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천외천(天外天)(2)2021.04.17.
“천황폐하를 뵙습니다.”
“태정대신 오셨습니까. 그간 너무 격조하셨습니다.”
“출가한 몸인지라 그간 자주 찾아뵙지 못 하였습니다.”
천황과 요시미츠는 겉으로 보기에는 다정한 표정으로 덕담을 주고 받았다. 천황은 요시미츠가 예를 표하자 자리를 권했고, 요시미츠는 천황과 같은 높이에 놓인 상에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그것 자체가 요시미치의 권세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조선에서 보빙사단이 오다니. 경사스런 날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이게 전부 천황폐하의 은덕이옵니다.”
요시미츠는 알아주는 노회한 권력가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건 천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때는 남북조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같은 노선을 걸었던 동료였을지 모르나,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듯 같은 길을 걸어가던 동료더라도 한순간에 적으로 변하는 법이었다.
“참으로 석전이 아름답습니다 폐하.”
“내 금각사를 보고 부러워하여 한 번 꼭 이렇게 꾸며보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언제 한 번 오셔서 차라도 하시지요. 제가 직접 폐하께 금각사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천황은 가만히 웃는 얼굴로 차를 입에 머금었다. 향긋한 차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천황은 속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츠.’
겉으로는 자신을 공대하고 있으니 대하는 것은 아랫사람을 대하듯 대하고 있었다. 감히 천황보고 오라가라 하다니, 그것 자체부터가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헌데 말입니다.”
그 때, 요시미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도권을 빼앗긴 천황은 차분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유독 석전에 손님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십니까?”
“손님이요?”
천황은 모른 체 시치미를 뗐지만 식은땀이 목줄기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대계를 위해 모든 공가의 닌자들을 끌어모아 석전에 숨겨두었다. 그것을 요시미츠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 혹시 폐하께서도 모르시는 손님이시옵니까? 이거…… 너무 석전이 비좁은 듯 한데. 폐하의 손님도 아니라면 내보내야겠습니다. 하하하.”
요시미츠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천황은 요시미츠의 웃음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칼날을 느꼈다. 소리장도(笑裏藏刀). 천황은 내색하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덴노께서 일어나십니다!!!!”
둥! 둥! 둥! 천황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위가 조용해지면서 악공의 음악소리가 뚝하고 끊겼다. 그리고는 큰 북을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황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천황은 요시미츠의 도발을 그냥 무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후릅 모두가 천황에게 일어나 예를 표하고 있는 와중에 단 한 명, 요시미츠만은 제 자리에 앉아 뱀처럼 눈을 차갑게 빛내며 술을 입에 한 모금 머금었다.
‘발버둥쳐 봤자다.’
천황과 자신에게 반대하는 공가들이 어떠한 준비를 해놨던 요시미츠는 자신이 있었다. 만우. 저 멀리 조선의 보빙사단이 위치한 곳에 섞여있는 홍의를 입은 만우만 있다면, 덴노와 공가들이 무슨 준비를 해놓았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흐으음.”
요시미츠는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깊숙한 곳으로부터 끌어올린 숨을 길게 내뱉었다.
*****
“대주.”
“파천서생.”
연회가 열리고 있는 어소 깊은 곳에는 보빙사와 요시미츠, 그리고 덴노의 세력만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제 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이들, 투귀대의 고수들이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석전이 보이는 심처에 모습을 숨긴 채 그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녕, 홀로 승부를 보시려는 겁니까?”
“……그가 허락을 해준다면.”
“대주!”
파천서생 마일은 참담한 표정으로 주창에게 말했다. 하지만 정작 말을 한 주창은 평온하기 그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가 마일.”
“대주, 대주꼐서는 장차 신교의 지존이 되셔야 하는 몸인데…….”
“검주에게 허락을 받는다 하여서?”
마일은 차마 입을 열지 못 했다. 그것을 입에 담는 것 조차도 평생을 마교의 고수로 살아온 마일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천마신교. 중원의 무림인이라면 모를리 없는 천마신교는 단일 세력으로는 황실조차도 두려워하고 견제할 정도로 거대한 곳이다. 헌데, 그곳의 차기 지존이 되어야 할 주창이 검주의 존재 때문에 빛이 바래는 것 같아 마일은 못내 불편했기 때문이다.
“마일.”
“예, 대주.”
“그대는 군사다. 마교의 고수이기 전에 나, 주창의 군사. 헌데 자네가 자꾸만 냉철함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걱정이 되는군.”
주창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주창은 신교의 새로운 지존이 되어 신교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그 어떠한 수치와 창피도 감당하기로 결심을 하였네.”
“대주.”
“세상은 넓고, 우리의 실력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네. 검주 만우. 그 자는 나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야.”
“…….”
마일은 담백한 주창의 말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창의 말대로 군사인 자신이 자꾸만 냉정과 부동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자신의 머리에 자신이 있던 마일이 자신의 계책이 도통 통하지 않는 변수, 검주 만우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그의 존재로 인해 투귀대는 교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 했고, 두 명의 고수를 잃어야만 했으며 지금에 와서는 신교에 의해 반역자라 불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마일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마일 스스로도 자꾸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감정에 치우치게 된 것이다.
“이제 좀 내가 아는 파천서생의 눈으로 돌아온 것 같은데.”
주창은 씩 웃어보였다. 그런데 그 때 백영이 말했다.
