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혼돈의 소용돌이(5)2021.03.23.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감령과 필두의 말만 들으면 여포가 마교의 고수들의 손을 잡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강해졌습니다.”
척사영은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그녀가 분해하자 입가에서 피가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만우는 혀를 한 번 쯧 차고는 척사영의 혈을 짚었다.
“말 그만하고. 그 몸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척사영의 상태가 만우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그녀의 상태는 꽤나 엄중한 상태였다. 기혈이 제대로 꼬였기 때문에 이 기혈을 다시 풀어도 최소한 한 달은 정양해야 할 상처였다.
‘마교를 코앞에 둔 시점에.’
마교가 파놓은 함정을 파훼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척사영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부상을 입었으니, 만우는 입맛이 써졌다.
“들어와.”
“은공.”
“그러다 주화입마 든다? 빨리.”
척사영은 주화입마에 든다는 소리에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만우의 뒤를 따랐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단전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갑자기 강해졌습니다.”
척사영은 분하다는 듯 말했다. 여포가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 정도로 처참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우는 그런 척사영의 분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슬쩍 웃었다. 호승심이 대단한 여인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럴 만도 하지. 처음부터 실력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만우는 이미 한 번 여포와 겨뤄보았다. 그것을 몰랐기에 척사영의 눈이 커졌다.
“설마…… 알고 계셨습니까?”
“알다마다. 우리 계획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는데. 그런데 투귀대 쪽으로 왜 붙었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만우의 말에 척사영은 만우를 지그시 쳐다봤다. 자신은 낭패를 당하고 나서야 상대의 비밀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만우는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자가 은공과 겨룰 때도…….”
“아니. 숨기는 거 없이 다 풀어놓으라고 하니까, 갑자기 안 싸우겠다고 하던데?”
척사영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여포는, 자신이 이긴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포기를 한 것이다. 반면 자신은 그런 여포에게 졌다. 여포는 자신이 척사영에게는 이길 수 있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숨겼던 실력을 드러낸 것이고 말이다.
“익힌 무공이 특이한 것 같던데. 삼국지 여포 알아?”
“알고 있습니다. 최강의 무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어. 그런데 중원에서는 여포에 대한 소문들이 많았거든.”
그 소문들 중 하나가 바로 여포가 무예가 아니라 무공을 익혔다는 것이다. 태어나기를 거의 완벽한 신체를 타고 태어난 여포는 은거 중인 기인에게 무공을 전수받았는데, 그 무공을 절반만 배우고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그 절반의 무공만으로 그런 전설을 써내려 갔다는 것이다.
“아마 그 여포란 놈이 진짜 여포가 익혔다는 은거기인의 무공을 익혔다면…….”
삼국지의 여포가 익히지 않은 절반까지 마저 익혔다면 또 모른다. 뭐, 어디까지나 중원에서도 떠도는 이야기였고, 후한은 천 년도 더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전부 믿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 숨겨두었던 절반. 아마 놈이 완벽하게 제어가 안 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제약을 걸어둔 것일 거다. 몸이 버티지 못한다든지.”
“…….”
“자신이 다루지 못하는 힘을 억지로 익히려고 하는 것도 위험하거든. 뭐, 잠깐 잠깐씩은 사용할 수는 있어도, 오래는 사용 못 하는 것 같았는데.”
만우는 여포의 몸에서 잠들어 있는 거대한 기운을 느꼈다. 그런데 그건 화경의 경지에 도달한 여포도 제대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공력이었다.
“전승으로 내려오는 무공이라 뭐 사부 같은 사람의 내공을 격체전공으로 받았을지도 모르지.”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림에 있는 수많은 무공들 중에는 일인전승으로 내려와 스승이 자신의 제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주는 무공들도 있었다. 내공부터 시작해 깨달음이며 가르침까지 모두 다. 그런 무공을 여포가 익혔다면, 그가 다루지 못하는 공력이 그의 몸에 잠들어 있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
“어쨌건.”
