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감령과 필두(4)2021.03.02.
“괜찮습니다.”
“아…….”
여포는 옥령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눈을 슬쩍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볼이 슬쩍 붉어졌다. 하지만 옥령은 그런 여포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곳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도움이 필요하신 것 같은데, 괜찮으시다면 좀 도와드릴까요?”
“무슨 도…….”
됐다고 옥령이 고개를 저으려던 순간, 옥령은 여포가 상인 차림이란 것을 발견했다. 등 뒤에 나무 상자를 넣은 봇짐을 메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보부상들이나 상인들이 물건을 보호하기 위해 상자를 짊어 메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옥령은 눈을 반짝였다.
“혹시 상인이신가요?”
“예?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여포는 볼을 긁적였다. 실제는 도적이었지만, 부자들의 물건을 빼앗아 그것이 더욱 필요한 이들에게 더 좋은 세상이란 값을 받고 파는 셈이었으니 상인이 맞았다.
“그러면 저 좀 도와주세요. 제가 누구를 찾고 있거든요. 이렇게 생긴 사람인데…….”
여포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남자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얼굴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부탁드려요. 제발.”
하지만 미녀의 위력은 대단했다. 여포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표정이 밝아진 옥령이 그런 여포에게 고개를 꾸벅거리며 숙였다.
***** 번쩍!
“후읍!”
주창은 임시로 만든 토굴 안에서 운기조식을 끝내고 눈을 떴다. 그런 그의 안색은 혈색이 도는 것이 아니라 창백했는데, 주창은 밝아진 것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몇 시진이나 지난거지?”
주창은 옷을 들추고는 가슴팍을 쳐다봤다. 그곳에 검은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져 있었는데, 그 주변으로 검은 핏줄이 울룩불룩 솟아올라 있었다.
“움직일 수는 있겠군.”
주창은 씁쓸하게 웃었다. 검주의 도착을 알리고, 경고하기 위해 홀로 신교로 향한 주창은 우연히 그 자리에서 혈세천마를 만났다. 그리고, 혈세천마와 한 번씩의 공방을 교환했고, 이 손바닥 자국이 가슴팍에 남은 것이다. 천마장(天魔掌). 신교의 초대 교주인 천마가 남긴 천마신공 중 한 갈래로 대성을 하면 소림의 여래신권(如來神拳)처럼 부처는 아니지만 천마의 흉상이 나타난다는 최상승의 무공 중 하나였다.
“내 천마검(天魔劍)은 아직 그에게 미치지 못 하는구나.”
천마검 역시 천마장과 똑같은 천마신공의 한 갈래. 주창이나 혈세천마는 각기 천마권과 천마장 하나만을 가지고 화경에 올랐는데,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익혔던 천마는 어느 정도의 경지인지 가늠이 안 갈 정도였다.
‘검주라고 해도 천마께는 안 되겠지.’
주창이 떠올릴 수 있는 살아있는 무림인들 중 가장 강한 것은 검주 만우다. 그가 일패가 아니란 것이 무림인으로써 부끄러울 정도로, 그는 강했다.
“걱정하겠군.”
밤새 천마장에 맞은 내상을 회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임시토굴을 만들어 운기조식을 취했던 주창이다. 아무런 호법도 없이 그렇게 운기조식을 취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천마장의 마기가 골수에까지 미쳐 주화입마에 빠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임시토굴을 만들 때까지 버틴 것도 주창이 혈세천마와 같은 천마의 무공을 익혔고, 화경에 도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아니라면 진작 머리가 터져서 죽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천마신공은 고절하고 패도적인 무학이었다.
“혼자서 다녀오겠다고 그리 호언장담을 했는데.”
자신이 밤새 사라졌으니 수하들의 걱정이 얼마나 클지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보이는 듯했다. 못난 대주가 되었다는 것에 자책하며 토굴에서 나와 산에서 내려온 주창의 얼굴이 굳었다.
“마기?”
“고수다…… 아니 주창!”
