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천외천(天外天)(3)2021.04.20.
“뭐, 그놈들이 놀 준비는 다 된 것 같은데.”
“예? 이곳에 진혼대가 있다는…….”
“응. 잠깐만 기다려 봐. 기왕이면 한 방에 때려잡아야지.”
만우의 말에 문형일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교의 진혼대라면 음공으로 화경에 오른 곡왕 부고야의 직속부대로 전원이 음공의 고수들로 이뤄진 곳이었다. 그 수는 500에 불과했지만 음공의 특성상 다수를 상대하는데 특화되어 있어 500의 진혼대가 곤륜을 봉문시킨 적도 있을 정도였다.
“대장님. 혹시 음공의 고수를 상대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음공? 음…….”
만우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딱히 음공의 고수라고 자신을 칭하는 놈과 싸워본 적이 없었다. 음공이란 그만큼 익히기가 힘들고, 막대한 내공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음공을 익힌 자들 중 고수라 불릴 만한 이들이 지극히 소수이기 때문이다.
“없는데?”
만우는 해맑게 웃으며 문형일에게 말했다. 그러자 문형일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어, 없으시다구요?”
“어. 없어.”
“그, 그러면 어떻게 대처하는지는…….”
“대처?”
만우는 히죽 웃었다.
“소리가 들리면, 소리가 난 곳에 가서 소리를 낸 놈을 쳐죽이면 되지.”
단순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우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그 사이에 일어날 피해는 어찌한단 말인가.
“대, 대장님!”
“자. 저기 들어온다.”
만우가 손을 들어 어전 뒤쪽에서 줄지어 우르르 뛰어나오는 아리따운 무희들을 가리켰다. 붉은 복면과 반투명한 붉은 장삼을 걸친 무희 수십 명이 악공의 음률에 맞춰 뛰어나왔다.
“무희?”
“동구녕. 정신 빼지 말고 눈 제대로 뜨고 있어. 저기 확 홀려서 막 기어나가도 우린 모른다?”
만우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악공들이 연주하던 음률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만우와 두 고수의 눈이 번뜩였다. ***** 번쩍!!!! 두 눈을 감은 채 운기조식을 하고 있던 척사영의 두 눈에서 기광이 치솟아 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이후 척사영은 일어나 여기저기 팔다리를 돌려본 뒤, 허리춤에서 검과 도를 뽑아 들었다. 촤앙!!!! 항상 존재 자체만으로도 척사영에게 친한 친구처럼, 든든한 동료처럼 느껴졌던 검과 도가 무겁게 느껴졌다. 여포에게 패배를 한 다음부터였다.
“심마.”
척사영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은 일종의 심마(心魔)였다. 여포에게 전력을 다해 부딪쳤으나, 미치지 못해 처절하게 패하고 난 다음부터 그녀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든 의심이라는 이름의 심마였다.
‘난 제대로 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인가.’
조선에도 몇 없다는 화경의 고수이자, 곡산척가의 기둥이 되어야 할 운명을 타고난 것이 바로 그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남정네들을 월등하게 뛰어넘는 눈부신 재능으로 가문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곡산검법. 그리고 곡산도법. 둘 다 곡산척가의 시조인 고려무장 척준경이 창안해 낸 무예로 단순한 이름에 비해 익히기가 까다롭기 그지없어 곡산검법이나 곡산도법을 익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과에서 가산점을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두 가르침을 한 몸에 담은 것이 바로 척사영이다.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무(武)에 대한 재능. 그런데, 그런 그녀가 전력을 다해 부딪쳤음에도 동년배로 보이는 여포에게 패배했다. 그것도 아쉽게 패배한 것이 아니라 무참히.
‘다음에는 이길 수 있다.’
척사영은 검과 도를 쥐고는 곡산검법과 곡산도법을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무수히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겠노라 다짐했지만, 가슴 속에 한 번 핀 의심이란 싹은 쉽게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자라났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의심. 자신의 경지에 대한 의심. 자신의 무예에 대한 의심. 콰가가가각!!!!! 그녀의 주변으로 무수히 많은 검흔과 도흔이 새겨졌다. 파괴적이었지만, 이런 흔적은 그녀의 마음에 균열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후욱.”
아직 완전하게 다 낫지 않은 단전에서 은은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녀가 입었던 부상은 꽤 컸기 때문에 일주일로는 다 낫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나마 만우의 진기도인과 호선의 도술이 없었다면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 했을 것이다.
“으아아아. 전각이 흔들렸어.”
“언니. 괜찮아요?”
“으아아아.”
척사영이 쓰게 웃었다. 자신의 손에 힘이 과하게 들어간 덕분에 그 여파가 방매와 향이가 느낄 정도의 충격으로 전해진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호선이 펑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축지법과 둔갑술을 섞어 쓴 것이다.
“사악한 기운을 풍겨대는 이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이쪽으로?”
호선의 다급한 목소리에 척사영이 서둘러 달려갔다. 하지만 척사영은 적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나무 같은 곳으로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찌릿찌릿!
“……적이다!!!”
척사영의 경고성에 감령과 필두가 뛰어나왔다. 그 둘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마기를 느낀 듯,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이었다.
“마교!”
감령과 필두는 동시에 소리쳤다. 척사영은 마교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러면 은공은?”
“……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속은 것 같수다. 척 무사. 일단 살 방도부터 찾아봅시다! 방매!!! 향아! 한곳으로 모여!!!!”
감령이 큰 소리를 치며 방매와 김향에게도 변고를 알렸다. 척사영은 피부를 저리게 할 정도의 생소한 기운, 마기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호선! 당신은 이곳을 빠져나가 은공에게 변고를 알리시오. 이곳은…….”
척사영이 호선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검과 도를 빼 들었다.
