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4)2021.06.05.
“……아무래도.”
보빙사, 사신은 그 나라의 얼굴이다. 그런데, 만우와 동군영이 그 사신을 일본국에 버려놓고 복귀를 한다? 아무리 만우와 동군영의 편의를 봐주는 임금이라고 해도 그 일에서만큼은 동군영에게 처벌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조선과 왜의 외교가 악화될 것이다. 전쟁 중이라도 사신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데, 요시미츠와 덴노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지면 보빙사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모도 아니고. 돌볼 사람이 많네. 참.”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그 전에 만우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다. 만우는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부르르!!! 그러자 만우의 허리춤에서 이룡검이 부르르 떨면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기예에 투귀대 고수들의 눈이 커졌다.
‘이기어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손으로 쥐고 휘두르는 것과 똑같이 검을 휘두를 수 있다는, 전설 속에나 나오는 줄 알았던 이기어검. 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만우는 현경 초입이고, 이기어검을 다루기 위해서는 완숙한 현경에 이르러야 한다. 그리고 현경의 극에 달하면 심검을 깨우칠 것이다. 그냥 허공섭물로 검을 들어 올린 것뿐이다.
“다 같이 가자. 금각사로. 저기가 쉬기 좋더라고.”
“…….”
“…….”
방금 저 앞에서 혈세천마를 결딴내 놓고 쉬러 가자는 곳이 금각사라니. 만우의 말에 다들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사 나리. 군대는 걱정하지 말고.”
“아니, 어떻게, 군대인데…….”
“타케노. 그놈이 없잖아.”
“……아.”
조선에서 일본국까지 동행한 타케노. 그 야심 많은 놈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거느린 사무라이가 무려 3만이라고 했다.
“호선. 넌 쟤 좀 그만 노려. 그러다 눈 뽑히겠다. 눈 뽑히겠어.”
만우는 그렇게 호선에게도 한 마디를 한 후,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슌스케는?”
“……어?”
“엉?”
문형일과 동군영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어소에서 난리가 난 직후에는 근처에 있던 슌스케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신경 좀 써줘라. 걔한테도.”
만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금각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만우의 뒤를 투귀대 고수들과 만우 일행이 한꺼번에 따르는 묘한 구도가 형성됐다. *****
“오야붕!!!! 크흑…….”
슌스케는 두 눈이 발갛게 변한 채, 자신 앞에 오체투지를 한 사무라이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여기저기 지워지지 않은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난 자신의 수하였다. 일월조. 조선에서의 임무를 실패한 슌스케의 일월조는 갈가리 찢겨 공중으로 와해가 되었고, 그곳에 속해 있던 슌스케의 수하들과 그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말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지, 이런 난세에 울타리를 잃고 내쫓겨 났다는 것은 죽었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았다.
“곤조. 어떻게 네가 여기에…….”
“칼잡이가 먹고 사려면 이 방법 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어느 쪽이냐. 요시미츠? 덴노?”
수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슌스케가 동군영 옆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것은, 격전을 벌이는 어소의 연회장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곤조의 목을 수리검으로 찌르려고 한 닌자를 수리검과 함께 통째로 일도양단을 한 슌스케를 본 곤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슌스케는 그곳에서 거하게 칼춤을 한 번 추었다. 그렇게 슌스케가 칼춤을 얼마간이나 췄을까, 주변에 무수히 흐르는 닌자와 사무라이들의 피를 뒤로한 채 덴노가 부리는 닌자와 사무라이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슌스케는 그렇게 어수선한 틈에 곤조와 함께 빠져나온 것이다. 동군영의 곁에는 문형일이 있으니.
“덴노 쪽입니다.”
“하필이면 골라도.”
슌스케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무라이들 중 주군을 모시고 있는 이들은 극소수다. 나머지는 곤조처럼 주인을 잃고 떠돌면서 낭인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낭인에게 패배는 더욱 가혹한 법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곤조는 슌스케를 보면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는 영락없이 오야붕께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슌스케의 허전힌 소맷자락을 본 곤조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슌스케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다른 놈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다들…….”