하필이면 산에서 내려와 저자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이 무림인이라니. 주창은 혀를 쯧하고 찼지만 이내 익숙한 용모파기에 주창은 고개를 갸웃했다.
“옥면산군. 그리고 역수교어?”
“…….”
감령과 필두는 이를 까득하고 갈았다. 범상치 않은 마기가 느껴진다고 하더니 하필이면 조우한 것이 마교의 소교주이자 투귀대의 대주일 줄이야.
“빌어먹을.”
“우리밖에 없지?”
감령과 필두는 만우를 찾아 금각사로 가던 길이었다. 우즈히코 가문의 무사들이 공격을 받았고, 그것 때문에 척사영을 필두로 한 나머지 일행은 우즈히코 가문이 아니라 객잔에 짐을 풀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우즈히코 가문도 거래를 제3의 다른 공간에서 하기로 약조를 한 상태였다.
“검주의 일행들이구나.”
검주가 녹림의 총채주와 장강수적의 총채주를 부하로 부린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였다. 주창은 혀를 쯧하고 찼다.
‘지금으로써 둘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인데.’
주창과 투귀대는 만우에게 직접 찾아가 마교에서 왜에 함정을 파놓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직접 찾아가서 말을 하고 왔다. 그 때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는데, 주창은 지금의 몸 상태로는 두 명의 초절정 고수를 상대하는 것이 무리란 것을 느꼈다.
“너희들과 지금 다툴 생각은 없다.”
“그런 놈들이 함정을 파놓고 우리를 기다려?”
감령과 필두도 주창을 보면서 경계했다. 상대가 화경의 고수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목숨을 내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숨을 내거는 것도 어느 정도 이게 실력이 맞아야 틈을 보고 달려들지, 지금 달려들어 죽는 것은 그냥 개죽음이었다.
“그게 아니라…….”
“반역자다! 쳐라!!!!”
그때, 일련의 마기를 풍기는 무리들이 대치 상태를 깨고 난입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난리가 나면서 양인들이 개미떼처럼 흩어졌다. 감령과 필두는 갑자기 튀어나온 마교 고수들의 등장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잘못 걸린 것 같은데.”
“누가 살든 빠져나가면 곧바로 대장님께 알려야 돼.”
“빌어먹을.”
감령은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를 내는 도를 움켜쥐었고 필두는 대부를 움켜쥐었다. 그런 감령과 필두가 공력을 끌어올리며 공격해올 적들의 공세에 대비했다.
“쳐라!!!”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튀어나온 고수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명령을 내리자 마기를 풍겨대는 고수들이 뛰어들었다.
“진혼대! 곡왕 부고야의 개들이구나!!!!”
“……엉?”
“으응?”
감령과 필두는 순간 벙찐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나타난 마교 고수들이 감령과 필두가 아니라 자신들의 소교주인 주창을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
“…….”
끌어올린 공력이 무색하게 진혼대의 고수들은 감령과 필두를 무시하고 주창에게 달려들었다. 뒤에서 주창이 마련검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우우-!!!! 진혼대의 고수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주창을 가운데 놓고 입으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그런데 모든 고수들이 대는 소리가 달랐다.
“진혼대…… 음공(音功)이다! 귀를 보호해!”
“진혼대라니.”
곡왕(哭王) 부고야는 무림십좌의 이왕(二王) 중 하나로 음(音)과 소리를 이용하는 무공에 있어 일가를 이룬 초고수 중 하나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진혼대는 그런 부고야의 음공을 사사받은 이들로 특히 진혼대는 다수 대 다수의 결전에서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몇십 년 전, 그 때도 곡왕으로 생존해 있었던 부고야와 진혼대가 나서 곤륜을 봉문시킨 일은 유명했다. 상대가 병장기를 휘두르면 그것을 막아낼 수 있지만, 소리를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귀를 틀어막거나 공력을 끌어올려 귀를 보호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공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려면 최소한 절정은 되어야 했다. 절정 이하의 무인들은 음공을 막아내는 방법이 귀를 틀어막는 것 밖에 없었다. 즉, 감각을 하나 포기하던가, 아니면 지속적으로 공력을 소모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곡왕과 진혼대는 상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큰 위력을 발휘했는데, 진혼대의 무서운 점은 그들의 합창(合唱)에 있었다. 음공을 중첩시켜 한 명에게만 소리로 공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즉, 진혼대는 수만 많다면 그게 화경이든, 현경이건 간에 자신들의 음공을 중첩시켜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피래미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천마검을 익힌 소교주, 주창이다. 주창은 저들이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합창을 시작하기 전에, 번개 같은 발검으로 진혼대의 고수들을 쓰러뜨렸다.