“만약 검주가 대주와 교주의 대결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
“또한, 검주가 어떠한 연유로 이곳에 온 것인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만우에게 직접 찾아가 신교가 일본국에 진을 치고, 만우를 죽이기 위해 판을 벌렸다는 것을 전한 것이 투귀대다. 그러니 그걸 모를리 없었다.
“대주께서 교주에게 승리를 거둔다고 하셔도, 검주 그 자가 대주의 목숨을 노린다면…….”
백영은 덴노의 일장연설이 끝난 뒤 풍악이 울려퍼지고 있는 석전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된다면.”
주창은 쓰게 웃었다.
“강자의 자비를 바라는 수 밖에 없겠지. 검주를 죽이고자 모략을 짠 것은 교주이지, 내가 아니니까.”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주창은 교주를 남 부르듯 불렀다. 주창의 그 말에 남은 투귀대의 고수들이 입술을 앙 다물었다.
“대주! 소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대주만은 살려 보내겠습니다!”
위문이 탕탕거리면서 울분에 찬 목소리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그런 위문을 주창이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 널 믿겠다.”
“맡겨만 주십시오. 전 직접 검주와도 손속을 겨뤄본 놈이 아니겠습니까!”
상대도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검주과 손속을 겨뤄보기는 했다. 어쨌든 그런 투귀대 사이에 비장함이 흘렀다. 혈세천마. 신교의 새로운 교주 자리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 동시에 두 명의 화경의 고수가 격돌하게 될 전투가 벌어지기 바로 직전이었기 떄문이다.
“파천서생. 만약 교주라면, 이곳에 판을 짜놨겠지. 그렇지 않은가?”
“……예. 아마도…….”
마일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자신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이 근방에 혈세천마가 데려온 교의 고수들이 자리를 잡은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만우를 상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까지 들었다. 그러니 그들이 진을 친 곳에서 멀지 않은 이곳, 어소에서 마교가 준비한 계략을 실행하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쉽게?’
마일의 눈이 뜨였다.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혈세천마의 옆에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오랜 시간 신교의 지낭인 마군자 마원이 있었다.
“이곳이 아닙니다.”
마일의 두 눈에 사라졌던 빛이 돌아왔다. 그것은 좋은 신호였지만, 문제는 이제와서 그게 아니었다고 할만한 시기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아니라고? 이봐. 파천서생. 이제 와서 그러면…….”
위문이 입을 열려는 순간, 마일이 벌떡 지라에서 일어섰다.
“교주와 군사가 천마대와 진혼대를 끌고 검주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해 일본국에 온 것이라면 모든 명예는 한 곳에 묻어두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주창이 고개를 돌려 마일에게 물었다. 마일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 이렇게 간단한 것을 놓치다니. 대체…… 대체…….”
“마일! 정신차리고 말하라! 그래서, 신교의 고수들이 어디로 갔다는 것이냐!”
주창이 마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 힘에 마일의 눈이 흔들리더니 이내 반짝하고 빛냈다.
“검주의 약점. 모든 명예를 내려놓고, 검주를 죽이는 데만 집중하기로 한 교주라면 검주의 약점을 손에 쥐려고 할 겁니다. 검주의 약점은…….”
“금각사.”
“여아들을 데려왔다고 하였으니 아마 그 아이들일 것입니다.”
주창은 김향을 떠올렸다. 그 여아를 구하기 위해 한양에서 부여까지 뒤쫓아왔던 만우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교주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금각사다. 신교의 고수들은 금각사로 갔다!”
주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꽹! 꽤괭!! 삘릴리! 만우는 한 쪽에 마련된 주안상을 잡고 앉았다. 슌스케, 문형일 그리고 동군영까지 네 명이 앉자 풍성하게 차려진 주안상에 사람이 딱 꽉 찼다. 동군영이 감찰이란 것을 모르는 보빙사단이 없기 떄문에 굳이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다. 만우는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악공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면서 고기를 한 점 집어 먹었다.
“호. 괜찮은데?”
“그렇습니까?”
만우의 말에 문형일이 만우가 먹은 음식을 따라먹었다. 그런 문형일의 눈이 커졌다.
“오.”
“괜찮지?”
“일본국의 음식이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동군영은 마치 나들이를 나온 것 같은 세 고수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긴장이 곤두서 뒷목이 다 뻐근할 지경이었는데, 셋은 너무나도 태평했기 때문이다.
“어사 나리. 뭐해. 어서 먹지 않고.”
게눈 감추듯 음식을 먹어치우던 만우가 동군영을 쳐다봤다. 동군영은 입맛이 없어 손을 내저었다.
“난 됐네.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이…….”
“그럼 내가 가져간다?”
만우가 동군영의 앞에 놓여있던 음식은 날름 낚아채 갔다. 하늘에서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꽂히는 매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쾌속한 움직임이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만우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음식을 쓸어넣고 있던 만우가 문형일과 슌스케게 말했다.
“열심히 서로들 간을 보고 있기는 한데…….”
만우의 말에 문형일과 슌스케의 젓가락질이 딱하고 멈췄다. 적의 입 속이나 다름 없는 곳에서 만우의 말을 들어서 손해볼 것은 없었다.
“진혼대면 곡왕 부고야란 놈이 끌고 다니는 애들이지?”
“예, 대장.”
문형일이 만우의 말에 재깍 대답했다. 만우는 흐응하는 소리를 내면서 여기저기 석전 주변에 퍼져서는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