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검주, 아니, 천하제일인(5)2021.06.22.
“그래, 막상 복수를 하니까 허전하고 그런 것 같은데. 내가 그럴 때 잡생각을 없애는 방법을 잘 알지.”
“어…… 아니! 이제 괜찮네. 난 괜찮아. 하하핫! 자네에게 고맙다고 말하니 힘이 솟…….”
텁 만우는 씩 웃으며 동군영의 아혈을 짚었다. 똑똑하긴 똑똑해서 만우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순식간에 눈치를 챈 것이다. 하지만 만우에게 그런 잔꾀는 일체 통하지 않았다. 만우는 망연자실한 눈을 한 동군영을 보면서 씩 웃었다.
“죽도록 구르면, 막 살고 싶은 생각이 나오기 마련이지. 마침 수련도 며칠 쉬었잖아?”
도리도리도리 만우의 말에 동군영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동군영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만우는 가차 없었다.
“잡히면 상단, 중단, 하단베기 각 백 번 씩 추가. 금각사로 돌아갈 때까지다? 뛰어.”
동군영이 울상을 한 채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 동군영은 상단과 중단, 하단 베기를 이천 번씩 총 육천 번을 하고는 동 틀 때가 돼서야 만우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
“간다.”
“조심히 가십시오. 이 속하는 대협이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기원하며…….”
“이건 너 쓰고.”
만우는 발끝으로 요시미츠가 보낸 보물들을 툭툭하고 쳤다. 타케노가 멈칫했다. 만우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열흘간 타케노는 만우의 머슴 생활을 대단히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어쩌면 그의 적성이 사무라이가 아니라 머슴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건 전부 타케노의 눈물겨운 노력 떄문이었다. 타케노는 만우한테 죽지 않고 살아남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몸에 축이 날 정도로 구르면서 만우의 머슴 노릇을 한 것이다.
“난 이런 거 필요 없어.”
“그, 그럼…….”
“아이고, 아이고. 저게 얼만데. 아이고오오.”
만우가 타고 갈 배, 적토선 안에서는 방매의 곡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만우가 저 재물들을 전부 일본국에 두고 간다고 했기 때문에, 아까워서 저러는 것이다. 하지만 저것들은 요시미츠가 만우에게 잘 보이겠다고 만우에게 바친 것이기 때문에 만우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아. 그리고 요시미츠한테 전해.”
“예, 예. 대협.”
타케노는 만우의 말에 반사적으로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태정대신인 요시미츠가 눈치를 보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만우다.
“명나라, 영락제인지 뭔지 하는 놈한테 전하라고 해.”
만우의 거침없는 말에 타케노의 입이 헤하고 벌어졌다. 무식한 사무라이라고 하지만, 영락제가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요시미츠의 수하에 있는 이상, 명나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덴노를 제치고 건륜제로부터 일본국왕이라는 왕위까지 하사받은 것이 요시미츠다. 그런데, 만우는 그런 명나라의 황제를 마치 길거리 삼류 파락호를 부르듯 불렀다.
“내, 이번 명나라의 선물은 잊지 않겠노라고.”
“명나라… 선물…… 예.”
“이해했지?”
“예!”
“똑바로 전해. 가서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나 다시 온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타케노는 혹시라도 만우가 진짜로 다시 돌아올까 봐 우렁차게 대답했다. 타케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간다. 이건 가져다 쓰고. 네 일삯이다. 밥값이랑 집값도 이거랑 퉁친다.”
“저, 정말로 그러면…….”
“검 아니면 필요 없어. 그런데 여긴 검을 안 쓰더라. 그 왜도는 마음에 안 들어. 약하잖아.”
만우는 혀를 쯧하고 찼다. 그리고는 바닥을 발바닥으로 밀어내며 날아올라서는 적토선 안으로 휙하고 사라졌다. 잠시 후, 붉은 적토선이 멀어졌다. 타케노는 적토선이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갔다!!!!!!”
타케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귀신 같은 만우가 드디어 갔다는 것이, 자신이 그 인고의 시간을 버텼다는 것이 눈물로 나온 것이다.
“으아아아아!!!”
타케노는 주변에서 쳐다보건 말건 소리를 질렀다. 신센조 삼만 사무라이의 수장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야만 만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센조의 수장이라는 자존심은, 만우 밑에서 살아남는 것에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타케노는 적토선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초절정인 타케노의 시야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토선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타케노는 미친놈처럼 환호를 내지르던 것을 멈췄다.
