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마교, 살인진, 성공적?(2)2021.03.30.
“처음부터 스승께서는 반선(半仙)이셨소. 천 년을 넘게 사신 반선.”
“설마. 그러면 정말 귀하의 스승께서 천 년 전 여포에게 무공을 사사하였다는 그…….”
여포에 대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여포가 어느 한 신선으로부터 무공을 전수받다가, 절반만 배우고 산을 뛰쳐나와 인세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천 년 전의 영웅의 시대를 노래하는 호사가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반신반의하는 바가 없지 않아 있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다는 소리다.
“그렇소.”
“그러면 귀하의 대명이 여포인 것도…….”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는 이름이었다고 하더이다. 스승님의 무공을 물려받은 이들이 쓰는 이름.”
“어찌하여 그런 이름을…….”
“나도 그것은 모르겠으나, 아마 스승님께서 쓰시던 이름이 아닐까 하오.”
“신선의 이름…….”
“그렇소.”
여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국지의 여포도 그렇고, 지금 눈앞의 여포도 그렇고 방천화극을 다룬다는 점에서 아니라도 마냥 의심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마일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면 이제 나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저희 대주님을 도와주셨는데…….”
마일은 여포를 잡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투귀대는 지금 사실상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주창까지 부상을 입은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화경의 고수가 제 발로 들어온 셈이다. 이자를 투귀대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에…… 됐소.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라서. 옥 소저가 아니었다면 손을 내밀지도 않았을 것이오.”
여포는 정확하게 선을 그었다. 단호하고 망설임 없는 여포의 말에 마일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옥령. 나찰사화 옥령은 어쩌면 마교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몸으로 화경, 즉 극마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다. 혈성이라는 억겁의 고리를 타고 태어난 운명이기는 하나 그녀가 매력적인 여인이라는 것은 마교 사람이면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섬뜩하기는 하지만, 오죽하면 그녀의 별호에 화(花)가 붙었겠는가. 뭐, 어떤 사람은 나찰사화의 화가 꽃 화(花)자가 아니라 재앙 화(禍)자라 부르며 그녀를 두려워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잠시 기다리셨다가 만나시고 가시는 것이…….”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럼 이만 일어나 보겠소.”
옥령에게 한눈에 반해 쫓아간 것은 맞았다. 하지만 여인에게 반했다고 해서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이나, 맺은 약속을 버릴 수는 없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 만날 일이 또다시 있겠지.”
여포는 일어나 방천화극이 든 봇짐을 다시 들었다. 장대한 그의 체구와 봇짐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챙이 작은 패랭이 모자까지 쓰니 그럭저럭 봐줄 만은 했다. 유일하게 조선말이 가능한 마일만 여포와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에 웅풍과 위문은 궁금한 것이 많아 보였지만 일어나는 여포를 붙잡지도 못했다. 스윽. 여포는 고개를 돌려 옥령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백영과 함께 주창의 상태를 진단하고 간호하기 위해 따라들어 간 옥령이 저 벽 너머에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한눈에 반한 여인과 대화조차 나눌 수 없다는 것에 여포는 못내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련을 가지고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여포에게 걸린 식구들의 입이 많으니까.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가난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도, 여포는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잠깐.”
“대주!!!”
“괜찮으십니까, 대주?”
그런데 그때, 주창이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힘겹게 옥령과 백영의 부축을 받으며 나와서는 여포를 불렀다. 여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창을 쳐다봤다. 하지만 여포는 주창이 아니라 그 옆의 옥령을 쳐다봤다.
“내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이 이리 가면 어찌하라고. 갈 때 인사라도 할 수 있게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주창은 아직 안색이 파리했지만, 그럼에도 마교 소교주로서의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힘들어하면서도 제 발로 서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감사인사는 환자가 이렇게 나와서 했으면 됐소. 밤바람이 차니 들어가시오. 아무리 강건한 몸이라고는 하나 그 상태로는 고뿔이 걸릴지도 모르오.”