말을 해서 무엇할까. 슌스케는 곤조의 침묵에서 많은 것을 들었다. 슌스케는 손을 뻗어 그런 곤조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야붕께서는 어찌 지내셨습니까. 그 옷은…… 이번에 조선에서 들어온 것입니까?”
슌스케가 입고 있는 옷이 조선의 보빙사의 수행원들이 입었던 창의란 것을 알아채고는 곤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그렇다면 이번에 아예…….”
“그건 잘 모르겠다.”
슌스케는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만우지만, 만우에게 얻은 것이 참 많았다. 아니, 그런 강자를 몰라보고 덤볐다가 살아남은 것 자체가 강자의 자비였고 은혜였다. 거기에 슌스케는 자신의 양 팔이 멀쩡할 때보다 외팔이인 지금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했다. 그러니, 과연 그런 만우를 두고 자신이 이곳에 남을 수 있을까.
“그러시면……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다. 그 역시도 정하지 못 하였다.”
슌스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변이 시끌거리며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교토 내의 양민들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여기저기서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겁을 집어먹고 흐느끼는 자식들의 입을 틀어막는 부모들이 느껴졌다. 저들에게는 이런 권력 싸움이 마치 태풍이나 홍수 같은 재난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 그냥 가만히 지나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금각사로…… 흠.”
슌스케가 신음을 흘렸다. 문형일이 지키고 있는 동군영은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창의를 입고 있으니 사무라이들이나 닌자들이 자신을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곤조였다.
“어쩐다.”
슌스케는 턱을 쓰다듬었다. 하필이면 곤조가 요시미츠가 아니라 덴노 측에 섰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덴노 측이 패퇴한 지금, 요시미츠의 수하들이 곤조를 보면 분명 곤조를 죽이려 들 것이다. 금각사부터 어소까지는 꽤 거리가 떨어져 있고, 그곳에 깔릴 요시미츠의 수하들을 상대하면서 곤조를 데리고 금각사까지 가는 것은 슌스케에게도 무리였다.
“일단 움직이자.”
그렇다면 최대한 피해가는 수밖에 없었다. 슌스케는 곤조를 끌고 교토 안으로 스며들었다. 금각사로 가기 위해서는 이런 뒷골목을 잘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요리조리 뒷골목을 이용해 최대한 눈에 뜨이지 않고 빠져나가던 슌스케가 갑자기 우뚝하고 멈춰 섰다. 그리고 그런 슌스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곤조.”
“예, 오야붕.”
곤조는 일월조에서도 하급에 속하는 실력이었다. 그러니 조선에 함께 따라가지 못 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슌스케가 느끼는 것을 곤조는 느끼지 못 하고 있었다. 슌스케는 자신들이 누군가의 함정에 제 발로 들어왔음을 느끼고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결국 조용히 빠져나가기는 그른 것인가.”
함정이라고는 하지만 슌스케가 뚫어내기에 대단한 실력을 지닌 이들은 아니다. 하지만, 슌스케는 기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양민들이 모두 문을 닫고 숨어들어 텅 빈 거리에, 검을 찬 이들이 쫙 깔렸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은 모두 사무라이들이었다. 사무라이 특유의 난폭한 기세와 짙은 피 냄새가 느껴졌다.
“곤조! 뒤에 바짝 따라붙어라! 네 목숨을 장담할 수 없으니!”
“예. 예 오야붕!!!!”
곤조가 바짝 긴장한 기색으로 왜도를 들어 올렸다. 슌스케는 만우가 수도 없이 시킨 마보를 밟았다. 동시에, 허리춤에 올라가 있던 슌스케의 외팔이 왜도의 도병을 말아 쥐었다.
쓰걱-!!!!! 슌스케의 도갑의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와 함께 뇌전이 떨어지는 것처럼 번쩍하는 빛이 나더니, 슌스케가 땅을 박차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오, 오야붕! 같이 가요!!!!”
곤조가 슌스케와 자신의 머리 위로 혈우(血雨)가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기겁해서는 슌스케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털썩, 털썩, 털썩. 그런 곤조 뒤로 슌스케의 일도에 의해 몸이 두동강이 난 사무라이들이 피를 뿜어내면서 털썩 땅바닥에 처박혔다. *****
“저걸 기억하고 있었는가?”
