠으나 강인했고 느렸으나 신속했다. 모든 무리(武理)를 일검(一劍)에 담은 것 같은 그의 검에 동창과 금의위들은 감히 맞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불나방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자가 동창과 금의위의 고수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경악한 건문제 앞에서 했던 말을 부로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명 황제. 이런 놈들을 믿고 침소에 드실 수 있으시오?]
그 동이족은 황제 앞에서 예의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명나라의 신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명 황제는 다른 나라의 황제이고, 자신은 동이족인 조선 사람이면서 무림에 속한 검주라는 존재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의만 보였을 뿐이다. 딱 길 가던 모르는 사람에게 보였을 정도만의 예의. 하지만 그런 동이족의 오만함도 동창과 금의위의 최고수들이 패퇴한 상황에서는 나무랄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 수천의 동창, 일만의 금의위? 그들은 만우가 뿜어내는 기세만으로도 활시위 하나 당기지 못할 정도로 약골들이었다. 강함과 약함이란 것이 상대적이라고 하지만 부로는 그날 자신이 익힌 무공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그리고 나서 깨어나 보니, 남자의 중요한 것을 잃고 환관이 되었다.
“그날 그자는 악귀였습니다. 악귀. 허나…….”
영락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부로에게 마저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부로는 고개를 처박은 땅에 자신의 호흡이 부딪쳐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 호흡이 이상할 정도로 차가웠다. 이게 자신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장계에 적힌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저기 멀고 먼 일본국에서 올라온 장계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장계에 적힌 내용이 전부 맞다고 할 수 없다고 쳐도, 그 안에 적힌 것 중 절반만 사실이라 해도 이건 전 무림을 뒤흔들 중대한 정보였다. 천마신교. 그리고 무림십좌 중 가장 강하기에 수십 년을 일패(一覇)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혈세천마. 그런 혈세천마의 가장 충직한 수하라는 이왕(二王) 중 한 명인 곡왕 부고야와 삼존(三尊) 중 한 명인 마존 남요명. 그리고 백 인의 교주친위대인 천마대와 오백인의 진혼대까지. 사실상 마교의 삼할, 그 이상의 전력이 검주에 의해 압살을 당했다?
‘화경이 아니라 현경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검주는 화경이 아니라 현경에 들었다는 소리다. 동시에 검주는 이제 무림십좌 따위가 아니라 명실공히 전 무림인 중 으뜸이라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었다는 소리다.
“검주, 그 무뢰배가 더 강해졌다는 뜻이니 이제는 일초지적도 되지 못할 가능성도…….”
부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나오는 대로 말했다. 부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검주를 떠올리면서 그때의 공포에 젖어든 것이다. 영락제는 그런 부로를 보고는 혀를 쯧 하고 찼다.
“그 정도라.”
“그는, 그는 천하제일인이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신이 아는 전부이옵니다, 폐하.”
천하제일인. 대단히 후한 평가다. 그에 영락제의 눈이 커졌다가 다시 작아졌다. 동이족에게 붙이기는 과한 호칭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학사(大學士)를 들라하라.”
“예, 폐하!!!”
대학사란 말에 부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동창의 수장인 제독동창이 되기 위해서는 그냥 무공만 강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창이 모셔야 하는 황제가 원하는 것을 빠르게 눈치채고 일을 해야 한다. 부로의 눈치가 빠르게 돌아갔다.
“동창들을 집결시키겠사옵니다.”
“동창?”
“조선에 사신을 보내 검주 그자를 압송하실 생각이 아니신지요.”
“그대. 그대는 조선의 국왕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
영락제는 부로를 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부로는 다시금 이마를 쿵 하고 찧으며 영락제에게 말했다. 방금 전, 검주를 떠올리면서 자신이 보인 행동의 실수를 그제라도 만회하려 하기 위함이었다.
“그자가 범상치 않은 자라고 하여도, 결국 이 대국을 지배하시는 위대한 황제 폐하의 명에는 검주를 압송하여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대국을 지배한다라…….”
영락제는 피식 웃었다. 아직 원나라의 잔재도 완벽하게 지워 내지 못한 명나라다. 북원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영락제라고 해도 조선을 압박할 수 없다. 그러다 조선이 북원과 손을 잡고 대륙으로 진출을 하려 한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절히 망동을 못 하게 관리만 하면서 현상 유지를 하는 것이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외교 기조였다.
“그래서. 동창을 집결해서?”
“조선에서 압송되어 넘어오는 검주를 동창에서 호송하겠나이다, 폐하.”
부로는 바짝 엎드렸다. 감히 대명의 황제 앞에서 검주를 두려워한 부로다. 그것이 영락제의 심경에 어떠한 변화를 불러일으켰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부로는 되는 말이건 안 되는 말이건 무엇이든 만들어서는 말했다.
“크하하하!!”
영락제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대전에 울려 퍼졌다. 부로의 표정이 슬며시 펴졌다. 웃음소리란 것은 긍정적인 신호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왕이 폐하의 명에 따라 검주를 압송해 온다면 조선의 공로를 치하하시면 되는 일이고, 못 한다면 조선에 그 죄를 물으시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고로, 잃을 것이 없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부로가 급히 변명하듯 둘러댄 말이지만 말에 크게 모남이 없었다.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락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지어낸 말 치고는 그럴듯하구나.”
“송구하옵니다 폐하!”
부로가 바짝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영락제는 실소를 흘린 후 대학사가 들어오자 그에게 말했다. 대학사는 정5품의 관직이지만 명나라 인재의 본원인 한림원의 으뜸이었다. 즉, 명에서 가장 학문이 높고 인망이 높은 이가 대학사로 임명되었다. 영락제는 옛 관직의 승상 같은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관직을 꺼려했기 때문에 관직을 개편하여 새롭게 만든 것이 내각대학사였다.
“조선과 여진에 친서를 보낼 것이다.”
‘친서.’
여진이란 소리에 부로가 눈을 번쩍하고 떴다. 여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진의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는 감히 조선과 대명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자였다. 그는 두만강 북부 건주(建州) 지방의 오도리(吾都里) 여진족을 이끄는 자로 굳건하고 날랜 여진족의 무사들을 거느린 군벌(軍閥)이었다. 만주 지역은 명나라와 조선의 영향력이 완전히 닿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조선과 명에서 각별히 신경을 기울이는 곳이기도 했다.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조선에는 죄인 검주의 압송을 요청하라.”
“압송이라 하시면.”
“방약무인하게도 황실을 모욕하였고 짐의 수하들을 공격했노라. 이는 모반에 해당하는 중죄일지어니.”
영락제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부로는 그런 영락제를 보면서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또한 동맹가첩목아에게는!”
영락제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먹을 갈아 정좌세로 앉아 황제의 금필(金筆)로 내각대학사는 글씨를 써 내려갔다. 하얀 종이 위에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힘찬 글씨체가 쓰였다.
“어허출(於虛出)에게 내린 건주위 지휘사(指揮使)를 그에게 제수할까 하니, 군을 일으켜 조선의 국경을 어지럽게 하라 전하라!”
“허나 폐하. 이미 조선에 보낸 요동총기의 칙유(勅諭)는 어찌…….”
“다시 보내면 될 일이다. 아니 그런가?”
영락제는 그 까짓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며 내각대학사를 쳐다봤다. 내각대학사는 강인한 황제의 눈에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락제의 말이 곧 법이요 질서다. 내각대학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영락제가 읊는 것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에만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