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성악과 성선(3)2020.12.15.
당장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 사람을 구해줘도, 보따리 내놓으라고 따지는 것이 바로 인간이란 존재다. 반면 동군영은 공자왈, 맹자왈하면서 그럴듯하게 써놓은 글만을 맹신했다. 만우는 절대로 인간이란 그럴 수 없는 존재란 것을 알고 있었다.
“크흐흐. 이 정도면 짭짤해. 안 그래?”
“맞습니다. 내려가서 팔고 오면 꽤 많은 돈이 생길 것 같습니다.”
“얼마나 좋아. 녹산, 그 무식한 놈이 사라지니까 일한 대로 다 가질 수 있잖아?”
“하지만 본산에 식량이 다 떨어져 간다고…….”
놈들은 보부상에게서 빼앗은 보따리들을 펴놓고는 이리저리 물건들을 분류하면서 킬킬대고 있었다. 하지만 본산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말에 한 놈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에이. 그게 우리랑 뭔 상관이야. 우리 애들만 잘 먹이면 되지. 솔직히 말해서, 고생은 우리가 다 하는데 그걸 공평하게 나눠가지라는게 말이 돼?”
“맞습니다. 밤이슬 맞고 찬바람 맞으면서 일하는 건 저희이지 않습니까.”
“쓸데없이 식량만 축내는 것들만 많아서는. 쯧. 먹고 싶으면 일하라고 그래.”
“안 그래도 형님 집에서 보모 노릇이라도 하라고 했습니다. 흐흐흐.”
동군영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매일 죽어라 일하는 자신에게 일을 열심히 한다면서 칭찬을 하던 옆집 남자였다.
“그런데 사라진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요?”
“몰라. 다 뒈졌겠지. 솔직히 내가 거기 안 딸려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래?”
“맞습니다. 흐흐.”
동군영은 어깨를 부들거리며 떨었다. 그의 눈앞을 가리고 있던 거짓이 깨져나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만우는 혀를 쯧하고 차고는 동군영을 다시 들쳐 업었다.
“마저 다 봐야지.”
“…….”
만우는 다시 뛰어올랐다. 척사영이 그런 만우의 뒤를 따랐다. 만우는 그렇게 나무 위를 건너뛰어 순식간에 무릉도원에 도착했다. 스으윽! 기척을 숨기려고 만우가 마음을 먹은 이상, 무릉도원의 사람들은 만우와 동군영, 척사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만우는 그렇게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걸었다. 허공답보에 척사영의 눈이 커졌다. 대신 척사영은 기척을 숨긴 채 경신법으로 나무를 밟고 뛰어오르며 만우를 뒤따랐다.
“여기지? 무릉도원.”
“맞네. 그런데…….”
동군영은 두 눈을 끔뻑였다. 분명 녹산이 다스릴 때에는 분위기가 이렇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피폐하기 그지없는 몰골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지붕 위에 내려앉은 동군영의 얼굴이 굳었다. 나무로 만들어 틈이 많은 집 안에서 여자의 비명에 가까운 교성소리와 헉헉대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여기. 식량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주세요. 애가 집에서 굶고 있어요.]
[에이씨. 어디서 수작질이야? 하도 애원을 해서 기껏 받아줬더니. 뒈진 네 남편한테나 가서 애원해. 안 꺼져?]
짜악! 동군영의 표정이 굳었다. 헉헉대는 남녀의 교성이 잦아든 후 거친 남자의 목소리와 애원하다가 비명을 내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이, 이게…….”
녹산과 이곳에 그런 참사가 벌어진 것이 채 며칠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은 불과 그 며칠 사이에 완전히 지옥이 되어 있었다. 힘을 가진 자가 왕처럼 굴었고, 힘이 없는 자는 그런 이들의 폭압 아래서 신음했다. 구심점이 사라지자 억눌려 있었던 인간의 더러운 본성이 눈을 뜬 것이다. 폭압과 가난을 못 이겨 산 속으로 들어왔으면서도, 이 안에서도 다시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가 나뉘었다. 그리고는 바깥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응?”