벌컥 만우는 문을 벌컥 열었다. 텅 빈 방이었다. 척사영도 뒤따라 들어오자 만우는 공력으로 문을 닫은 뒤 척사영에게 말했다.
“옷. 싹 다 벗어. 속곳도 남김없이.”
“…….”
척사영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확하고 붉어졌다. ***** 방매와 김향, 그리고 임수미와 문형일은 금각사의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감탄했다.
“와. 여기가 사찰이라고?”
“산을 통째로 깎아서 만들었어요!”
“끄응. 이놈은 또 왜 안 일어나.”
방매와 김향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신나 했고 임수미는 조용히 뒤따랐다. 기천의 기초를 배우고 있는 임수미는 객잔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도 안에서 수련을 하느라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문형일은 기절한 채 아직 미동도 하지 않는 츠쿠야를 거칠게 어깨에 걸치면서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산중의 길을 죽 따라 올라 금각사가 보이는 곳에 도착한 방매의 두 눈이 탁하고 풀렸다.
“그, 금…….”
만우가 아까 난리를 피워놓은 탓에 때가 타고, 부서진 곳도 있었지만 금각사는 선명하게 번쩍거리는 금빛을 토해냈다.
“저 금을 다 벗겨서 팔아버리면 대체 얼마나 나올까.”
방매가 함주에서 구해간 사향을 본격적으로 팔기만 해도 방매는 순식간에 부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방매의 재물에 대한 욕심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이쪽으로.”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 금각사는 요시미츠가 사용했고 지금은 만우가 차지하고 앉았기 때문에 방매와 일행들은 금각사로 안내가 됐다.
“연못이다. 우와…….”
금각사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그대로 거울처럼 비춰주는 교코지(鏡湖池)가 있었는데 인공으로 만든 섬과 바위로 작은 우주를 만들었다. 요시미츠는 그 우주를 금각사 위에서 관조하는, 생불(生佛)로 자신을 포장하려 한 것이다. 어쨌건 그 연못에 비친 금각사의 장관을 멍하니 지켜보던 방매는 문형일이 뒤에서 밀자 정신을 퍼뜩 차렸다.
“가자. 길 막지 말고.”
“이런 건 구경하고 가야지.”
“올라가서 해. 올라가서.”
금각사 주변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원래라면 요시미츠를 수행하는 수행원들이나 그를 호위하는 사무라이들이 진을 치고 있어야지 하지만, 만우에 의해서 모두 쫓겨났기 때문이다. 금각사는 교토의 북쪽 언덕에 있었는데, 요시미츠가 정권을 잡으면서 이 북쪽 언덕 일대를 기타야마 도노(북쪽 산의 궁전)이라 부르며 호화로운 별장 단지를 지었다. 그 때문에 금각사에서 보면 말 그대로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별장들과 우주를 상징하는 교코지 등 교토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 왔는가?”
그 장관을 구경하고 있던 동군영이 방매를 맞이했다. 방매는 동군영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코를 킁킁거리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거, 탕약 냄새 아니에요?”
“예, 옹주. 탕약을 끓이고 있습니다.”
“으엑, 탕약이라뇨?”
방매가 코를 손가락으로 움켜쥐었다. 탕약 냄새가 온 전각 안에 진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부상자가 있었어서.”
“부상자요?”
부상자란 소리에 방매의 눈이 커졌다.
“만우. 혹시 만우가…….”
“설마요. 만우는 다치지 않았으니 걱정 마십시오, 옹주마마.”
만우가 다치지 않았다는 소리에 방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동군영은 그런 방매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 눈빛에 괜히 찔린 방매가 화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아. 그게…… 응? 자네 어깨에 있는 그자는 누군가?”
동군영이 문형일의 어깨에 정신을 잃고 짐짝처럼 얹혀있는 츠쿠야를 보고서는 물었다. 그러자 문형일이 거칠게 츠쿠야를 땅바닥에 내던졌다.
“모르겠습니다. 주군의 말을 전하러 왔다고 했다가, 갑자기 막 살수들이 들이닥치더니 둘이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아휴.”
