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검주, 아니, 천하제일인(3)2021.06.15.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찾으셨습니까?”
특별한 회의가 잡혀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있는 회의가 아니면 무림맹의 간부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한다. 무림맹주인 천혜대사 역시 마찬가지다. 자애로운 표정을 한 그는 무왕(武王)으로, 이왕 중 한 명이었다.
“혈세천마. 혈세천마가 죽었습니다.”
“……혈세천마?”
천혜대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폭탄이 될 수 있는 정보를 가져온 제갈명공을 쳐다봤다. 제갈명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일본국으로 간 혈세천마가 죽었다 합니다.”
“그렇다면 혈세천마는…….”
천혜대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살폈다. 무왕이라 불리는 천혜대사지만, 맹주인 그도 혈세천마에게는 한 수 접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혈세천마를 격살할 수 있는 사람은 당장 천혜대사의 머릿속에 떠오르기로는 한 명밖에 없었다.
“검주에게 죽은 것이오?”
검주(劍主) 만우. 모든 무림인의 머릿속에 화인처럼 박혀 있는 한 사람의 이름. 명성이 높을수록, 제 무공과 강함에 대해 자부심이 많은 무인일수록 검주란 두 자의 이름은 절대로 풀 수 없는 족쇄와도 같았다.
“예.”
제갈명공은 담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천혜대사는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천혜대사는 허탈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아미타불. 그랬구려. 결국은 검주 시주가 마교주와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인 것이구려.”
어떤 식으로 둘 사이에서 결투가 오고 간 것까지는 전서에 쓰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혈세천마는 검주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무림을 주름 잡은 마교의 절대자인 혈세천마가, 아직 이립도 되지 않은 검주에게 패해 죽은 것이다.
“아미타불…….”
천혜대사는 불호를 읊었다. 혈세천마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만우에 의해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 진정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수행이 부족하구나.’
부처님의 손발이 되어 중생을 구도하겠다며 수십 년을 수행에 정진한 천혜대사는 속으로 씁쓸하게 자조했다. 공명심. 그리고 두려움. 만우에 대해 드는 이런 복합적인 감정이 천혜대사의 머릿속을 크게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맹주님.”
천혜대사의 현재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갈명공은 달뜬 얼굴로 천혜대사에게 말했다. 허여멀건한 제갈명공의 얼굴에 흥분이 들어차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라니, 무슨 소립니까. 천안각주.”
하지만 천혜대사는 그런 제갈명공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갈명공의 지모는 천혜대사도 인정한 바가 있었다. 제갈세가에서 탄생한 수없이 많은 천재들 중에서도, 제갈명공의 지모는 특출났다. 제갈세가의 시조인 무후(武侯:제갈공명)의 재림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이니 오죽할까.
“간악한 마(魔)의 종자들을 몰아내고, 의(義)와 협(俠)을 바로 세울 때가 아니겠습니까.”
“천안각주.”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습니다, 맹주님. 혈세천마가 죽어 구심점을 잃은 마교의 간악한 종자들을 쳐내고, 무림맹의 기치를 바로 세울 때 입니다.”
“…….”
“이때가 아니면, 차후에 다시 결집한 마교의 종자들이 무림일통을 하겠다며 혈해를 이루는 것을 보고자 하심입니까?”
“아미타불……”
천혜대사는 늘 한 손에 들고 다니는 묵주 알을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하나씩 더듬었다. 제갈명공의 말은 과격했지만, 일리가 있다는 것을 천혜대사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正)과 마(魔). 이 둘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마(魔)는 항상 호시탐탐 중원으로 나오기 위해 빈틈을 노리는 승냥이떼 같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림에 나오면, 항상 무림에는 피의 강이 흘렀다. 그러니, 제갈명공의 말대로 마(魔)의 구심점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마의 뿌리를 뽑을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미래의 비극을 막기 위해,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부처시여.’
천혜대사는 불호를 읊으면서 부처님을 찾았다. 하지만 부처님은 절대로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불교에서 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끊임없는 돈오(頓悟)를 통한 성불이고 각성이다. 답은, 스스로 수행하고 관조하며 찾아야 하는 법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천혜대사지만, 그가 자신도 모르게 부처를 찾을 정도로 제갈명공의 말에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방주, 그리고 오대세가의 세가주들을 소집하시지요. 또한 무림의 명숙들을 불러 모으십시오. 그리고.”
