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감령과 필두(1)2021.02.20.
“이쪽으로 오시지요.”
“흐음.”
금각사 난간에 고양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가볍게 내려앉은 만우는 갑자기 깍듯해진 요시미츠의 태도에 턱을 긁적였다.
“태정대신이면 그래도 일본국의 최고위 관료이신데.”
조선으로 따지면 영의정급의 관직이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에는 지금의 임금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일본국의 경우에는 이 요시미츠가 최고 권력자라는 점이 달랐다. 하지만 같은 최고권력자임에도, 조선의 임금과 요시미츠는 완전히 달랐다.
“명에서 검주의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명성을 흠모하였으니, 영웅을 모시는 영광을 제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오…….”
만우는 주변에 그림자처럼 숨은 인자들의 감정이 동요하는 것을 느끼고는 피식 웃었다. 요미시츠는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였다.
“뭐, 그럽시다. 내 그런 걸 굳이 거절하지 않는 성격이니.”
만우가 피식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미츠는 단 한 번도 불쾌하단 기색을 얼굴에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감격하는 표정까지 지어보인 것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자로군.’
하지만 만우는 그런 요시미츠의 비굴한 모습만 보고 그를 판단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이런 성미였다면, 절대로 최고 권력까지는 오르지 못했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자신 앞에서 보이는 얼굴 말고도, 다른 얼굴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털썩. 만우는 요시미츠의 안내에 자연스럽게 상석에 가 앉았다. 그리고 요시미츠는 황송하다는 듯 만우의 사선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사무라이의 안내로 3층에 롤라온 동군영이 상석에 앉은 만우를 보고는 당황해했다.
“만우?”
“아. 본주의 이름을 들어본 것인지, 나보고 여기 상석에 앉으라고 하지 뭡니까. 하하하. 슌스케?”
“예, 대장님.”
슌스케의 얼굴을 본 요시미츠의 눈 사이가 꿈틀거렸다. 슌스케는 타케노처럼 요시미츠가 부리던 장기말이었는데, 그 장기말이 자신과 마주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요시미츠였기에, 자신이 부리던 장기말과 동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아, 맞다.”
만우가 그런 요시미츠를 보면서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만우의 말에 요시미츠가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마셨으면 좋겠소. 본주가 왜어를 쓰지 못해 슌스케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그리고 내가 아끼는 자이니 이 자리에 앉는 건 당연한 거지 않소이까?”
만우는 꿍꿍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예의를 다해 맞이한 요시미츠에게 반존대를 해주었다. 슌스케가 그것을 옆에서 통역하자 요시미츠는 속내를 숨기고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께서 그러하자고 하시면 얼마든지요. 아미타불. 오늘 이 중이 개안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영웅을 마주하니 말입니다.”
요시미츠는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승려이기 때문에 승복을 입고 아미타불을 읊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불심이 깊은 소림의 승려와는 달리 그 어떠한 엄정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땡중인 것이다.
‘소림에서 알면 경을 칠 일이로고.’
덴노 위에, 무가 위에, 거기에 종교 위에까지 서기 위해 출가한 요시미츠이니 이것을 소림에서 알았다면 당장 방장이 선장을 들고 살계를 열겠다며 왜까지 달려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우는 그가 내놓은 차를 한 모금 입가에 머금었다. 슌스케는 고요하게 요시미츠의 눈을 응시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그런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자,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요시미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군영도 착석해 있었지만 동군영도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슌스케. 오랜만이군.”
“오랜만입니다. 태정대신.”
슌스케는 허리를 똑바로 편 채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요시미츠의 눈을 마주했다. 요시미츠는 그런 슌스케를 보면서 눈가를 떨었지만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만우의 앞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시는 주군이 다르다고는 하나, 한때는 내 녹을 먹었던 터. 예의가 바른 이를 영웅께서는 좋아하실 것 같은데 말이야.”
요시미츠는 슌스케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영웅이니 뭐니하면서 만우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슌스케가 무례하다고 꾸짖는 셈이었다. 슌스케는 차갑게 웃었다.