동군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군영은 이곳에서 희망을 봤다. 없어도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누가 누구를 억압하는 것이 없는 이상향을 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무릉도원은 그런 이상향이 아니었다. 지옥. 오히려 바깥보다 심한 지옥이었다. 폭력과 억압이 사방에 만연했고 약자들의 절망이 동군영이 있는 곳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만우는 팔짱을 낀 채 놀랄 것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으리가 서책에서 봤던 것처럼 이 세상은 녹록치 않으니까.”
“아니. 이렇지 않았네. 분명 내가 본 무릉도원은…….”
“그거? 힘 있는 놈이 위에서 꽉 내리누르고 있으니까.”
만우는 피식 웃었다. 이것보다 훨씬 더 심한 것을 만우는 중원에서 수도 없이 봤다. 검 조금 휘두를 줄 안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을 껍질까지 벗겨먹는 사기꾼은 물론이고, 색공을 익혀 무수히 많은 아녀자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놈도 있었다. 그저 짜릿하기 때문에 살인을 하고 피를 마시는 놈들도 있고 제가 먹고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광인이 넘쳐나는 곳이 바로 무림이다. 그곳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검을 뽑아 상대방을 말살시키려는 놈들이 버젓이 무림맹이니, 마교니, 사림곡이니 하면서 떵떵거리면서 살아간다. 그런 광인들 사이에서 만우가 찾은 진리는 하나였다. 강자생존(强者生存). 강한 사람은 살아남는다. 약하면 그 광인들 사이에서 휩쓸리고 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그 모든 풍파를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뿌리 깊은 바위가 되면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다. 아니, 그 정도라면 세상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사람은 약해. 정신도, 몸도 약하지. 짐승보다도 약해. 짐승은 인간보다 오래 안 먹고, 오래 안 마셔도 살아남거든. 그런데 왜 사람이 사람인 줄 알아?”
만우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선을 지킬 줄 알기 때문이야. 그 선이란 것은 강력한 힘이나, 강력한 법에 의해서만 지켜지고. 그런데 여기를 봐.”
만우는 손으로 무릉도원을 가리켰다. 이곳은 작은 자연이었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었다. 그들을 가두고 있던 힘과 법이 사라지자 짐승처럼 돌아간 이들이 즐비한 곳이다.
“나으리가 본 건 희망이 아니라.”
만우는 푸른 안광이 비치는 눈으로 동군영을 쳐다봤다. 동군영은 큰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환상이었던거야. 인간의 본질을 서책으로만 공부했으니까.”
만우의 목소리가 동군영의 귓가에 인이 박히듯 콱콱 박혔다. *****
“여기가 동래현이다.”
“동래(東來)라. 활기찬 곳이네.”
만우는 바다 특유의 짭짤한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활기찬 분위기에 눈을 반짝였다.
“왜국이 멀지 않아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네. 거기에 상왕전하께서 유생의 교육을 위해 향교까지 지어주셨기 때문에 유림의 서생들도 많은 곳이지.”
“유림의 서생은 모르겠고.”
동래의 읍성은 그 규모가 만우가 조선에 들어와서 본 것 중에 한양과 의주 다음으로 컸다.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까무잡잡하게 타있었지만 표정이 어둡지 않고 밝았다.
“나으리. 주막을 찾으십니까요?”
동군영을 필두로 한 만우 일행이 들어서자 사방의 시선이 집중됐다. 일행의 구성이 꽤나 특이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네 명이고 남자가 만우까지 포함해 여섯 명이었다. 그런데 여자들은 모두 아리따웠고 남자들 중에는 까무잡잡한 이국적인 외모의 문형일에 산적 같은 외모의 필두, 거기에 잘생긴 감령에 슌스케까지 섞여있었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모였을까 싶은 이들이 나타나니, 당연히 주변의 시선이 모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어디 괜찮은 주막이 있느냐?”