제갈명공의 두 눈이 번뜩였다.
“무림의 미래를 논할 무림대회의를 개최하셔야 합니다.”
“무림대회의!”
천혜대사의 눈이 커졌다. 무림대회의(武林大會議). 무림대회의란 무림맹의 중차대한 결정이 필요할 때 개최하는 회의로, 무림 정도 전체가 나아갈 방향을 정해야 할 때 열리는 전체 회의였다. 무림대회의가 공표가 되면 무림맹에 속한 모든 문파와 방파, 세가와 무림의 명숙들, 그리고 무림맹에서 일정 직급 이상의 모든 사람들이 참석해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결과에는, 모두가 승복을 하고 무조건 따라야만 한다. 건륜제를 폐하고 영락제를 따르기로 한 것도 이 무림대회의를 통해 나온 결과 중 하나다.
“무림대회의를 개최하시어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셔야 합니다. 지금, 마교는 유례없이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혈세천마가 진혼대와 천마대를 데려갔다고 하지 않았소?”
천혜대사의 눈이 커졌다. 제갈명공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혈세천마와 곡왕 부고야, 마존 남요명. 전부 일본국에서 죽었습니다.”
“허, 허어…….”
한 명만 무림에 출도해도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 절세고수들이 전부 일본국에서 만우에 의해 죽었다. 천혜대사는 뒷목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만약 검주. 그 자가 다시 무림으로 돌아온다면 어찌 되겠소?”
“…….”
제갈명공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아미타불. 만약에, 만약에…… 그 마교 종자들이 혈세천마를 격살한 검주 만우를 자신들의 교주로 옹립한다면…….”
천혜대사의 말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니었다. 천마신교의 가장 우선시 되는 율법 중에 하나가 강자존이란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마교에서는 항시 새로운 교주가 등극을 했다는 소리는 새로운 교주가 전대 교주를 죽이고 그 자리에 올랐다는 뜻이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어찌하여?”
“정의대의 매화극검이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마교와 검주의 사이는 지극히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이가 좋지 않다?”
“검주가 어떤 연유로 혈세천마가 부르는 일본국까지 제 발로 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에서 일본국까지 갈 정도면 보통 악연은 아니겠구려. 아미타불.”
“예.”
제갈명공에게 만우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고 있는 무림맹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찾아다니면서 꺾고 다닌 것이 만우다. 물론 만우는 정과 사, 마를 가리지 않았지만 기세란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걸 꺾고 다니는 만우가 제갈명공의 눈에 좋게 보일리가 없다.
“그리고, 검주의 성격상 조선으로 돌아간다 하였으니 다시 발을 들이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소. 검주…… 그자는…….”
“…….”
천혜대사의 말에 서린 두려움을 읽어낸 제갈명공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단순한 사주(四主)가 아니니. 혈세천마와 곡왕, 마존까지 꺾었다면 그자는…….”
천혜대사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 끝까지 말하지 못 했다. 그러기에는 천혜대사가 하려던 말의 무게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동이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만우를 깎아내리고, 어느 문파에도 속하지 않은 출신과 배경을 빌미로 그를 낭인이라 낮잡아 부르며 무위를 깎아내린 것이 바로 중원의 무림인이다. 그런데, 그렇게 부정했던 만우를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으로 인정한다?
“무림에서 은퇴를 한 검주에게 그런 무거운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맹주님의 뜻을 받들어 검주에게 선물과 함께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오.”
만약 만우가 다시 무림에 출도하는 날이 온다면, 무림맹은 그런 만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적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아미타불.”
“예.”
적이 되지 않는 선 정도. 그게 천혜대사와 제갈명공이 합의한 선이었다. 천혜대사는 목을 가다듬고 제갈명공에게 말했다.
“무림첩을 돌리시오. 무림대회의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개최한 뒤 의견을 규합하겠소. 그리하여…….”
천혜대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부처의 중생으로 살계(殺戒)를 연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혜대사는 이를 악물고 말을 내뱉었다.
“멸마정전(滅魔正戰)의 가부 여부를 결정하겠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맹주님!!!!”
