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성악과 성선(1)2020.12.08.
가부좌를 틀고 눈을 반개한 채 고양감에 빠져있던 만우의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후우우-! 만우의 머리 위로 꽃봉오리를 피웠던 세 송이의 꽃과 흩날리는 꽃잎들이 만우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반짝거리는 하늘의 별을 품은 듯 한 만우의 안광이 터져 나왔다가 갈무리 됐다.
“이게 진인(眞人)이구나.”
격렬한 전투 와중에 찾아온 현경의 경지였다. 그것을 갈무리할 시간이 만우에게는 필요했다. 만우는 팔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에 씩 웃었다 땀방울의 색깔은 탁했다. 만우의 몸에 쌓인 탁기와 불순물이, 만우가 기천무를 추면서 몸 밖으로 배출이 됐다는 뜻이다. 화르륵! 만우의 손끝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몸에서 빠져나온 탁기를 불태우는 삼매진화의 불꽃이었다.
“주작의 정화가 아니었다면…….”
주작이 걱정한 것과는 달리 만우는 혈사와 그가 부리는 악수를 상대로 승리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주작이 건네준 정화와 혈사의 경험 부족이 큰 역할을 했다. 주작이 준 정화가 불가사리와 궁합이 제대로 맞아 떨어져 그의 악수들을 손쉽게 베어냈다. 동시에 혈사의 경험 부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혈사가 마흑술만 부리지 않고 독문무공을 펼칠 수 있었다면 그곳에서 쓰러지는 것은 만우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전투를 악수에게만 의존했다는 것과, 불사마공이라고 하지만 무너져 내려가는 혈사의 몸은 만우를 쓰러뜨리지 못 했다. 이백 년 동안 문드러진 것은 혈사의 몸만이 아니라 혈사가 가지고 있던 전투 경험이었다. 만우는 기천무를 추면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머릿속으로 되뇌였고, 심상 속에서 혈사와 이무기를 상대로 난투를 벌이면서 깨달은 것들을 수습했다.
“심검이라.”
만우는 검강을 홀린듯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음이 가는 곳에 검이 있다는 심검(心劍)의 경지는 아직 요원했다. 하지만 만우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현경이란 지고한 경지에 다다른 것은 무림 역사를 통 틀어서 열 손가락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런 지고한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어차피 그 누구도 만우가 나아갈 길을 알려줄 수 없다. 만우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할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는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난 지금으로도 충분히 강하니까.”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경계선 그 너머를 보고 왔지만 만우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렸다. 손에 들고 있던 이룡검이 부르르 떨었다.
[괴물.]
“시끄러. 자꾸 괴물이래.”
소서노의 말에 만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소서노는 만우가 현경에 오른 순간부터 만우를 괴물이라 불렀다. 소서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다. 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니까. 넌 이미 반선이나 다름없다.]
“반선? 아니.”
만우는 피식 웃었다. 반선(半仙)이라니. 자신도 현경이면 그런 경지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위로 더 올라갈 길이 까마득히 멀다는 것을 오히려 깨닫게 됐다.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현경에 오르면서 새삼스레 깨달았다고나 할까.
[우어어엉!]
“그래. 고맙다 짜샤.”
만우는 자신의 공을 알아달라면서 우는 불가사리를 쓰다듬었다. 불가사리가 기분 좋은 듯한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얻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만우는 혈사와 이무기를 함께 상대하면서 깨달았다. 만우는 자신이 가진 바를 모두 쏟아 부을 상대가 없다는 것에 무료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는 경계선 안에 없다면, 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된다. 만우는 강자가 즐비할 그 경계선 너머를 떠올리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손이 근질거렸다. 휘오오오오-!!! 그런데 그 때, 만우의 기감에 객잔의 허공 위로 광풍이 휘몰아치는 것이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바람이 많이 부는구나, 하고 생각했겠지만 현경에 오른 만우에게는 느껴졌다. 누군가가 오고 있었다. 바람이 절로 모여드는 것처럼, 등장만으로도 자연을 저절로 움직이는 존재가. 텅. 만우는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세차지만 시원한 바람이 만우의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창틀 밖으로 발을 내딛은 만우가 허공을 딛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흐음.”
주변에 사람들이 못 보게 하기 위함인지 끼기 시작한 짙은 안개를 보면서 만우는 위로 걸어 올라갔다. 허공답보가 이제는 평지를 걷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현경에 오르기 전에도 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그 때는 거의 내공을 독에 있는 물을 쏟아내듯이 해야 했는데, 이제는 적은 내공으로도 가능해졌다.
“좋네.”
만우는 안개와 함께 휘몰아치는 바람을 만끽하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고생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때 만우의 옆에 붉은 적발에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주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허공에서 생겨난 것 같았다. 만우는 현경에 올랐음에도 전혀 주작의 기척을 느낄 수 없다는 것에 역설적으로 신수의 힘을 체감했다.
“고생이랄 것까지야. 이제 보니 쓸데없는 고생이었을 것도 같고.”
현경에 오른 만우에게 혈사와 이무기는 더 이상 큰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만우는 주작의 경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예 격 자체가 다르다는 소리다. 그러니 주작이 나섰다면 혈사와 이무기는 아마 일합에 재가 되었을 것이다. 만우는 주작에게 말했다.
“그 놈은 혈사란 놈이었다. 중원 무림에 혈겁을 일으켰던 대악인이지. 무려 이백 년을 살아온 놈이기도 하고.”
“오면서 봤답니다.”
“봤다고?”