동군영은 어린 소년이 넉살 좋게 다가와 하는 말에 피식 웃었다. 만우는 그런 동군영을 보면서 쓰게 웃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웃고 있었지만, 엉망이 된 무릉도원을 갔다 온 이후 동군영은 일주일 동안이나 고열에 시달렸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기운을 차리고 일어났지만, 동군영은 견고하게 마음의 벽을 세웠다. 그게 만우에게는 느껴졌다.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지.’
아직 동군영이 세운 것은 울타리 정도다. 하지만 현실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부딪치다보면 그게 점점 단단하고 견고한 성곽이 될 것이다.
‘문만 열어놓으면 돼.’
그렇게 마음에 울타리와 성벽을 쌓아야 한다. 그래야 단단해지는 법이다. 단지 그 성벽이나 울타리에 문만 잘 열어놓으면 된다.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오세요. 동래에서 가장 훌륭한 국밥을 하는 곳을 안내해드릴게요!”
동군영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지만 예전처럼 소년을 완벽하게 믿지 않았다. 무릉도원의 진상을 깨닫게 되면서 인간불신의 상태에 다다른 것이다. 그 인간불신도 당장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두드러지는 것 뿐, 시간이 지나면 동군영도 적당히 조절할 줄 알게 될 것이다. 선의(善意)만이 능사가 아니란 것을 동군영이 이번 기회에 제대로 깨달았기를 만우는 바랐다. 결국 무릉도원의 진상은 근처 현들에 알려졌다. 그 때문에 각 현에서는 관병을 그곳에 파견해 고을에서 무단으로 탈출한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그러면서 한 가지 나온 사실은, 그렇게 무릉도원으로 도망친 이들 중 정작 폭정과 가난에 시달려 들어간 자들은 채 3할도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머지 7할은 전부 죄를 짓고 도망친 죄인들이었다.
“규자 이모!!!!!”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가 개나리 덩쿨로 만든 울타리가 쳐진 주막에 들어서면서 크게 소리쳤다.
“손님 모셔왔어!!”
“손님? 어이구, 어서들 오세요.”
꼬마가 부른 규자 이모라는 이름의 주모가 푸짐한 풍채를 흔들거리며 뛰어나와 만우를 비롯한 일행들을 안내했다. 다행히 장기간 머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묵어가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으리. 그냥 감찰관인거 밝히고 관아로 가면 되지 않아?”
옆에서 방매가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돈이 아까운 것이다. 동군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찰을 위해 보빙사보다 한 발 먼저 동래에 왔으니, 신분을 밝히고 돌아다닐 수는 없어. 감찰이란게 원래 그런 거니까.”
왜국으로 가기 위해서 보빙사는 반드시 동래를 거쳐야 한다. 보빙사는 조선을 대표하는 얼굴인 만큼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엄하게 감시를 해야 한다. 사신으로 타국에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빙사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세를 물지 않는 조선의 특산품을 왜로 넘어가 팔고, 왜에서 반대로 세를 물지 않고 특산품을 들여와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신을 감찰하고 감시할 수 있는 것은 감찰관이 유일했다.
“뭐, 어사랑 비슷하네?”
만우가 씩 웃었다. 동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빙사가 만약 그런 부정을 꾀하고 있다면 한양에서부터 물건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곳, 동래현에서 물건을 준비해놓은 다음 바로 가져갈 것이다.
“옹주마마.”
“으아앗. 아직도 옹주에요?”
“한 번 옹주마마는 영원한 옹주마마시죠.”
방매가 팔을 벅벅 긁었지만 동군영은 웃기만 했다. 방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외람되오나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방매에게 옹주라는 이름이 붙은 순간 동군영은 철저하게 예를 지켰다. 유학자에 양반이니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