제갈명공이 뛸듯이 기뻐했다. 천혜대사는 불안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고는 불호를 읊었다. *****
“쟨 그렇다 쳐.”
만우가 손가락으로 여포를 가리켰다. 여포는 어깨를 으쓱했다. 비록 투귀대랑 붙어먹기는 했어도, 만우의 일행을 도와주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여포를 데려온 것이 동군영이었다. 만우는 그런 여포를 지나쳐 손가락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돌렸다. 아니, 만우에게 저들은 사람이 아니라 거머리들이었다.
“너넨 왜 안 가냐?”
만우의 손가락이 투귀대의 고수들을 가리켰다. 위문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위문을 비롯한 다른 투귀대의 고수들도 자신들이 검주와 동행을 할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 했다. 검주 때문에 기무와 테무르가 죽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닌 투귀대의 고수들이나, 그들은 역사가 이뤄지는 그 현장에 있었다. 혈세천마. 투귀대를 반역자로 몰아간 자신들의 교주이자, 그들이 주군으로 모시기로 맹세한 주창,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한 비정한 아비. 동시에 무림십좌 중 최강자인 일패(一覇)인 그를 검주가 격살했다. 그 둘 사이의 결전이 치열하고 막상막하였냐?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만우의 표정 어디에서도 그가 내상을 입거나 중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사주 중 일인에 불과한 검주가 최강자인 일패 혈세천마를 격살하고도 상처 하나 입지 않은 것이다.
“너네 있으니까 자꾸만 쟤가 안달을 내잖아.”
만우는 귀찮다는 듯 손가락으로 호선을 가리켰다. 호선의 본모습을 아는 투귀대 고수들, 그 중에서도 특히 옥령이 움찔했다. 하지만 만우가 가리킨 순간 움찔한 것은 호선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호선의 탐스러운 머리카락 안으로는 머리에 혹이 여러 개가 돋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주(仙珠). 반선(半仙)의 경지에 올라 등선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추락해 낙선(落仙)이 된 호선은 그 과정에서 오백년 수행의 증거로 선기를 모아놓은 선주를 잃어버렸다. 그 선주는 영물인 호선이 긴 시간을 수행에 매진했다는 증거물이자 오백년 영물로서의 대부분의 힘이 담긴 보주였다. 그것이 없는 호선은 초절정 고수와 동수를 이루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호선의 진정한 힘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오백년이란 세월을 괜히 보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만우를 쫓아다니면서 자신의 진정한 힘에 대한 갈망이 커진 호선은 옥령을 볼 때마다 그 혈성을 취하고자 하는 욕구를 억누르지 못 해 매번 만우에게 딱밤을 얻어맞았다. 옥령이 가진 혈성(血星)은 엄청난 악업의 정수이자, 그것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호선이 떨어지면서 잃었던 선주를 대체해줄 수 있는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우으…….”
호선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옥령을 쳐다봤다. 안 그래도 교태가 철철 넘쳐흐르는 호선의 눈물은 남자들의 마음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호선은 차마 옥령에게 더 이상 그런 마음을 품을 수가 없었다. 호선이 눈이 한 번씩 돌 때마다 날아든 만우의 딱밤 때문이다.
‘말이 딱밤이지. 두개골이 쪼개지는 줄 알았는데.’
분명 만우는 검지와 엄지만을 이용해 손가락을 튕겼다. 하지만 그 딱밤이 호선의 두개골에 남긴 충격은 절대로 보통의 딱밤이 아니었다. 맞는 순간 골이 쪼개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통증과 함께 눈앞이 하얘지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가 다음날에나 깨어났기 때문이다. 그게 계속해서 이어지다보니, 이제는 세상을 이롭게 할 영물로서 가져야 할 본능보다 만우의 딱밤이 더 무서워져 눈깔이 홱 돌아 버리는 현상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걸 학습능력이라 불러야할지는 더 의논해봐야겠지만 결국 매로 행동을 수정한 셈이다.
“그, 그건 제 잘못이…….”
옥령이 억울하다는 듯 말을 하려 했지만 만우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네 잘못이야. 네 존재 자체만으로도 본주가 귀찮게 느끼면, 그건 네 잘못이야. 그러니까 안 가냐고.”
만우는 도끼눈을 떴다. 그러자 투귀대의 고수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들은 만우의 말에 알겠다하고 일어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