“살았다. 살았어. 살았다고.”
삼만의 사무라이들을 끌고 교토를 정리할 때만해도 세상을 손에 쥔 줄 알았다. 다이묘가 되어, 영주가 되어 더 이상 신분으로 손가락질을 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검주!!!!!!!”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난 타케노가 방방 뛰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데 그 때, 미친놈처럼 날뛰던 타케노의 신형이 우뚝하고 멈춰 섰다. 타케노에게만 들린 목소리 때문이었다.
[다 들려. 그리고 가서 본주가 전하라고 한 것이나 전할 것이지, 거기서 뭐하는 거야?]
만우의 목소리였다. 전음(傳音)이었다.
“으, 으헉!!!!!”
쿵! 타케노가 놀라 뒤로 쿵하고 넘어졌다. 누가 후려쳐도 특유의 균형감각으로 쉽게 넘어지지도 않는 초절정 고수가, 놀라서 제 발로 넘어진 것이다. 타케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서둘러 일어났다. 이러다 만우가 혹시, 진짜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만우가 떠났다는 기쁨은 나중에 누리기로 하고, 일단은 만우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열흘 동안 적성에 딱 들어맞은 머슴으로서의 본능이 살아난 타케노가 부리나케 요시미츠가 있는 곳을 향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
“보빙사는?”
“그 양반, 돌아간 지 오래지. 일찍도 물어보네.”
동군영의 핀잔에 만우가 피식하고 웃었다. 보빙사 여의손을 비롯한 조선의 사절단은 교토에서의 난리가 어느 정도 수습이 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토를 떴다. 그러면서 동군영을 챙겨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난리에 콱 죽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동군영에게 약점을 잡힌 여의손이었기 때문이다. 만우는 피식 웃었다. 동군영의 말대로, 교토에서 떠날 때 물어본 것도 아니고 조선에 다 도착해서야 보빙사와 사절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늦어도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부산포다!!!!”
여포의 오른팔이라는 가동이 크게 소리쳤다. 동군영을 비롯한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올 때도 그랬지만, 갈 때 역시 배 위에서 보내는 시간은 너무나도 길고 지루했기 때문이다. 적토선은 부산포에 접안하지 않았다. 대신 여포는 만우에게 작은 배를 내주었다. 명색이 해적인 여포였기 때문에, 한양의 관리라는 동군영이 해적의 배를 같이 타고 왔다는 것이 드러나 봤자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 내려. 다.”
임수미는 그 혼란의 와중에도, 기가 막히게 몸을 숨겼다가 안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가진 바 무공이 하나도 없어도, 임수미는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과 그 위험을 피해가는 데에는 차원이 다른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임수미는 이제 막 행인, 그러니까 기천의 초입에 도달했다. 무공에 아주 영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아주 미약하나마 내기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너.”
만우는 임수미에게 말했다. 임수미가 그 동안 존재감이 없어서 그렇지, 그녀는 무화(無花)라 불리는 신출귀몰한 하오문의 북경총지부장이다. 무려 하오문주의 딸인 것이다. 그런 임수미가, 왜에서 검주 만우가 일패 혈세천마를 압도했고 격살했음을 알았다. 카더라가 아니라, 직접 두 눈으로 본 것이다. 이걸 임수미가 중원에 돌아가면 어떻게 이용해 먹을지, 만우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명예호법. 괜히 받았나?’
만우는 지금에서야 뒤늦은 후회를 했다.
“입조심해. 쓸데없는 정보 팔고 다니지 말고.”
만우가 으름장을 놨지만 임수미는 그런 만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혹적인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고는 부산포에 내려 하오문에서 마중을 나온 수하들과 함께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어쨌거나 행인의 단계에 올랐으니, 기초를 쌓을 때까지 도와준다는 만우와의 계약은 이로써 끝이 난 것이다. 거기서 더 오를 수 있을지 말지는 이제 온전히 그녀의 노력과 재능에 달린 일이다.
“아니. 근데 너네는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만우가 부산포에 내려 오랜만에 조선말로 시끌시끌한 부둣가를 걷다가 신경질 난다는 듯 뒤를 휙하고 돌아봤다.
그곳에는, 만우를 쫄래쫄래 따라오던 주창과 투귀대의 고수들이 먼 바다를 쳐다보면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아, 왜 따라오냐고!!!!”