“내가 어떻게든 지켜보겠소.”
두 번 패할 생각은 없었다. 기세를 가다듬은 척사영의 두 눈이 굳건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다녀오십시오, 두목!”
“몸 조심하십시오.”
가동과 사임의 배웅을 받으며 여포는 선창에서 떠나 전력으로 경공을 발휘해 교토로 향했다. 만우의 부탁으로, 일을 하기 위해 가면서도 여포는 한 줄기 기대를 품었다.
‘옥 소저.’
옥령. 여포의 마음을 한순간에 앗아간 그 여인을 교토에서 우연히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기대를 품고 간 것이다.
‘만약 우연에라도 만나게 된다면.’
교토는 한양, 동래만큼이나 큰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고자 하는 누군가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 때문에 여포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다시 놓치지 않으리라.”
여포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여포의 몸속에서 들끓는 내공이 용천혈을 통해 여포의 몸을 쭉쭉 앞으로 밀어냈다.
“음?”
그렇게 쭉쭉 앞으로 나아가던 여포의 신형이 허공에서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덜컥하고 굳더니 여포의 몸이 아래로 뚝하고 떨어져 내렸다. 천근추의 수법으로 달려 나가던 관성을 죽인 여포가 나뭇가지 위에 부드럽게 착지해 앉았다. 출렁. 여포의 건장한 몸을 여린 나뭇가지 하나가 버텨내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단지, 구경꾼이 없다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었다. 그런 여포의 눈에 몇 명의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박차면서 새처럼 날아가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여포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밝은 웃음을 지은 여포의 입술이 달싹였다.
“아무래도 나와 그대, 운명인가 보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새인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지만, 여포의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경장차림을 한 옥령이 투귀대의 고수들과 함께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것을.
“그러니, 이번에는 그대롤 놓치지 않겠소.”
만우, 동군영과 한 약속?
“어차피 마교 고수들을 상대해 달라고 날 부른 것이니.”
일전의 만남에서 옥령과 그 주창이라는 사내가 마교 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마교의 무인들이 나타나 공격을 했다고 한 것을 들어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이들은 만우와 같은 목적을 가진 자들이다. 그러니, 이들을 돕는 것은 곧 만우와 동군영을 돕는 것이다.
“개성에서 나온 삼 따위, 그냥 내가 찾아내서 갈취하면 된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가는 약속한 개성 삼을 못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그 개성 삼도 동군영이 직접 주는 것이 아니다. 정보만 줄 뿐이지, 활빈당이 그 개성 삼을 탈취해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팡!!! 여포의 신형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 순간, 아래에서 내달리고 있던 주창이 고개를 힐끗 돌려 하늘을 쳐다봤다.
[그대는?]
그 순간 주창의 전음이 여포에게 들렸다. 여포는 눈가를 찡그렸다. 옥령이 주창을 살뜰하게 챙기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질투심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만난 사람에게 질투를 느낀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지만, 여포는 놀랍게도 질투심이 고개를 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눈에 반했으니.’
한눈에 반한 옥령이다. 처음 만난 여자를 위해 화경의 고수를 무찌르기까지 한 여포다. 그러니 이 정도는 해도 된다 생각했다.
[어디로 가는 것이든, 무엇을 하는 것이든. 옥 소저를 돕겠소.]
여포는 주창에게 그리 말했다. 주창은 달려 나가면서 옥령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우리 사화에게도 드디어 봄날이 오는 모양이군. 부탁하오!]
여포 같은 강자가 도와주는데, 주창이 거절할 리 없다. 만우처럼 중원의 세력과 얽혀 있다면 모를까, 여포는 중원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조선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뭐, 그의 스승이 천 년도 더 전의 여포의 스승이니 중원과 아예 상관이 없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여인에게 반해 사랑에 빠진 사내는 믿을 수 있다. 파바박!!!! 천군만마를 얻은 주창의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 뚱기당 땅 땅! 삘릴리!! 속이 비칠 듯 말듯, 아슬아슬한 붉은 적삼과 야시시한 색의 복면을 걸친 무희들이 석전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창!!! 무희들 중에서도 검무(劍舞)를 추는 무희는 조선에도 거의 없었다. 조선에서도 검무를 출 수 있는 이는 궁에 속해 연회 때 흥을 돋워주는 관기 외에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검무를 추는 무희가 있다고 하면 그게 전주든 안동이든, 평양이든 직접 그곳까지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차라락!!!! 무희의 검무는 진짜 상대를 해할 수 있는 검을 들고 하지 않는다. 여인의 근력으로는 진검을 들고 춤을 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녀들이 검무를 출 때 드는 검은 가검이다. 안이 빈 검을 만들어 무게를 대폭 줄인 가검을 들고 춤을 추는 것이다.
“호오.”
“오오오오.”
무희들이 일제히 가검을 빼 들고 원을 그리자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붉은 적삼이 무희들의 움직임에 따라 바람을 타고 일어나면서 붉은 꽃잎이 피어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로 가검이 나왔다가 사라졌다가, 그리고 음률에 맞춰서 무희들의 움직임이 절도가 있었다가 부드러워졌다가를 반복하니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졌다.
“허어…….”
긴장하고 있던 동군영조차도 인화(人花)들의 춤에 잠시 넋을 빼앗길 정도였다. 하지만 만우와 문형일, 슌스케는 사방에서 일어나는 꽃잎들 사이에서도 집중력을 유지했다. 정확히는 문형일과 슌스케만. 만우는 애초에 무희들의 춤 자체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냥 비무를 보는 게 더 낫겠어.”
초를 다투는 초인의 영역에 있는 만우에게 무희들의 춤은 그리 감흥을 주지 못했다. 차라리 저런 검무보다는 비무를 하는 게 더 아름다워 보이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