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계략의 소용돌이 속으로(4)2021.02.16.
철저하게 며칠, 몇 달이 걸리건 목표물을 분석하고 끈질기게 기다린다. 그래서 약간의 틈이 보이면 그 틈을 파고들어 상대방의 명줄을 기어코 끊어놓고야 마는 이들이 바로 살수다. 그러니 그런 지독함을 가진 살수들을 무림인들이 좋아할 리 없다. 그렇게 살수들에게 허무하게 죽으려고 몇 년, 몇 십년간 무공을 익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중원에서는 모든 살수들이 은밀하게 활동을 했다. 심지어는 살수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집단을 이뤘다가 잘못 의뢰를 받으면, 만우가 그랬던 것처럼 전부 연대책임으로 아작이 나는 경우도 있으나 웬만해서는 거대문파나 세가들도 함부로 그들을 건드리지 못 했다. 그런데 왜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영주, 성주들이 이들을 직접 키운다고?”
만우는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 확실히 알았다. 왜는 무사보다 살수들의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났다. 괜히 만우가 사무라이들을 보고 실망했던 것이 아니다.
“예.”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왜 그렇게 금각사까지 오면서 지나쳤던 부촌에, 높고 좁은 건물들이 많았는지 이해가 간 것이다. 언제 어떤 인자가 목숨을 노릴지 모르니 자신의 목숨을 위해 인자들이 들어오기 힘든 건축물들을 짓고 그런 건축들이 발달한 것이다.
“그런데 그 요시미츠라는 작자 말이지.”
우뚝. 만우가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그러자 슌스케와 동군영도 따라 멈췄다. 타케노가 고개를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어서 따라와라.”
타케노가 말했고, 슌스케가 그 말을 만우에게 해줬지만 만우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검지손가락을 말아 튕겨냈다. 핑!!!! 따앙-!!!! 만우의 지풍(脂風)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허공에서 비수를 바깥으로 쳐냈다. 만우는 끝까지 살기 한 줄기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우리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듯한데 말이야.”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 지극히 실용적인 인물이라는 것이 요시미츠에 대한 슌스케의 평가다. 그는 불리할 때는 자신을 낮춰 더 큰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을 조금도 주저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희생 당한 가문이 바로 토키 가문이다. 생존 본능이 좋은 요시미츠는, 만우 일행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나으리. 아마 나으리의 심중에 뭐가 있는지를 대충 읽어낸 모양인데. 요시미츠란 자.”
만우가 손을 스윽하고 치켜들었다. 우웅-!!! 파바박!!! 우뚝!
그러자 인술의 힘으로 소리도, 기척도, 살기도 없이 날아오던 암기 수십 개가 허공에 그대로 멈춰섰다. 동군영과 슌스케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만우가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을 것이다.
“무, 무슨…….”
타케노도 놀란 것인지 입을 꿈벅거렸다. 이곳에 인자들이 있다는 것을 타케노도 이제야 눈치를 챈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우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인자의 코끝하나 본 사람이 없었다.
“우리와 손을 잡고 거래를 할 것인지, 빼앗을 것인지를 결정할 모양이다. 제 수하들을 이용해서.”
후두둑!!! 만우의 손짓 한 번에 일행들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던 암기들이 빗방울처럼 후두둑 소리와 함께 떨어져내렸다.
“건방지게 말이야.”
저벅!! 쿠우웅-!!!!! 만우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만우의 눈이 희번득하더니 인자들은 심령까지 흔들리는 거대한 충격과 함께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일 수. 만우가 이 근방에 있는 모든 인자들을 무릎 꿇리는 데에는 일 수 이상이 필요가 없었다.
“가서 전하라!”
만우의 목소리가 전음으로 화해 이 근방을 넘어 금각사 전체에 울려퍼졌다. 단순한 전음 수준이 아니라 전설 속 육합전성(六合傳聲)에 가까운 기예였다.
“검주 만우가 왔다고. 태정대신과 마주보고 앉아 할 이야기가 있다고.”
우르릉-!!!! 대기가 만우의 공력에 몸을 사리며 한차례 우르릉하고 떨었다. *****
“검……주?”
