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감령과 필두(5)2021.03.06.
“우리는 우리 편 없어?”
“그러게.”
필두는 으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대부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옥령은 주창의 안위를 살피는데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되신 거예요. 어제 굉음이 있었다고는…….”
“일단 이 자리에서 피한 다음에 이야기를 하자꾸나.”
주창은 옥령을 옆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주창은 옥령보다 옥령과 함께 등장한 남자가 더 신경 쓰였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키가 큰 장한은 준수한 미남자였는데, 등에 봇짐을 메고 있기는 했지만 그냥 평범한 보부상이 아닌 듯 했다. 아무리 겉으로는 기세를 숨겨도, 눈에 흐르는 정광만은 숨길 수 없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누구냐, 사화.”
“아. 이분이 대주님을 찾는데 도움을 주셨어요.”
“나를 찾는데?”
주창은 고개를 돌려 여포를 쳐다봤다. 여포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주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주창을 부축한 옥령이 신경 쓰인다는 표정이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주창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여포에게 물었다. 여포는 크흠하고 주먹을 들어 올려 헛기침을 했다.
“무명(無名)이라고 불러주시오. 그냥 지나가던 보부상일 뿐이니.”
“요즘은 화경 정도는 되어야 보부상이 가능한가 보오?”
“…….”
옥령의 눈이 커졌다. 옥령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여포를 쳐다봤다. 여포는 한눈에 자신의 경지를 꿰뚫어본 주창을 놀랍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몸 상태가 그 모양인데도 보이다니. 수련이 부족한 모양이구려.”
“뾰족한 송곳이 주머니에 들어가 있은들 숨겨질까.”
여포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둘이 나누는 대화를 알아들은 감령은 필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여기가 우리 무덤인가?”
“화경이 둘이라니…….”
갑자기 난데없이 등장한 화경이라니. 하지만 감령과 필두는 오히려 가슴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피하지 못할 죽음이라면, 당당하기라고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개죽음을 당하기 싫어서 산채로 내팽개치고 왔는데.”
“나도 마찬가지.”
감령과 필두는 녹림 산적과 장강 수적의 총채주지만, 그 자리를 내팽개치고 기꺼이 만우의 휘하로 들어왔다. 항상 사선에서 긴장해야 하는 것도 싫고, 만우 밑에서 깨달음 한 조각이라도 얻어 무인으로써 더욱 강해지고 싶은 향상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화경의 고수를 둘이나 마주할 줄이야.
“한 명은 알릴까?”
“네가?”
감령이 씩 웃으며 말을 꺼낸 필두에게 말했다. 필두는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 혼자 죽기 전에 깨달음 얻으려고?”
“미친 놈. 그런 이야기 속에 나오는 기연을 누가 믿어.”
감령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여포와 주창, 옥령이 감령과 필두를 쳐다봤다. 주창은 감령과 필두에게 말했다.
“아직도 나를 잡고 싶은가?”
“물론. 눈앞에 펄떡이는 대어를 놓고 돌아갈 강태공이 어디 있다고.”
필두가 씩 웃으며 불뚝거리는 팔로 대부를 들어 쿵하고 옆에 내리찍었다. 그러자 옥령이 양 손에 혈기를 일으켰다. 혈마공(血魔功)의 증거였다.
“저들은?”
“검주 만우의 수하들이다.”
옥령의 눈이 흔들렸다. 감령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수하라.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옥면산군과 역수교어라는 별호가 있으니 그리 부르거라, 투귀대주!!”
감령의 패기에 여포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검주 만우라면 자신의 방천화극을 맨 손으로 붙잡은 것도 모자라 여포가 무예를 숨기고 있다는 것도 알아챈 고수였다. 과연 그의 수하다운 패기였다.
“옥면산군…… 역수교어. 녹림의 총채주와 강의 총채주로군요.”
옥령은 방심하지 않고 혈기를 끌어올렸다. 산적과 수적들이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이끄는 대채주의 무명(武名)은 무림에서도 유명했다. 그러자 옥령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여포는 옥령에게서 느껴지는 짙은 살기에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런, 소저. 괜찮으시오? 그런 흉악한 무공이라니…….”
“흉악하지 않아요.”
옥령은 흉악하다는 말에 곧바로 반응했다. 시뻘겋게 물든 옥령의 두 눈에서는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러다가 한 번씩 발작하는 것이 바로 혈성의 운명이었다. 혈성의 혈기에 사로잡혀 미치지 않는다면 절대고수가 되지만, 혈기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는다면 그대로 괴물이 되고 만다. 하지만 옥령은 혈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혈기와 싸워야 하는 것은 그녀의 파힐 수 없는 숙명이었다.
“내 운명이니까. 그리고 이 힘으로 내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으니까.”
“좋은 마음가짐이야. 네가 나찰사화(羅刹死花)구나. 소문만 무성한 미녀를 이리 볼 수 있다니!! 으하핫!”
감령이 도를 역수로 쥐며 자세를 낮췄다. 여포는 옥령의 혈기가 짙어지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옥령이 혈마공을 끌어올린 이유는 순전히 대주인 주창을 지키기 위해서다.
“소저. 힘을 쓰지 마시오. 그대의 운명을 깎아먹는 놈이니까. 대신 내가 도와드리겠소.”
여포는 검주와 손을 잡은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옥령이 제 살을 깎아먹는 혈마공을 사용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만난지 반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첫 눈에 연모하게 된 남자는 어쩔 수 없이 오지랖이 넓어져야만 했다.
‘죽이지만 않으면.’