만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장기간 항해로 인해 피로가 쌓였기 때문에 만우와 동군영, 그리고 나머지 일행들은 적당한 주막에 짐을 풀었다. 그냥 단순한 주막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규모가 컸다. 아무래도 부산포가 있었고, 왜인들과 상인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사정이 넉넉한 상단의 행수라면 기생집을 찾아가겠지만, 돈이 없는 많은 나그네들에게는 주막이 최고의 휴식처다. 방이 열 개가 넘었고 마소(馬牛)나 당나귀를 관리해주는 마구간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막의 주인은 만우 일행과 투귀대 고수들을 귀빈 모시듯 맞이했다. 상행이 없을 때 이런 단체 손님을 받는 건 주인에게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엉덩이 한 번 붙이지도 않고 어디를 또 가시려고. 나리.”
동군영은 주막에 짐만 내려놓고 곧바로 방에서 나왔다. 그게 만우의 눈에 마침 딱 뜨인 것이다. 동군영은 피로함이 역력한 얼굴로 처연하게 웃었다.
“나라의 녹봉을 먹고 사는 관리이니, 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그 할 일이 뭔데.”
만우는 귓구멍을 후비적거렸다. 관리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만우가 알 리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장계를 올리기 위해 필요한 지필묵과, 인편을 요청하기 위해 관아로 가야하네.”
“관아로?”
“그렇네.”
장계라 함은 왕명을 받고 외지에 나가있는 신하가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거나 청할 때 올리는 일종의 보고서다. 이 성실한 관리는 한양으로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동래에 도착하자마자 임금에게 올릴 장계를 쓰러 나온 것이다.
“그 시간에 검이나 휘두르지.”
움찔 만우가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성실하게 관리로서 일할 시간에,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도 동군영은 할 말이 없었다. 동군영 스스로는 검을 늦게 쥐었음에도 이제 제법 휘두를 줄 알게 되었다고 자만하고 있었으나, 만우는 동군영에게 아주 눈곱만큼의 재능도 없다며 신랄하게 비판을 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다고 하더라도, 꼭 검을 늦게 쥐었다고 해서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이라면 태어나자마자 검을 잡으면 아마 그 사람이 천하제일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 난 무관이 아니라 문관이네 문관. 장수가 아니라.”
“아니, 그러다가 왕이 또 감찰 나리 밖으로 돌리면 어떻게 하려고.”
“으, 으음…….”
만우의 말에 동군영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 했다. 임금이 그러지 않는다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군영이 세운 공(功)은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을 때보다 어사가 되었을 때가 훨씬 더 많았다. 말 그대로 두각을 드러낸 것이다.
“자네 때문이지 않은가. 만우 자네가 없었다면 그게 불가능했다는 것을 주상전하께서도 알고 계실 것이네.”
“음. 그건 그렇지? 내가 좀 잘났어?”
음화화화하고 만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동군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동래관아로 향했다.
“내 말은, 쉬면서 하라는 거지. 하루 정도 늦게 장계를 올린다고 해서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만우와 함께 있는 것을 왕이 아는데. 만우는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하지만 동군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차일피일 미루다가 나태해지고 게을러지는 것이네. 할 일이 생겼으면 바로바로 해야지.”
“그냥 하루 넘어갈 배짱이 없는 게 아니라?”
뜨끔. 동군영의 어깨를 움찔거렸다. 만우는 피식하고 웃었다. 동군영의 소심증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그의 성실함은 그가 소심하기 때문이다. 일을 뒤로 미루지 않는 것도, 그가 원체 소심해 걱정을 찾아서 하기 때문이었다. 혹시 미리 하지 않았다가 못 할 일이 내일 생기는 것이 두려워 성실하게 그날 그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아니, 관직 일은 그렇게 하면서 검은 왜 그래?”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뭐, 황제 자리도 자기가 싫다고 하면 강제로 황제를 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검 역시도 그랬다. 자신이 배우고자 열의를 가지고 임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동군영에게 검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러니 고생은 무진장하는 것 같은데, 재능은 정말 만우가 중원과 조선을 통틀어 지금껏 봐온 이들 중 최악이었다. 최악. 중원에 만일 만우가 개파(開派)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 것이다. 무림십좌의 끝자락이라고는 하나 만우는 알려진 무림의 딱 열 명 밖에 되지 않는 화경의 고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우의 가르침 하나를 받기 위해, 그게 간절해서 모여들 사람이 수백, 수천은 될 것이다. 그런데 동군영에게는 그런 만우의 검이 백약이 무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맞지 않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어디서 칼 맞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시켜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