요시미치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명으로부터 무던히도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황금을 써가면서까지 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개방과 하오문 등을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중 요시미츠가 잊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황실에 맞서고도 명 황실에서 어쩌지 못하고 놓아 보낸 한 무인의 이야기였다.
“검주 만우. 정녕 검주 만우란 말인가?”
금각사 3층에서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려다보고 있던 요시미츠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데없이 갑자기 이곳에서 검주가 등장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군……?”
촤라라락!!!! 만우의 일갈에 금각사 정원 곳곳에 숨어있던 인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쓰러지는 것이 요시미츠의 눈에 들어왔다. 저자가 진짜 검주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가공할 만한 경지에 오른 무인임이 틀림없었다.
“저분을 모셔오거라!”
저자가 만약 진짜 검주라면, 아니 검주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더 이상의 시험은 불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요시미츠는 수하에게 말했다.
“허, 허억!”
그런데 그 순간, 요시미츠의 눈이 커졌다.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에, 어느새 만우의 신형이 허공에 둥둥 떠서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시미츠 태정대신?”
만우는 검은 무복 자락을 휘날리며 요시미츠에게 말했다. 만우를 마주한 요시미츠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직접 마주한 만우의 기도는 가공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란 것을 단박에 느꼈기 때문이다. 요시미츠는 심호흡을 작게 한 번 해보이고는 합장을 했다. 그는 태정대신이지만, 동시에 출가한 승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맞습니다, 검주 시주.”
“검주……를 아는 모양이군.”
만우는 왜어를 할 줄 모르고 요시미츠 역시 조선어를 할 줄 모른다. 하지만 요시미츠는 한어(漢語)를 웬만큼 했다. 만우가 한어로 외친 말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이 쉽겠소이다.”
만우는 자신을 아는 듯한 요시미츠의 표정이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요시미츠의 눈에 서린 경외를 읽어낸 덕분이다.
“나으리! 말 잘 했으니 어서 올라오십쇼!”
만우가 동군영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동군영와 슌스케가 멍한 표정으로 만우를 쳐다보고 있다가 헐레벌떡 쓰러진 인자들을 지나쳐 금각사 쪽으로 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요시미츠는 만우가 허공을 밟고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그렇게 검은 무복을 휘날리면서 내려오는 만우는 영락없는 신장(神將) 같았고, 요시미츠의 기가 막힌 생존 본능은 그가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검주, 이자의 손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요시미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군영을 맞이했다. ***** 마존(魔尊) 남요명은 천마의 직속호위대인 천마대의 대주로, 그 역시도 무림십좌의 삼존 중 하나의 좌(座)를 차지하고 있는 화경의 고수였다. 그런 남요명이,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침소에 남겨진 서신을 쳐다봤다.
“소교주의 경지가 벌써 하늘에 닿았는가.”
그 서신은 다름 아니라 혈세천마의 아들이나 투귀대의 대주, 지금은 반역자가 된 주창이 남기고 간 서신이었다. 그런데 주창이 다녀간 것을, 이곳에 모인 육백 명 중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촤악! 어릴 적 주창에게 무공의 기초를 가르친 것이 바로 마존 남요명이다. 주창의 스승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남요명은 제자의 성장에 뿌듯해하면서도 그 제자가 마교의 반역자가 되었다는 것에 무거운 표정으로 서신을 펼쳤다.
“……검주. 드디어 온 것인가.”
남요명은 주창이 남기고 간 서신을 읽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투귀대는 합류하라는 교주의 명은 거역했지만, 검주 만우를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인 듯했다.
“교주님을 뵈러가야겠다.”
남요명은 저녁도 다 먹은 시각이 되었지만 검주가 도착했다면 이를 교주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침소에서 나섰다. 근데, 그 때 그런 남요명의 눈에 숲으로 들어오는 초입 부근에 일렁이는 횃불을 발견했다.
“마존. 덴노께서 친히 신교주를 보시고자 왕림하셨소. 어서 안내를 부탁드리오.”
그때 마존을 발견한 왜의 귀족 중 하나가 다가와 마존에게 말했다. 마존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시각에 말이오?”
