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혈성(4)2021.08.07.
따다당!!!!
“많이 늘었소!”
“스승이 된 것처럼 말하지 말라!!”
척사영의 좌검우도가 마련검과 얽혔다. 주창이 힘을 주어 비틀었음에도 척사영이 당황하지 않고 짧게 마련검을 후려쳤다. 주창이 감탄하면서 한 소리에 척사영이 발끈했다. 콰드드득!!! 척사영의 도가 거칠게 흙바닥을 헤집으며 올려치는 것을 몸을 기울여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낸 주창이 마련검을 내질렀다. 캉!!! 그런 주창의 마련검을 척사영이 같은 찌르기로 내지르자 허공에서 주창의 마련검과 척사영의 검이 튕겨져 나갔다.
“한 손으로는 힘들 텐데.”
“한 손으로도 충분하다!”
남자와 여자의 근력 차이도 있는데 한 손으로 주창의 마련검과 부딪쳤으니 척사영은 검을 회수하는 것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척사영에게는 도가 있었다. 파바바박!!!
“읏차!!”
검을 회수하는 대신 그 반동으로 몸을 틀어 척사영이 도를 날리자 주창이 땅을 박차고는 뒤로 훌쩍 물러섰다.
“이 정도면 되었소. 더 하다가는 주변이 더 난리가 나겠군.”
“흥.”
주창의 말에 척사영은 검과 도를 거둬들이면서 코웃음을 쳤다. 이럴 줄 알고 사람이 드문 곳으로 나온 것이지만,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화경과 극마의 고수인 둘이 부딪히면 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잔 소리에 척사영도 뭐라 더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제는 그대와의 대련을 줄여야 할 것 같소.”
“왜, 겁이 나서?”
주창의 말에 척사영은 그를 도발했다. 하지만 주창은 의외로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그렇소. 이러다 그대에게 지겠소이다. 그래도 나름 천마신교의 다음 대 교주가 될 몸인데, 조선이라고는 하나 졌다가는 창피하지 않소.”
“은공에게는 지지 않았나?”
척사영의 말에 주창은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검주를 이길 이가 있기는 있소?”
척사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창은 그런 척사영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이오. 그러니까 비교 자체가 불가한 것이지. 모든 이를 이겼기 때문에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아니겠소?”
“은공께서는 그 말을 굉장히 싫어하는 것 같은데.”
척사영은 주창에게 말을 높이지 않았다. 지고 싶지 않다는 유치한 감정의 발로였지만 그런 그녀의 말투에 대해 주창도 딱히 뭐라고 한 적이 없어서 이상한 말투가 유지되고 있었다.
“싫어하지.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니까. 검주(劍主)도 무림십좌의 말석이지만 그것조차도 싫어했을 것이 분명하오. 성격을 보니 이제 알겠소.”
무공의 고하를 겨루는 것은 좋아한다. 무공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괜한 일에 휘말리는 것은 싫어한다. 귀찮은 것을 싫어한다는 소리다. 그러고 보면 검주는 강자라 알려진 이들에게 먼저 도전장을 던지고 다니기는 했어도 그것 이외에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먼저 검을 휘두른 적은 없었다. 그 나름의 기준이 명확하다는 뜻이다.
“아참. 척 소저.”
“소저가 아니라 무사다.”
소저란 소리에 척사영은 인상을 썼다. 그녀는 검을 쥔 무사이지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저 이외에 부를 말이 없다면 모를까.
“아. 척 무사.”
괜한 것에 싸우고 싶지 않다는 듯 주창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혹시 그대의 세가에서는 그대의 혼인에 대해서 뭐라고 안 하오?”
“혼인?”
척사영은 주창을 쳐다봤다. 주창은 그런 척사영의 시선에 씩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만약 마땅히 정해 놓은 혼처가 없다면 나는 어떻소.”
“뭐?”
척사영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주창은 어깨를 으쓱였다.
“곡산척가가 조선 최고의 무가(武家)라고 들었소. 나는 천마신교의 교주가 될 몸이지. 그리고 척 무사는 충분히 강하지 않소. 무공에 대한 조예도 깊고.”
“그거랑 혼인이랑 무슨 관계지?”
“무공에 대해 같이 논할 수도 있고, 함께 무공을 수련할 수 있지 않겠소. 게다가 중원은 이 작은 조선보다는 훨씬 더 거대하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고, 많은 강자들이 있다는 소리지.”
“강자?”
척사영이 강자와 무공이라는 소리에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주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은 넓고 기인이사들은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오. 그만큼 다양한 무공과 수없이 많은 강자가 있다는 소리. 척 무사는 무공을 익히는데 관심이 많지 않소이까.”
무림인에게 있어 무공은 삶의 전부다. 그건 척사영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검을 쥐고 휘둘러 왔으니까.
“당신은 옥령인가 뭔가 하는 여인이 있지 않나?”
“옥령? 흐하하하하.”
하지만 척사영은 옥령을 떠올렸다. 옥령이 주창을 바라보는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라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창에게는 아니었다.