문형일은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영문도 모르고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딱 질색이다. 피아가 명확하게 구분되어져 있지 않은 것만큼 신경 쓰이는 일이 또 없기 때문이다.
“아. 아마도 만우가 보낸 사람인 것 같군. 정확히는 이 전각의 원래 주인이겠지.”
동군영은 만우한테 괜히 한 번 덤벼보려고 했다가 애지중지하는 닌자들과 함께 싹 털린 요시미츠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만우가 그래 주지 않았으면, 동군영은 그자와 멀쩡한 상태에서 대면하여 원하던 것을 얻어낼 수 있었을는지 의문이 생겼다.
‘만우 앞에서야 그랬지만…… 보통은 아니었으니까.’
한 국가의 최고 대신이라는 자가 상대방의 강함 앞에 그렇게 쉽게 자존심을 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의외로 그런 자존심을 지키려다가 죽은 위정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도움이 되건, 안 되건 말이다. 게다가 중간중간 눈을 번뜩이거나, 그가 부리고 있는 이들을 생각하면 만우 없이 동군영 혼자 이곳에 왔을 때, 원하던 것을 얻어갈 수 있을는지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시미츠는 그만큼 간악하지만, 폭력을 망설임 없이 휘두를 수 있는 잔혹한 인물로 보였다. 그런 인물에게는 만우처럼 압도적인 강자가 폭력으로 다른 생각을 못 하게 찍어누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교.’
동군영은 마교를 떠올리면서 이를 꽈악 깨물었다. 이제 정말 마교의 턱밑까지 왔다. 부모님과 가문을 몰살시킨 불구대천의 대원수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산다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는, 누군가 한쪽은 반드시 파멸해야만 하는 그런 사이.
‘하지만 만우가 없다면 이렇게까지 오지도 못 했다.’
맨 처음에 만우는 도와주지 않겠다 선언했을 때, 동군영은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가문의 원수는 자신의 손으로 해결을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맙게도 척사영과 문형일, 호선 등이 기꺼이 동군영과 함께 동행을 해주었다. 또한 나랏님도 그런 동군영을 이해하고 그를 어사 대신 감찰로 삼아 왜로 관선을 통해 갈 수 있도록 배려까지 해주었다. 하지만.
‘만우가 없었다면.’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만우가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면.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포와 만났을 때 만우가 없었더라면. 보빙사와 담판을 지을 때 만우가 없었더라면. 요시미츠를 만날 때 만우가 없었더라면. 마교를 만났을 때 만우가 없었더라면? 동군영은 고개를 털어냈다. 가문의 원수가 코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잡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듯했다.
‘만우의 머슴이 되고 노비가 된다고 해도 좋다. 만우가 원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원수를 앞에 두고 약해질 필요는 없었다. 아니, 동군영은 이미 충분히 약했다. 만우가 없었다면 그 어떠한 것도 자신의 손으로 해내지 못할 정도로. 그러니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더욱 약해지고 좌절해지는 것은 여기까지다. 눈앞에 당면한 일부터 처리한 다음에, 그것부터 해결한 다음에 그다음 일을 해결해도 늦지 않는다.
‘검이라도 한 번 휘두르자.’
동군영은 방매와 일행을 감령과 필두, 그리고 호선이 치료를 받고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준 뒤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검을 들고 아래로 내려왔다.
‘이렇게 나약한 생각을 하느니,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르겠다.’
이미 자신의 검에 대한 재능은 낙제점이라고 만우에게 한 소리를 들은 동군영이지만, 그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이것밖에 없었다. 또 어떻게 아는가. 눈 먼 검이 일을 한 번 칠지. 그렇게 눈 먼 검이 일을 치려고 해도 부족한 재능으로나마 노력을 해놓지 않으면 그 기회마저도 찾아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노력을 할 것이다. 드르륵!!
“이게 무슨 일이야 감령 오라버니. 필두 아저씨!!”
방매가 빼액 하고 내지르는 소리가 동군영의 귓가에 맴돌았다가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