“거사를 도모하는 처지에 시각이 문제가 되오? 어서 안에 기별을 넣어주시오.”
“씁…….”
마존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요시미츠에 맞서려는 덴노나 귀족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마교였기 때문에 마존은 혀를 차면서 몸을 돌렸다. 중원에서라면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이리 찾아온다 한들, 혈세천마를 만날 수 있을 리 없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먹을 장기말로 보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마교는 덴노와 귀족들의 도움을 받는 대신, 요시미츠를 제거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마교의 체면이 어쩌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마존은 고개를 털어 잡념을 떨쳐냈다. 이건 무엇보다도 교주인 혈세천마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그를 호위하는 직속호위대인 천마대의 대주인 자신은, 교주의 결정에 조금의 의문도 품어서는 안 된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그것 이외에 자의적으로 판단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기다리시오. 내가 가서 기별을…….”
쾅!!!!!! 그런데 그 때, 혈세천마의 침소에서 거대한 폭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와 함께 마존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고오오오-!!!!! 교주의 침소에서 변고가 일어난 것을 본 순간, 마존의 기도 자체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마존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귀족은 마치 악귀로 변한 것 같은 마존의 기세에 얼굴이 퍼렇게 질려서는 뒤로 물러났다.
“천마대! 집합!!!!”
콰장창!!!!! 마존의 사자후와 함께 마존의 침소문을 부수고 그의 애병인 유엽도가 마존의 손으로 날아들어왔다. 파바박!!! 동시에 사방에서 천마대의 고수들이 뛰쳐나왔고 마존은 그들을 정렬시킬 새도 없이 한줄기 빛으로 변해 혈세천마의 침소로 달려나갔다. 파바바박!!!! 삽시간에 마존의 주변이 뿌옇게 물들더니 몇 번 땅을 박차는 것만으로도 수십 장을 뛰어넘어 마존의 신형이 혈세천마의 침소 근처에 나타났다.
“천마시여!!!!”
마존은 굉음이 터져나온 혈세천마의 처소를 보고서는 입을 떡 벌렸다. 그곳은 마치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성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처소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파편들이 가루가 되어 주변 나무들에 암기처럼 박혀있었다. 그리고 처참한 현장의 가운데에는 한쪽 소매가 터져나가 맨살이 어깨까지 드러난 혈세천마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서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쥐새끼 한 마리 잡으려다 이런 것이나 소란떨지 말라.”
“쥐, 쥐새끼라면…….”
“주창. 그 아이가 왔었다.”
혈세천마는 붉은 수기(手氣)가 아른거리는 손을 들어 보이며 비릿하게 웃었다. 혈세천마의 무공은 천마신공 중에서도 만변(萬變)의 묘리 속 패도적인 위력이 일품인 천마쌍장(天魔雙掌)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혈세천마의 손에서는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고연 놈. 그래도 아버지이자 교주인데. 이 아비의 꾀주머니를 죽이려 하다니 말이야.”
혈세천마는 클클거리며 웃었다. 그 말에 마존은 혈세천마의 뒤에 마군자 마원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제법 머리를 썼어. 하지만 아직 부족해. 그놈이 이 천마를 꺾기에는 말이다.”
“죽여주시옵소서, 천마시여!”
감히 반역도가 혈세천마에 이르기까지 호위대인 천마대가 몰랐다는 것은 크나큰 귀책 사유다. 하지만 혈세천마는 끌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 성히 돌아가지는 못 했으니, 잡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색대의 인원을 늘려라!”
마존은 혈세천마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핏자국을 보고서는 역시 천마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혈세천마가 멀쩡한 것을 보니 저 핏자국은 천마의 것이 아니라 주창의 것으로 보였다. 소교주 주창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는 하지만, 수십 년을 일패(一覇)로 살아온 천마의 경지에 도달하기에는 무리였다. 마존 남요명은 거대한 태산처럼 보이는 혈세천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부복했다. 하지만, 그 탓에 남요명은 미처 보지 못했다. 파르르 혈세천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소맷자락을 따라 핏줄기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말이다.
‘……주창!’
혈세천마의 두 눈이 거센 풍랑을 만난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