“하켄 같은 쓰레기 낭인을 들이시고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일월조를 내치셨다 들었습니다만.”
말이 내쳤다는 것이지 결국 슌스케의 실패를 들어 일월조의 모든 이들을 추방했다는 셈이다. 모시는 주군으로부터 내쳐진 사무라이 가족들의 운명은 뻔했다. 죽음. 사무라이 자체가 워낙 적을 많이 만들고 다닐 수밖에 없는 직업이기 때문에, 모시는 주군으로부터 내쳐져 광야로 쫓겨났다는 것은 범의 아가리에 스스로 목을 들이민 셈이다. 요시미츠는 덕(德)이 없었다.
“그것 때문에 이리 나오는 건가? 영웅을 믿고?”
“적어도 태정대신, 그대 같은 여우보다는 저분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분의 목숨을 노렸지만, 팔 하나로 참아주신 분이니 말입니다.”
슌스케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요시미츠에게 말했다. 슌스케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뚝뚝 묻어나왔다. 만우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둘 사이에서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보면서 재밌다는 듯 히죽 웃어보였다.
“팔 병신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이제 지킬 것이 없다고 무서운 것도 없어졌어.”
“나 같은 사무라이들이나, 이곳에 숨어 있는 닌자들이 아니면 도 하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당신 같은 병신을 누가 무서워한단 말이오?”
“슌스케!!!!”
“대장께서 당신과 함께 할 일이 있어 온 것이 아니었다면, 이리 얼굴 보고 말로만 대화를 나눌 일도 없었을 것이오. 당장에 내 도부터 나갔겠지.”
“네 이놈…….”
그 순간, 분노하는 듯 했던 요시미츠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러자 놀랍도록 비열한 뱀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요시미츠는 뱀이 날름거리는 것처럼 슌스케에게 말했다.
“그래. 나한테 이리 굴어서 일월조의 잔당들을 구할 수나 있겠느냐?”
“……뭐?”
슌스케는 요시미츠의 말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요시미츠는 그런 슌스케를 보면서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하켄. 그놈이 못 배운 무식한 사무라이라고는 하지만 충성심은 제법 있는 놈이로고. 네놈이 날뛰어서 내가 어찌 될 것을 걱정해 거짓을 말하였으니 말이다.”
“……거짓?”
“일월조의 잔당들. 그놈들을 죽여서 내가 얻는 게 무엇이라고?”
“사, 살아 있다고?”
슌스케의 눈이 흔들렸다. 슌스케가 데려온 일월조의 수하들은 대부분 조선에서 죽었다. 목숨을 걸고 임무를 하는 상황에서, 실력이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하지만 늘, 본토에 남겨놓고 온 남은 수하들과 그 가족들이 마음에 걸렸던 슌스케다. 그런데, 타케노는 분명 그들이 성치 않다고 했는데 요시미츠는 아직 그들이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 살아는 있느니라. 남자들은 병신을 만들어서 광산에 처박았고, 여자들은 유곽에 팔았지.”
“…….”
슌스케의 몸에서 뭉클거리면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요시미츠는 그런 슌스케의 살기를 또렷하게 느꼈지만 떨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파앗!! 어느새 요시미츠의 뒤에 나타난 닌자가 슌스케의 살기를 흘려보냈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뚝하고 모습을 나타낸 닌자의 등장에 슌스케가 이를 뿌득하고 갈았다.
“오로치(大蛇)!!!!”
닌자는 비늘을 하나하나씩 만들어 이어붙인 특이한 옷을 입고 있었다. 만우는 육안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흐릿한 존재감을 가진 오로치란 닌자의 등장에 눈가를 좁혀 떴다.
“계속해서 거슬리던 놈 중 하나가 저놈이구나!”
만우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긴 했지만, 계속해서 거슬리던 놈이 오로치라는 놈이라는 것에 흥미를 보였다.
“두 놈이 더 있다.”