만우는 주작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했지?”
“어떻게 하긴요.”
주작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그 안에 숨은 붉은 적안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끔찍한 마공을 익힌 자는 그가 벌인 억겁의 원죄로 인해 가는 곳마다 재앙을 불러일으킨 답니다. 속세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자이기도 하지요.”
“죽였다?”
만우의 말에 주작은 손을 내저었다. 그런 끔찍한 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걸 보면 신수가 아니라 그냥 사람 같았다. 하지만 만우가 궁금한 건 죽였다는 부분이 아니었다.
“불사마공. 그 자가 익힌 무공을 불사마공이라 부르지. 그 어떤 것으로도 죽일 수 없기 때문에.”
혈사는 불사마공을 익혔다. 마흑술의 정수인 심장이 깨지기는 했지만 불사마공으로 인해 혈사는 죽일 수 없었다.
‘심검……이 어려운 건 아니겠지만.’
검사가 아니니 신수인 주작이 심검을 다룰 수 있는지는 만우도 몰랐다. 주작은 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리고는 조신하게 웃었다.
“그냥 톡 치니까,”
“음?”
“소멸되더라고요.”
주작은 가볍게 말했지만 만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죽인 것이 아니라 소멸을 시켜버렸다. 혈사란 이가 존재했다는 흔적 자체를 지워버렸다는 소리다.
“그런가.”
“네. 덕분에 차세대 동해 용왕님의 등극도 원활하게 이뤄졌고, 이곳의 일도 잘 처리됐네요. 검주 만우, 그대 덕분이에요.”
주작은 예쁘게 웃어보였다. 무화 임수미에 뒤쳐지지 않는 미모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괜히 무화(無花)란 별호가 붙은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인간 주제에 신수의 미(美)에 필적하니 말이다.
“제 선물은 잘 쓰셨나요?”
“선물이 아니라 선금이겠지.”
만우는 단전 안에서 느껴지는 주작의 정화에 피식 웃었다. 주작의 정화는 그 자체가 그 어떤 기운보다도 정순했다. 거기에 만우의 공력과도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주작의 정화로 인해 만우의 공력이 정순해지고 깨끗해졌다. 한 번 더 걸러지는 역할을 정화가 해주었기 때문이다.
“품고 있으시면 후회할 일은 없으실 거에요.”
주작의 말에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의 정화는 어떤 식으로든 만우에게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주화입마에 걸려도 자연치유가 가능할지도 모르지.’
무인이 주화입마에 걸린다는 것은 무인으로서의 인생이 끝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화입마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소림사의 대환단급의 영약이 필요한데, 그걸 쉽게 구할 수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것이 심마(心魔)요, 주화입마다. 주작의 정화는 삿된 것을 불사르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마(魔)에 의해 일어나는 일을 막아줄 것이다.
‘그냥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이지.’
주작을 쳐다보니 순순히 말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때 주작이 만우에게 말했다.
“어때요. 그대의 가슴 속에서 커져나가던 불길. 잡으셨나요?”
“내 가슴 속의 불길?”
“이런. 정작 당사자는 모르고 있던 모양이네요. 뭐, 검주 만우, 당신 일종의 욕구불만이었어요.”
주작의 말에 만우의 눈이 커졌다.
“당신의 강함을 겨루고 싶은 욕망. 손에 쥔 힘을 마음껏 휘두르고 싶은 욕망. 당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이길 수 없는 상대와의 피를 말리는 혈투에 대한 욕망.”
주작은 만우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전 불을 다루죠. 그 때문에 검주 당신의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꽃도 보았던 것이고.”
“……뭐. 뒤늦게 알긴 했다만.”
만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신도 모르는 것을 주작이 알고 있었다는 것에 괜히 께름칙했던 것이다.
“다른 신수들도 만나보세요.”
“다른 신수?”
“네. 그러다보면…….”
주작의 표정이 묘해졌다.
“다음 길이 열릴지도 모르지요.”
“다음 길…….”
만우의 두 눈이 반짝였다. 주작이 말하는 바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정화를 받아들이고, 경계선을 넘어가면서 현경에 올랐다. 그런데, 주작의 정화 같은 기운을 신수를 만나 몸에 품게 된다면?
“생사경(生死境).”
“그러면서 얻으시는 게 많을테니깐요.”
여러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경지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만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경지를 올릴 수 있다면 흡성대법을 익힌 놈들은 전부 생사경을 뛰어넘었을 것이다.
“검주, 그대가 가는 길에 방법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내가 가는 길…….”
만우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었다. 휘익!!!! 그러자 열린 창문을 통해 이룡검이 날아와 만우의 손에 잡혔다. 만우는 이룡검을 빼들었다. 차앙!!!!
“지금 내가 가고 싶은 길은 이거야.”
휘릭!
만우가 검을 휘두르자 이룡검이 군더더기 없이 허공에 하얀 선으로 된 원을 그렸다. 만우는 그 검을 들어 주작을 가리켰다.
“한 판 붙자. 주작.”
“어머.”
주작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만우는 그런 주작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미. 미친! 뒈지려면 혼자 뒈져라 괴물!]
[꾸어어엉-!!!]
뒤늦게 소서노와 불가사리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이미 만우가 검을 꼬나쥐고 흰 선이 되어 주작에게로 뛰어든 뒤였다. 꽈릉-!!!!!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 그 벼락은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다. 근방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하늘을 쳐다볼 정도였다. 그렇게 갑작스레 불어 닥친 벼락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하늘을 번쩍거리며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