“고뿔. 하하하. 내 몸이 이렇지만 않다면 은인과 술 한잔하고 싶은데 말이오.”
주창은 여포에게 존대를 했다.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동수를 이뤘던 척사영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모습을 똑똑하게 봤기 때문이다. 강자에게는 그 강함에 걸맞은 대우가 필요한 법이라고 주창은 생각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여포는 옥령을 쳐다봤다. 옥령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여포의 눈에는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인연이 된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지 않겠소?”
“지금은 그럴 인연이 아니다?”
“내게도 챙길 식구들이 있어서.”
옥령은 그런 여포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여포의 눈이 너무나도 뜨거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마교라는 곳에서 살아오면서, 그 강한 남자들에게서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떤 강렬한 눈빛이었다. 이건 그냥 무공이 강하다고만 해서 나올 수 있는 눈빛이 아니다. 강한 신념과 가치관, 사람 자체가 강해야만 나올 수 있는 눈빛이었다. 여포란 사내는, 무공을 제외하고도 사람 자체가 강한 것이다.
‘소교주님처럼.’
여포는 옥령이 자신의 눈을 피하는 것을 보면서 피식 웃고는 등을 돌렸다. 그렇게 사라지는 여포를 향해 주창이 말했다.
“난 천마신교의 소교주, 주창이라고 하오. 이걸 가져가시오.”
휙!
앞서가는 여포의 어깨너머로 웬 패가 날아와 여포의 손에 떡하고 떨어졌다. 그것을 본 파천서생 마일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대주! 어찌하여 투귀대주패를!!!!”
“투귀대주가 되어 신교로 돌아갈 생각은 없네, 파천서생. 난 교주가 되어 돌아갈 생각이니까.”
“천마신교의 소교주?”
“지금은 꼬락서니가 이렇지만, 중원에서는 한 손에 꼽히는 거대한 세력이 내 손에 들어올 예정이지. 그러니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신교를 찾아와 그것을 보이시오.”
“뭐. 쓸 만해 보이니 받아는 두겠소. 그러면 몸조심하시오. 옆의…… 옥 소저께서도 평안히 계시고.”
휙! 여포는 더 이상 미련이나 망설임을 남겨 두지 않고 등을 돌려 멀어졌다. 그렇게 사라지는 여포의 등을 보는 주창이 옥령을 보며 말했다.
“이 세상. 참 넓지 않느냐? 나보다 뛰어난 자는 만우, 그자밖에 없다 생각했거늘…….”
“대주.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알겠네. 나도 쉴 테니 잔소리 좀 그만하시게.”
옥령은 몸을 돌리는 주창을 부축하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여포가 사라진 방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꾸만 머릿속에 잔영이 남는 사내였다. 여포란 남자는. ***** 하켄, 패검이라 불리는 남자인 타케노는 이를 까득 깨물었다. 쇼군이 아니라면 슈고라도 되어 주변국으로 부임을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는데 방금 전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슈고(守護)는 지방관 개념으로 지방에 부임하여 모반, 살인자를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은 관직인데 혼란한 가마쿠라 막부시대의 전란 속에서 내란에서 싸워 이기기 위해 막부에서 슈고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모으고자 슈고의 권한을 강화한 것이 슈고 다이묘가 된 것이다. 이들은 지방의 무사조직인 고쿠진(國人)들을 휘하로 들여 슈고의 권력을 탄탄하게 하였고, 근래에 와서는 그들이 각 지역의 영주를 대체할 군사력을 지닌 강력한 슈고 다이묘가 되었다. 결국 현재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최고 관직인 태정대신에 앉았고, 자신의 아들을 쇼군으로 앉힐 수 있었던 것도 현 막부에서 아시카가 일족의 유력한 슈고들의 세력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개처럼 굴러다니면서 죽이라면 죽이고, 살리라면 살렸거늘. 이제 와서 나를?”
그런 타케노는 자신을 좌천시킨 요시미치의 처사에 치밀어오른 분노를 술로 다스리고 있었다.
“감히…… 감히…… 감히!!!!!!”