만우는 슌스케에게 말했다. 슌스케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오로치는 슌스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요시미츠!!!!”
“이놈이…… 감히 어르신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자꾸만 자신의 이름을 불러대는 옛 사냥개가 마음에 들지 않은 요시미츠의 얼굴이 찡그려지려는 찰나, 요시미츠가 입을 떡 벌리고 부들거리며 떨었다. 콰아아-!!!
“어, 어헉!”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쥐어짜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요시미츠는 만우를 쳐다봤다. 왜 그러느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요시미츠는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네놈이야말로 본주가 이야기하는데 어디서 언성을 높이는 거지?”
은근슬쩍 자신과 만우를 동일 선상에 올려놓으려 했던 것을 지적하는 만우였다. 물론 그 기저에는 자신 앞에서 슌스케를 깔보는 요시미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우에게는 태정대신이니 뭐니 다 필요 없었다. 슌스케가, 요시미츠나 같은 왜인일 뿐이었다. 그리고 더 정이 가라는 쪽을 택하라면 당연히 자신 아래서 강해지려고 발버둥을 치며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발악을 하는 슌스케였다. 스파밧!!!! 하지만 더더욱 놀라운 점은, 만우가 요시미츠 앞을 막고 선 오로치라는 닌자는 쏙 빼놓고 정확히 요시미츠만 노렸다는 점이다.
“어디 한번 실력을 볼까?”
그런 오로치는 요시미츠의 변고를 눈치채고서는 만우를 향해 섬전처럼 달려들었다. 만우는 오로치의 신형이 쭉 늘어나는가 싶더니 코앞에서 기척이 느껴지는 것에 히죽 웃어 보였다. 펑!!! 만우의 손바닥이 펑하는 소리와 함께 오로치의 몸통을 두드렸다. 그런데 사람 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죽으로 된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퍼엉-!!!!! 그러자 뿌연 연기가 펑하고 터지더니 요시미츠의 몸이 통나무로 변했다. 동시에 만우는 자신의 뒷덜미를 노리고 날아드는 예리한 검격을 느꼈다. 스악!!! 날카로운 단검을 얼마나 빠르고 간결하게 휘두르는 것인지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만 났을 뿐이다. 놀라울 정도로 숙련이 된 암살자의 검이었다. 지잉-!! 만우가 검지손가락에 지기(脂氣)를 둘러 단검을 옆으로 밀어냈다. 맨 손으로 날카로운 단검을 밀어냈으니 놀랄 법도 하련만, 오로치는 놀라지 않았다. 스윽!! 만우가 자신의 검격을 막아내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자가 되어 땅 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재미있는 재주를 쓰는 놈이구나!”
만우는 흥이 돋아 손가락을 들어 푹푹하고 바닥을 찔렀다. 그러자 짚으로 만든 다다미 바닥에 주먹만 한 구멍이 펑펑하고 뚫렸다.
“흙바닥도 아닌데 두더지처럼 바닥을 기는 것이냐?”
만우는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바닥으로 파고든 것도 모자라, 고속으로 기동하는 것을 느끼면서 환하게 웃었다. 상대하는 재미가 있는 놈이었다. 중원에서 별의 별 무공을 쓰는 이들과 붙어봤다 생각했지만, 이 닌자라는 놈들은 중원의 기이한 무공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자들이었다. 서거거걱!!!
“호오?”
쑤욱! 고속으로 바닥 아래서 이동하는 오로치를 개미를 눌러죽이듯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던 만우의 신형이 아래로 쑥하고 꺼졌다. 어느새 만우가 선 다다미 바닥을 동그랗게 오로치가 잘라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쑥하고 떨어져야 할 만우의 신형은 우뚝 멈춰섰다. 허공에 기로 만든 발판을 만들어 서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된 만우였기 때문이다.
“커, 커흑…….”
그사이 요시미츠는 거의 바닥에 늘러붙어 컥컥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오로치와 싸우는 와중에도 요시미츠를 짓누른 만우의 기세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