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살려야 되는 이유를 말해 봐(2)2021.08.14.
호선의 등장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일까, 호선은 혈성의 살기가 폭주하는 것을 느끼면서 당혹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혈성의 살기가 폭주한다는 것은 지금이 옥령이 낼 수 있는 힘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갈!!!]
크허어어어엉!!!! 호선은 다시 한 번 선기를 담아 창룡후를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옥령의 신형이 먼저 사라졌다.
[큿?]
순간적으로 잡아낼 수 있는 이상의 속도로 사라진 옥령을 경계한 호선이 발톱을 세우며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옥령이 호선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휘릭, 휙! 타다닥!!!
[말도 안 되는…….]
호선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옥령의 신형이 멀어진 뒤였다. 호선은 옥령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도망쳤다는 것에 말도 안 된다는 듯 벙찐 표정을 지었다.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고?]
옥령의 움직임은 누가 보더라도 이성을 잃은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호선에게서 등을 돌려 도망쳤다는 것은 유불리를 따질 정도의 이성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몸을 가진 옥령으로는 호선과의 싸움이 길어질수록 일방적으로 불리해진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500년이나 산 호선과는 체급 차이에서부터 오는 격차부터 시작해 여러가지 불리한 점들을 옥령이 떠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하지만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잠깐 자신에게서 멀어진 사이에 옥령이 또 다시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간 거지?]
이성이 있다면, 적어도 판단할 수 있는 무언가라도 있다면 도망쳐서 향하는 곳이 있을 터였다. 호선은 또 다시 한 줄기 백뢰로 변해 옥령이 사라진 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 *****
“하악, 하악, 하악.”
방매는 허리를 직각으로 꺾고 움켜쥐면서 헛구역질을 했다. 단시간에 옥령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과도할 정도의 체력을 쓴 부작용이 튀어나온 것이다. 방매는 신물이 나오는 입을 슥 하고 닦았다.
“따, 따돌렸나?”
심장이 멈춰 버리는 줄 알았던 방매였다. 그렇게 무섭도록 쫓아오는, 마치 악귀에 쓰인 듯한 옥령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방매는 정말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하악, 하악.”
방매는 몸의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쓰라린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골목길에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고 땅을 구르고 하면서 피가 배어나오는 곳이 한 둘이 아니었다. 오싹 그런데 그 순간 방매의 전신이 찬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소름이 쫙 하고 돋았다. 방매는 입가를 닦던 손등을 내리고서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쿵쿵쿵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심장 박동소리가 천둥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방매가 데구르르 구르고는 벌떡 일어나 앞으로 튀어나갔다.
“캬하하하핫!!!”
옥령이 방매의 뒤에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방매가 있던 자리에 고랑이 쫘악 하고 생겼지만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는 다시 달려 나갔다.
“왜 나한테만 그래에에에에!!!”
할짝. 옥령은 손끝에 묻은 방매의 핏방울을 혀로 핥았다. 손톱이 방매의 다리를 살짝 할퀸 것이다. 아주 얕았기 때문에 방매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혈성에 쓰인 옥령의 입이 귀까지 쭈욱 찢어지며 살소를 머금었다.
“킥킥킥.”
옥령은 사라진 방매를 급히 뒤쫓지 않았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 막다른 길에 도달한 방매가 천천히 다가오는 옥령을 보면서 이를 악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왜 나한테만 그래!!!!”
“킥킥킥.”
옥령이 킥킥대면서 방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방매 앞에선 옥령의 입술이 달싹였다.
“몸…… 내놔. 그 몸…….”
“뭐? 미쳤어?”
방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몸을 달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옥령은 그런 방매를 보면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괜찮아. 내가 가져갈…… 거니까!!!”
화악!!!!! 옥령의 전신에서 눈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붉은 혈기가 쏟아져 나왔다. 방매는 자신을 덮쳐오는 붉은 혈기에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얼굴을 가렸다.
“옥령!!!!!!”
촤악!!!!
“방매. 괜찮아?”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지붕을 넘어 방매의 앞에 도달한 척사영이 검기를 일으켜 방매를 덮치려던 혈기를 날려 보냈다. 그리고 그런 척사영의 어깨를 짚고 뛰어넘은 주창이 옥령에게로 달려 나갔다.
“꺄아아악!!”