쿵! 여포는 어깨에 메고 있던 봇짐을 풀었다. 그러자 쿵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진 봇짐이 덜컥하고 열리더니, 여포가 손을 휘젓자 그 안에서 다섯 조각으로 분리가 된 방천화극이 떠올랐다. 처저저적!!!!
허공섭물로 방천화극이 삽시간에 조립이 되자 여포는 그 방천화극을 손에 쥐었다. 동시에 감령과 필두의 눈이 커졌다.
“여포!!!!”
“여포?”
방천화극을 휘두르는 고수라고 하면 여포 밖에 없다. 감령과 필두의 눈이 커진 순간, 그 둘이 다급히 몸을 양 옆으로 날렸다. 콰앙!!!
“크윽.”
“끅!”
감령과 필두는 여포의 일격을 피해냈지만 그 안에 담긴 경력 때문에 서둘러 공력을 끌어올려 전력으로 그 경력을 몰아내면서 답답한 호흡을 내쉬었다.
“저 자. 나에 버금가는 고수구나! 옥령아. 어찌 저 자를 만난 것이냐?”
주창은 여포에게서 느껴지는 기세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옥령이었다. 화경. 주창이 자신에 버금가는 고수라고 인정할 정도로 강한 강자란 것을 옥령은 전혀 의심하지도 않고 이 자리까지 데려온 것이다.
‘만약 저 자가 대주님의 적이었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제 손으로 사신을 불러들인 것이다. 옥령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본 주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책하지 말거라. 지금은 우리의 구명줄이 되어줄 사내인 것 같으니.”
“하지만 대주, 소녀를…….”
“됐다! 어서 우리는 몸을 뺄 궁리를 하자꾸나.”
마교의 고수는 적이 강하다고 해서 물러서지 않는다. 그 때문에 상처 하나 없는 매끈한 등이 그들에게는 자랑거리였다. 그 어떠한 강적을 만나더라도 절대로 등을 돌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바로 매끈한 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창은 그런 자존심 따위는 이미 모두 버렸다. 이미 교의 고수들이 자신을 반역자라 부르며 쫓는 순간, 주창은 교주직에 오르기 전까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수치와 모욕을 감수하기로 결심했다. 최고 지존의 자리에 오르는데 그 정도의 수모를 감수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쾅! 쾅!! 여포의 방천화극은 빠르고, 강맹했다. 거기에 극을 휘두르는 기술 자체가 고절했기 때문에 감령과 필두는 고전하며 여포의 공격을 막아내거나 피하는데 급급했다. 꽈앙!!! 주르륵!
“커흑!”
감령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도에 달린 방울이 미친 듯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여포의 방천화극을 정면에서 받아낸 결과다.
“우……우리를 모욕하는 것이냐 여포!”
필두가 사람 상체만한 대부를 휘둘러 여포를 물러나게 하고는 감령의 옆에 붙으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여포는 속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제압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분명 여포는 감령과 필두 둘이서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화경과 초절정이라는 차이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감령과 필두가 여포의 공격에 잘 버텼다. 방금의 일격 같은 경우에도 초절정이라면 내부가 진탕되어 내상을 입을 정도의 공격이었다. 그런데 그걸 감령은 그냥 몸으로 버텨냈다.
“모욕이라니.”
“헌데, 어찌하여 살기가 실려 있지 않은 것이냐!”
감령과 필두는 분노했다. 자신들은 목숨을 걸었는데, 여포가 자신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건 목숨을 건 무사에게 있어 대단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만우와 동군영과 맺은 밀약으로 만우의 수하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여포는 한숨만 내쉬었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생각이냐? 이쯤하면 되었으니 물러나라.”
그걸 티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여포는 감령과 필두에게 짐짓 너그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너그러움이 감령과 필두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썩을. 저 기생오래비가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데.”
“네가 기생오래비라고 하니까 이상하지만…… 뭐 틀리지는 않은 지적이야.”
우우우웅!!!! 감령과 필두가 기세를 끌어올렸다. 여포는 그런 둘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둘을 제압하려면 나도 해제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서는 깔끔하게 저 둘을 제압하는 것은 지금의 여포에게도 힘들었다. 여포가 망설이고 있는 찰나, 감령과 필두가 여포를 향해 쇄도해들었다.
‘여인 앞에서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냐.’
하지만 그 순간, 여포의 눈이 번쩍했다. 고민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느낀 것이다. 마음에 드는 여인 앞에서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 자체가 여포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날 원망치 마라!”
여포는 이 둘을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하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사지는 붙여놓아 주마.”
얼마간의 상처는 어찌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사지만 자르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자 여포의 기세가 한층 더 강해졌다.
“크아아아!!!”
“흐아압!!!”
하지만 여포의 기세가 강해졌다고 해서 감령과 필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 둘은 오히려 그 강대해진 여포의 기세를 뚫고나가며 여포를 향해 도과 대부를 휘둘렀다.
“약하다!!!”
감령과 필두는 혼신의 힘을 담아 일격을 날렸지만, 여포에게는 그마저도 부족했다. 여포는 마주 방천화극을 휘둘러 두 초절정 고수의 공격을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꽈앙-!!!!!
“커헉!”
“크허억!!”
거대한 폭음과 함께 달려들었던 것보다 빠른 속도로 감령과 필두가 뒤로 튕겨져 나갔다. 감령의 도는 손잡이만 남아있었고, 필두의 대부는 날이 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절대로 손에서 무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 그 둘의 투지만큼은 여포가 감탄할 정도로 대단했다.
“목숨만은 붙여두었다.”
여포는 마지막에 손에서 힘을 뺐다. 그 때문에 방천화극이 둘의 몸을 가르지 않고 그저 튕겨서 날려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