파앙!!!! 타케노가 앉아 있던 의자가 쩌억하고 갈라지더니 파문이 일어나며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술병과 술잔이 깨져나갔다.
“오야붕!”
“괜찮으십니까?”
거대한 주루 자체를 통째로 타케노가 쓰고 있었는데, 안에서 일어난 소란에 바깥에 서 있던 부하들이 뛰어 들어왔다. 타케노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괜찮으니 이만 물러가라.”
“오야붕. 몸을 생각하셔서 조금만 드십시오.”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타케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부하들은 조용히 물러났다. 분노한 타케노가 그 누구보다도 무지막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감히 입을 여는 부하는 없었다. 타케노는 산산조각이 난 탁자 대신 옆 탁자에 앉아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술 가져와 술!!!!”
요시미츠에게서 만우 일행을 데려온 죄로 쇼군은커녕 아예 쫓겨나 버린 것이다. 요미치는 자신이 공을 들여 만든 금각사를 통째로 만우에게 내줘야 한다는 것 때문에 몹시 분노했다. 당연히 그것을 만우에게는 대놓고 표출할 수 없었지만, 그 불똥이 타케노에게 튄 것이다. 그 때문에 요시미츠의 거대한 분노를 직격으로 얻어맞은 타케노는 요시미츠의 곁에서 쫓겨났다.
“흐흐. 호코슈(奉公衆)에 자리 하나 주겠다? 그러니 그거 먹고 떨어져라. 이 말이지.”
타케노는 클클 거리며 웃었다. 지방 영주가 되거나, 그도 아니라면 지방관 자리를 원했던 타케노에게 떨어진 것은 호코슈, 쇼군 직속 상비군의 대장도 아닌 부장 자리 하나가 끝이었다. 물론 유례없는 권세를 자랑하는 아시카가 일족이 쇼군이었고, 그 쇼군의 상비군이니 상비군의 권세가 작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간 타케노와 신센구미의 수하들이 흘린 피에 비교하자면 말도 안 되는 처사였다.
“아시카가 요시미츠.”
타케노는 두 손을 부들거리며 떨었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지만, 타케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분노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의 밑에는 전쟁으로 단련된 사무라이 삼만 명이 있었지만, 그게 전부다. 당장 이 교토에 상주하고 있는 호코슈만 해도 오만이 넘는다. 그리고 관군은 그들의 무장 상태는 왜도 하나가 전부인 사무라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동시에, 삼만이나 되는 신센구미의 사무라이들은 보급을 받을 수 없는 반면, 관군은 그런 사무라이들과는 정반대였다.
“이렇게. 결국 이렇게 되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타케노는 이를 악물었다.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동군영이 넘겨주기로 한 절반의 개성 인삼뿐이다. 그나마 그것이라도 남아 다행이긴 하지만, 슈고가 되어 주변국에 부임을 하게 되면 그리 큰 금액도 아니게 된다.
“한 번의 전쟁 후에, 호코슈의 부장이 되어 살아야 한다?”
타케노는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동군영은 분명 개성 삼을 약속하면서 신센구미의 사무라이들을 쓸 일이 있을 것이라 전했다. 그렇다면 일은 간단해진다.
“삼만을 한 번에 다 쓰면 되지. 많을수록 좋다고, 분명히 그자가 그리하였으니.”
타케노는 위험한 상상을 하면서 입꼬리를 히죽 말아올렸다.
“그리고, 복잡한 전장에서 누군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게 설령 아시카가 요시미츠라고 해도, 검에 눈이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니까.”
깨지지 않은 술잔을 땅하고 내려놓은 타케노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사무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마음을 먹었을 때, 고민하거나 뒤를 돌아보는 법을 알지 못한다. 뒤를 돌아보다가 목을 베이는 곳이 전쟁이고, 그게 바닥이기 때문이다.
“신센구미, 소집 명령 내려. 당장.”
“하, 하잇!!!!”
타케노의 명령에 바깥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시카가 요시미츠.”
배신을 당한 남자의 복수심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