“크아아악!”
“크악!!!”
기세 좋게 나타난 것과는 달리 주창의 마련검에 진혼대의 고수들이 쓰러지는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주창도 마찬가지였다. 울컥!!!! 빠르게 진혼대를 제압하느라 공력을 무리하게 운용하자 내상이 도지면서 죽은피가 주창의 입으로 울컥 새어나왔다. 감령과 필두는 그런 주창을 보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멀쩡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
필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일어난 일만 보면 저들은 소교주를 반역자라 불렀고, 주창은 마교의 고수들을 제 검으로 죽였다.
“내분인가?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대수야? 잡아놓고 물어보면 되지. 상태도 멀쩡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면 승산이 있잖아?”
감령이 딸랑거리는 방울이 달린 도를 들고 나서면서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주창은 그런 감령을 보면서 눈가를 찌푸렸다. 진혼대와는 달리 감령이나 필두는 진짜배기 고수다. 자신이 멀쩡하다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냥 보내달라고 해도, 보내주지 않겠지.”
“네놈들이 한 짓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죄없는 양민들을 수도 없이 죽였고, 동군영의 가문마저 몰살시킨 놈들과 한패다. 검 하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그 양반이 가문의 복수를 제 손으로 하겠다고 만우의 도움도 없이 죽음을 각오하고 나설 정도였던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동군영과 친해진 감령과 필두도 그의 슬픔에 공감했다. 그래서 만우가 가겠다고 했을 때 기꺼이 뒤따랐다. 만우에 대한 믿음과, 동군영에 대한 공감으로.
“그럼 오라. 내 산적과 수적 놈들에게 등을 보이고 달아날 생각은 없으니까.”
주창이 결연한 표정으로 공력을 끌어올렸다. 감령은 긴장이 되는 듯, 입술을 혀로 살짝 핥으면서 도를 이리저리 휘둘러 보인 후 자세를 잡았다.
“필두. 네놈은 끼어들지 마.”
“상대는 투귀대주다!!”
감령의 말에 필두는 만용을 부린다면서 인상을 쓰고는 대부를 들어올렸다. 상대는 썩어도 준치라고, 무려 화경의 고수다. 그런데 감령이 호승심을 부리는 것에 필두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전력을 다해 상대해도 모자를 판에 호승심은. 그딴 건 개나 줘라.”
“하긴. 그런가?”
주창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가 펴졌다.
‘지금에 충실하게 사는 수밖에.’
주창은 아직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력을 끌어올리자 가슴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주창과 감령, 필두가 부딪치려는 순간, 거대한 장력이 감령과 필두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이건 또 뭐야!!”
콰아아아!!!! 감령이 갑작스런 기습에 역수로 쥐었던 도를 바람개비처럼 휘두르자 장력이 찢겨져 나가며 옆으로 상쇄됐다.
“대주님!!!”
“옥령?”
주창의 눈이 커졌다. 하늘에서 옥령이 웬 처음 보는 남정네와 함께 뚝하고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젠장. 또 뭐야.”
감령은 주창의 동료가 등장했다는 것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주창 하나만 해도 벅찬 상황에 범상치 않아 보이는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무림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여자와 노인, 그리고 아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라고 해서 감령과 필두가 경계심을 늦출 리는 없었다. 오히려 옥령이 날린 장력을 흩어냈기 때문에 감령과 필두의 신경이 곤두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