옥령은 다시 한번 방해를 받았다는 것에 분노하면서 주창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주창은 자신을 향해 휘둘러져 오는 손에 입술을 깨물고는 마련검을 들어 올렸다. 쩌엉!!!! 휘청휘청 마련검과 부딪친 옥령의 신형이 뒤로 비척거리며 물러났다. 혈성이 발작한 옥령의 실력은 초절정의 한계를 뛰어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경에 올라선 것은 아니다. 권희달의 경우에는 혈성에 대해 모르고 있어 일격을 허용했지만 주창은 아니었다. 혈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주창 그 스스로도 완숙한 경지에 도달한 화경이기 때문이다.
“옥령! 정신 차려라!!!”
“꺄아악!!”
하지만 주창은 옥령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만 급급했다. 자신의 수하인 옥령을 베어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소리쳐도 옥령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혈성에 취해 살기를 터뜨리며 주창을 향해 달려들었다. 혈성이 발작을 했는데 충분한 피도 보지 못했고, 계속해서 등장하는 방해꾼들 때문에 혈성의 살기가 더욱 폭주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마교에 있을 때에는 옥령의 혈성이 폭주하면 그냥 마을 하나에 넣어 버렸다. 마교의 입장에서는 무고한 양민들 수 백, 수 천보다 혈성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 무공에 대한 오성이 뛰어난 옥령이 훨씬 더 소중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한양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피, 피! 신선한 피를…….”
옥령의 손톱이 마련검을 긁었다. 하지만 마련검에는 흠집 하나 새겨지지 않았다. 괜히 천마신교의 신물이 아닌 것이다.
“뭐하는 짓거리야?”
뒤에서 방매를 지키고 있던 척사영이 주창을 돌아 옥령을 향해 짓쳐들었다. 척사영의 양손에 들린 검과 도에서 검기와 도기가 노도처럼 일어났다. 콰앙!!!!
“왜 막는 거지?”
그런데 그런 척사영의 검과 도를 묵빛의 마련검이 막아섰다. 척사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주창을 쳐다봤다.
“내 수하요. 내가 지고 가야 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내 수하!”
주창은 이를 악물었다. 옥령을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 번 발작한 혈성을 가라앉히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훨씬 더 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수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평생 나고 자란 신교, 그리고 그곳의 교주인 혈세천마에게 자신의 한 마디만 믿고 기꺼이 살기를 돌렸던 소중한 자신의 수하. 주창에게 있어 옥령의 혈성은 일종의 병이었다. 병이 도졌다고 해서 수하를 죽이는 군주는 없다. 수하만 군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군주도 수하를 지켜야 한다. 그게 도리이고 이치이다.
“벌써 사람을 열도 넘게 죽인 살인마다.”
하지만 척사영은 그런 주창을 이해하지 못했다. 옥령이 주창의 수하인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옥령은 무고한 조선의 백성을 죽였다. 그것도 모자라 이 조선의, 임금의 명을 받는 군사들까지 죽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 그 어떤 존재도, 힘을 가졌다고 해서 국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순순히 잡히지 않는다면 죽일 수밖에.”
혈성이란 것을 뒤집어썼다고 해서 죄를 지었음에도 그것이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욱 피해가 커진다면, 응당 죽이는 것이 이치이고 도리이다. 그래서 그 난동에 휘말려 죽을지도 모르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곡산척가에서 나고 자란 그녀가 배운 세상을 사는 도리이고 이치이다.
“비켜라!”
척사영은 옥령을 향해 다시 검과 도를 들어 올렸다. 척사영의 검과 도면 옥령을 죽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창이 그런 척사영의 앞을 막아섰다.
“가려거든 날 먼저 상대해야 될 것이오.”
“그러면 내가 포기할 줄 알고?”
고오오오오-!!! 척사영의 전신에서 공력이 들끓었다. 주창은 그런 척사영과 뒤에서 틈을 노리는 옥령의 살기를 느끼면서 이를 악물었다. 옥령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척사영과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부딪친다?
“그대는 아직 나에게 닿을 수 없소.”
주창은 척사영에게 말했다. 척사영은 그런 주창을 보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언젠가는 닿겠지. 휘두르다 보면.”
“그대의 사정을 고려하면서 싸울 수가 없단…….”
“패수.”
척사영의 검과 도가 위협적으로 일렁이는 강의 흐름을 담고는 주창을 향해 휘둘러졌다. 주창은 문답무용이라는 듯 달려드는 척사영을 향해 마련검을 들어 올렸다.