“령이는 여동생 같은 아이외다. 연인이라니, 그 아이와? 푸흐흐흐.”
주창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게 있어 옥령은 수하이자 여동생까지가 전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척사영은 혀를 쯧쯧 하고 찼다.
“나도 무예 밖에 모르는 몸이라지만, 당신만큼은 아니어서 다행이군.”
“응? 그게 무슨…….”
척사영의 말에 주창이 다시 물어보려던 찰나, 주창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이건…….”
주창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척사영도 변고를 눈치채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주창은 하늘을 쳐다보는 반면, 척사영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제법 떨어진 방향에서 살을 아릴 듯한 강렬한 살기가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령이! 하필이면 이때!”
주창은 하늘에 뜬 붉은 혈성을 쳐다보면서 이를 까득 깨물었다. 이곳이 중원이었다면 차라리 괜찮을지도 모르나 이곳은 조선이었다. 천하제일인인 검주가 있는 바로 그 조선. 그 조선의 중심인 한양에서 혈성이 발작하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상상하기도 싫은 참사가 일어난다면.
“척 무사. 날 도와주시오. 령이요. 령이의 혈성이 발작해 폭주하기 전에, 그 전에 령이를 막아야 하오!!!!”
“옥령? 그 여인의 기운이라고?”
척사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척사영이 왜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 봤던 옥령은 이런 흉악한 살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신한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혈성, 혈성거리는 소리를 듣기는 했는데, 바로 이게 그 혈성인 모양이었다. 파앗!!!! 주창이 급히 경공으로 몸을 띄웠고 그 뒤를 척사영이 따랐다. *****
“익!!”
방매가 몸을 낮추며 발목을 낫처럼 꺾어서 달려드는 하오문도의 발을 탁 하고 걸었다. 하오문도의 가랑이가 쫙 앞으로 찢어지며 미끄러지자 방매는 몸을 일으켜 하오문도의 어깨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뻐억!!
“이랏차!!”
“으억!!”
후두둑!!! 낮아진 하오문도의 얼굴에 방매의 무릎 팍이 작렬했다. 그러자 허연 이가 우수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언니! 등 좀 빌릴게요.”
“응??”
방매 못지않게, 아니 방매보다 더 날뛰고 있는 사람이 바로 김향이었다. 여리여리하고 마냥 어려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기력을 익힌 김향은 날쌘 다람쥐 같았다. 탁! 짜자자작!!!! 방매의 등을 밟고 허공으로 뛰어오른 김향이 신기와도 같은 발기술로 하오문도 하나의 어깨 위에 착지한 채 나머지 발로 달려드는 하오문도들의 뺨을 한대씩 발등으로 올려 부친 것이다. 휘리릭!
“어헉!”
우당탕탕!!! 그리고는 마무리로 자신에게 어깨를 빌려준 하오문도의 겨드랑이에 양발을 끼워 놓고는 몸을 회전시키며 같이 돌아가는 하오문도를 던져 다른 하오문도들을 우르르 쓰러뜨렸다. 그런 방매와 김향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 바로 옥령이었다.
“제법…… 이네?”
하오문도의 뒤를 따라왔다가 김향과 방매를 본 옥령은 곧바로 끼어들려고 했다. 옥령의 머릿속에 김향과 방매는 보호가 필요한 최약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상대적이었단 것을 비로소 깨달은 옥령이다. 초절정 고수가 득시글한 만우 일행이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방매와 김향은 하오문도에게는 오히려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윽?”
그런데 그 순간, 옥령은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고는 몸을 직각으로 꺾었다.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고 시야가 뱅글뱅글 돌면서 위장이 꼬이는 느낌이었다.
“우욱!”
옥령의 입에서 토사물이 쏟아졌다. 노란 위액이 뚝뚝 떨어졌다. 옥령은 심한 어지럼증과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이를 깨물었다. 까득! 주륵! 이를 깨문다는 것이 잘못 깨문 것인지, 옥령의 입안에서 혈향이 터져 나왔다. 옥령은 이게 무슨 현상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 안 돼. 이곳에서, 이곳에서!’
옥령은 직각으로 꺾었던 고개를 힘들게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에서는 요사스럽게 붉게 타오르는 혈성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분명 태양이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옥령의 눈에는 태양보다 밝게 빛나는 붉은 혈성(血星)이었다.
‘안 돼, 안.……’
옥령은 자신의 의식이 늪 속에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옥령의 의식이 저 붉은 혈성의 늪 속에 빠지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혈성이 그녀의 몸을 차지한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혈성의 굴레다. 하필이면 그것이 지금 발현되는 것이다.
“크으, 크으, 크르르르…….”
옥령의 흰자가 휙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감전된 것처럼 온 몸을 부르르 떤 옥령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전처럼 하얗고 맑은 눈이 아니었다. 혈광이 뿜어져 나오는 눈을 한 옥령은, 아니 그녀의 몸을 차지한 혈성은 그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이 힘들었다는 듯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응?”