동군영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한심한 표정으로 동군영을 쳐다봤다.
“그걸 잊고 있었던 어사 나리가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켄 타케노는 툭하면 자신이 삼만 사무라이의 수장이라면서 난체도 그런 난체가 없었다. 그러니 그걸 동군영이 잊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만우에게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어. 벌써 성문까지 점령했군.”
“하켄 타케노란 놈이 싸움 실력은 별로여도, 전쟁을 많이 했다고 했으니까.”
초절정의 고수를 놓고 ‘별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지만, 실력은 상대적인 것이다. 어쨌거나 타케노가 끌고 나온 3만의 사무라이는 빠르게 교토성의 성문을 점령했다. 밖에서 덴노의 군세가 호코슈를 패퇴시켰다는 것을 들은 것이다.
“어쨌거나 그놈, 원하는 대로 어디 한 자리 차지하겠는데.”
타케노란 놈은 야심으로 가득 찬 놈이었다. 3만이나 되는 사무라이를 끌고 다니는 것 자체가 자신만의 세력에 대한 야망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지금, 놈은 기회를 잡았다.
“그러니까, 여기 있으면 되는 거야. 요시미츠 그 놈이 이길 테니까.”
타케노는 요시미츠의 심복이다. 그러니 결국 덴노와 요시미츠 간의 내전은 요시미츠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되는 셈이다.
“그 타케노란 왜인이 요시미츠를 사로잡는다면…….”
“그건 불가능해.”
마일의 새로운 견해에 만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요시미츠란 놈이 거느리고 있는 오로치라는 놈들. 그 놈들을 타케노는 당해낼 수가 없거든.”
타케노라면 요시미츠의 오로치도 알고 있을 것이다. 더불어 오로치를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것도. 타케노란 놈은 되지 않는 싸움에는 자신의 것을 거는 성격이 아니다. 지금도 확실히 자신의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무라이들을 끌고 나선 것이지, 아니었다면 절대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포.”
만우는 금각사 3층에서 교토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돌려 여포를 쳐다봤다.
“그 인삼. 저 놈이 가져갔으니까 알아서 털어먹어. 이제 부자 될 놈이니까.”
“흐으. 그러도록 하지.”
여포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는 투귀대 고수들이 한 곳만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피식 웃었다. 그들은 모두 주창이 자신의 아버지인 혈세천마의 무덤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창은 내공을 일체 쓰지 않고, 검과 손을 이용해 금각사의 정원에 묫자리로 쓰일 땅을 파고 있었다. 나름 자신의 아버지였던 혈세천마에게 차리는 마지막 예인 것이다. 만우는 죽상을 한 투귀대 고수들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주 혈세천마 따라서들 묫자리에 들어가겠어. 본주가 너희들 대신 싸워주기까지 했는데 말이야.”
만우는 턱을 쓰다듬었다. 과연 자신이 없었다면, 그래서 주창과 혈세천마가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궁금하긴 하네.”
혈세천마의 내공은 주창보다 훨씬 더 많다. 하지만 무림인이 가져야 할 ‘싸워 이기려는 열의’는 주창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내공과 의지의 싸움이라.
“힘들었으려나?”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만우의 시선이 교토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만우가 한숨을 나지막하게 내쉬었다.
“쟨 왜 또 저기서 저러고 있냐, 하아.”
금각사에서 그곳이 보이는 사람은 만우밖에 없었다. 심지어 여포나 척사영의 눈에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만우가 금각사의 뻥 뚫린 벽에 발을 얹고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잘 좀 챙겨오라고 말했지.”
만우는 문형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형일이 움찔했다. 저 아래서 연신 울려 퍼지는 굉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만우의 말을 듣고 나니 감이 잡혔기 때문이다.
“설마… 슌스케가…….”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팟!
[갔다 와서 좀 보자. 형일아.]
“대, 대장님!”
문형일이 뒤늦게 손을 뻗어봤지만 이미 만우는 사라진 뒤였다. 문형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