“차라리 그대를 항거불능으로 만드는 것이 낫겠소!”
옥령을 베는 것보다는 척사영이 낫다. 척사영에게 혼인을 청한 주제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웃기기는 했다. 하지만 척사영보다는 옥령이 더 소중했다. 훨씬 더 긴 기간을 함께 보낸, 주창의 친우이자 수하인 옥령이었으니까. 쿠르릉!!! 마련검이 부르르 떨었다. 주창은 길게 힘을 빼면서 싸울 생각이 없었다. 옥령의 혈성을 최대한 가라앉히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니, 척사영과의 싸움이 길어졌다가는 옥령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마참(天魔斬).”
주창의 마련검이 길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묵빛의 검신을 지닌 마련검이 쭉 길어지는 듯한 착시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척사영은 자신을 둘로 쪼갤 것처럼 내리쳐 오는 주창의 천마검으로 검과 도의 방향을 틀었다. 척사영의 검과 도에서 일어난 검기의 와류가 쪼갤 듯 내리쳐 오는 천마검을 휘감았다. 척사영과 주창의 무공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크허어어어엉!!!!
“캬아앗!!”
그 사이 옥령을 뒤쫓아 온 호선이 옥령의 목덜미를 물겠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포효를 터뜨리며 난입했다. 옥령의 장(掌)이 공중에 뜬 호선의 앞발을 후려쳤다. 쾅!!! 검기와 도기가 허공에서 춤을 추고, 백호와 붉은 기운을 몸에 두른 여자가 부딪쳤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난리를 일으켰다. 그 여파에 담벼락이 무너지고 서까래가 부서져 나가면서 풀썩 하고 집들이 주저앉았다. 방매는 인간이 아니라 신선들이 싸우고 있는 듯한 모습에 이를 악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체 왜 내 몸을…….”
굳이 왜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의 몸을 달라며 옥령이 달려든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옥령이 귀신 비슷한 것을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지?”
방매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그때 백호가 고통스런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호, 호선 언니!!!”
방매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방매가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옥령이 방매를 노리고 달려오는 것을 호선이 몸으로 막아낸 것이다. 무공으로만 따지면 옥령이 호선보다 반 수 정도 앞서 있었지만 기운의 상극으로 따지면 호선이 앞서 있었다. 거의 대등한 수준이기 때문에 급박한 상황에서 호선은 몸을 날려 방매를 보호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도망가!!!]
크허어어엉!!!! 쫘자작!!! 호선의 몸에 손톱을 박아 넣은 옥령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호선의 몸을 찢어발겼다. 호선은 고통에 찬 포효를 내지르며 옥령을 떼어 내기 위해 몸을 흔들었다. 푸화아악!! 하지만 옥령이 호선의 몸을 찢어발기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호선의 몸에서 나오는 피의 양이 많아지자 옥령은 호선의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는 요사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꺄하하하핫!!!”
크와아아아앙!!!! 호선의 주변으로 바람의 칼날이 몰아쳤다. 도술을 쓴 것이다. 하지만 호선은 도술에 능하기 보다는 영물 출신이기 때문에 육체파였다. 옥령이 손을 휘두르자 바람의 칼날이 모두 소멸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호선에게도 한 줄기 구명줄은 남아 있었다.
“숙여!”
호선은 척사영의 고함소리에 허리에서 느껴지는 격통을 참고는 몸을 바짝 눕혔다. 그곳에 딱 달라붙어 있던 옥령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꽝!!!
“꺄아아악!!”
옥령이 끈 떨어진 연처럼 훨훨 날아서는 뒤로 날아갔다. 호선은 눈을 크게 떴다. 거대한 검 같은 것이 날아와서는 옥령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만우!!!!!!!”
방매의 입에서 구세주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만우는 맨 손으로 검도 없이 손날을 펼쳐 든 채 호선의 앞에 내려앉았다.
“마, 만우 대협.”
“쯧. 엉망이 됐구먼, 엉망이.”
만우는 호선을 내려다보고는 혀를 쯧 하고 찼다. 백호의 거대한 가슴이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만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쯧 하고 찼다.
“캬아앗!!!”
그런데 그때, 흙먼지를 뚫고 옥령이 다시금 만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옥령의 여기저기에는 긁힌 자국이 선명했는데, 그 상처가 삽시간에 치료되는 것이 만우의 눈에 들어왔다. 만우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옥령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겁도 없이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