가장 먼저 변고를 알아챈 것은 하오문도 하나를 쓰러뜨리고 있던 김향이었다. 내공과는 다른 기력을 다루는 그녀인만큼 갑자기 치솟은 혈성의 기운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이다. 꽈악!
“잡았다!!!”
그 때문에 멈춰 선 김향을 하오문도가 덥썩 붙잡았다. 당황한 김향이 다급히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하오문도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팔에 힘을 주었다.
“안 놓쳐, 계집!!!”
김향은 자신이 붙잡힌 틈을 노리고 달려드는 다른 하오문도를 보면서 발을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휘청 쿵! 김향을 붙잡고 있던 하오문도가 갑자기 휘청거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 때문에 김향은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김향은 악 하는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덜…… 덜…… 덜덜덜!!!! 김향의 본능이 위험하다며 경종을 때리는가 싶더니 다리가 벌벌거리며 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촤악!!! 푸화아아아악!!!
“꺄하하하하하!!!”
“향아!”
우당탕탕! 방매는 몸을 날려 그런 김향의 몸을 낚아채며 굴렀다. 그런 방매와 김향이 벗어난 자리에는 김향의 몸을 붙잡았던 하오문도의 목이 날아간 채 피분수를 뿜어 대고 있었다.
“꺄, 꺄아아아아악!”
“살인이다!!!!”
“으아아악!!!”
그냥 길거리 싸움판이던 자리에 갑자기 사람이 죽어 나가자 놀란 구경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난입한 웬 미친 여자의 손에 목이 잘린 동료를 본 다른 하오문도들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하오문이란 이름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명과는 다르게 조선인들이었기 때문에 무림의 참상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다. 하오문도의 이름을 단 뒷골목 파락호나 왈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 미친.”
“지부장님에게 알려! 어서!!!!”
하오문도 중 하나가 몸을 돌려 골목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혈성에 취한 옥령은 자신의 위로 투둑 하며 떨어지는 핏방울들을 손가락으로 훑어 얼굴에 선을 그리며 웃었다.
“오호호호호홋!!!”
악마의 웃음소리 같은 옥령의 웃음소리에 김향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매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런 옥령을 쳐다봤다.
“도망가야 돼.”
만우의 곁에서 하도 많은 일을 겪었더니 이런 일로 당황하기 보다는 살아날 길을 찾을 정도로 대범해진 방매다. 거기다 방매는 내공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옥령의 무시무시한 혈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도 김향보다 나은 점 중에 하나였다.
“어서!!!”
“어, 언니…….”
“만우가 올 거야. 아니면 포졸들이나 궁에서라도 사람이 나오겠지.”
방매는 이를 악물었다. 딱 보아하니 옥령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변고를 눈치챈 누군가가 와줄 것이다. 지금 한양에는 방매가 아는 고수만 해도 열 명 정도는 되었으니까. 그러니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오, 옥령 언니에요.”
“나도 알아! 제 정신이 아니야. 눈이 돌아갔잖아. 그러니까 정신 차려. 네가 아는 옥령 언니가 아니야.”
방매는 김향을 억지로 일으켰다. 김향은 아직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혈성의 기운에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꺄하하하핫!!”
휙! 휙! 촤악! 촤악!! 끄아아악!!! 옥령이 깔깔거리며 하오문도들을 파리처럼 쳐 죽였다. 순식간에 하오문도들이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옥령은 하오문도들을 찢어 죽이듯이 잔혹하게 쳐 죽였다. 혈성에 취하면 계속해서 많은 피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휙! 순식간에 하오문도들을 도륙한 옥령의 눈은 가장 가까이 있는 방매와 김향에게로 향했다. 옥령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늘어뜨린 채 방매와 김향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옥령은 지금 이 순간이 재밌어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채였다.
“향아! 도망가!!”
방매가 김향을 뒤로 밀면서 앞으로 나섰다. 자신들이 도망쳐 봤자 옥령을 떨쳐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어, 언니!”
김향은 방매의 등을 쳐다봤다. 그리 넓지 않은 등이었다.
“언니가 왜, 언니가…….”
“한 명은 살아야지!”
방매는 이를 악물었다. 옥령이 하오문도들을 죽이는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 때문에 도망갈 시간조차 찾지 못하고 옥령의 표적이 되었다.
“내가 한양의 지리를 너보다 더 잘 아니까. 어서!”
방매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날렸다. 방매가 골목길로 뛰어 들어가자 옥령이 재밌다는 듯 히죽 웃었다. 고양이 앞에서 도망치려는 쥐를 보는 심정이랄까. 아직 죽이지 못한 이가 더 하나 있었지만, 옥령의 몸을 쓰는 혈성은 생각했다.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는, 살기 위해 도망이라도 가는 사람을 쫓아가서 죽이는 것이 더 피를 보는 맛이 있었다. 씨익 그렇게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도망가는 방매를 죽이는 것이 더 재밌을 것이라 판단한 옥령의 두 눈이 붉어졌다. 팟!!!! 옥령이 땅을 가볍게 박차서는 방매가 달려 나간 골목길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