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동군영의 용기(3)2020.11.28.
“삼두호?”
동군영은 놀란 호선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안 그래도 하얗던 호선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아는 악수인가?”
동군영이 호선에게 물었다. 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알다마다요. 탐라에 천 년이나 산 영물이 있는데, 백록담의 정수(淨水)를 먹고 사는 신통한 호랑이라 알려져 있었어요. 그런데…… 악수라니.”
호선은 아찔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 때 호선의 표정이 재차 변했다. 이번에는 경악을 넘어 공포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성성이(猩猩)?”
호선은 동굴 위의 종유석을 붙잡으며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검은색 원숭이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먼대륙의 깊은 숲과 암석산이 맞닿은 곳에서 살고 있다 알려진 성성이가 왜…….”
하지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악수는 그 떄부터가 시작이었다. 검게 물든 흑학과 꼬리가 네 개인 흑미호, 거기에 머리가 삼각형인 삼각독사까지. 모두 공통점이라면 악기를 품은 악수라는 것이다. 호선은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얼굴을 굳혔다. 저 많은 영물들이 악수가 되다니. 보아하니 저 영물들은 자신들의 자의로 악수가 된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악수로 변한 악수들이다. 자의적으로 악수가 된 이들에게는 악에 물들었긴 하나 영성(靈城)이 있는 반면, 지금 모습을 드러낸 악수들에게서는 짐승에 가까운 살의와 광기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백호로구나. 백호. 좋지. 비록 그 연차가 바라는만큼은 아니라고는 하나.”
만우도 영물들이 연달아 모습을 드러내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떄 만우와 대치하고 있던 혈사가 고개를 돌려 호선을 쳐다봤다. 그 순간 혈사의 두 눈에서 혈기가 쭉하고 치밀어올랐다. 호선은 황급히 손을 들어올려 선기를 끌어올렸다. 치이이익!!!
“도술도 제법이고. 쓸만한 놈을 얻겠구나!”
혈사는 그런 호선을 보면서 기쁜 듯 소리쳤다. 호선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번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선기를 끌어올려 막아내야 할 정도로 악기를 깊게 쌓은 악인이다. 아니, 솔직히 저 정도면 악선에 가까웠다.
“저 정도면 아무리 만우님이라고 해도 무리예요.”
호선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동군영에게 말했다. 하지만 도망갈 구멍은 이미 혈사에게 막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죽건 살건 여기서 만우를 돕는 수 밖에 없었다. 그 순간 동군영이 눈을 번쩍 떴다.
“호선. 저 심장을 노려야 해.”
“심장?”
호선이 동군영이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동군영은 피웅덩이 가운데 반쯤 잠긴 심장을 손끝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호선은 인상을 썼다.
“저런…… 마물이 있다니.”
호선은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악수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 악수들이 악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저 심장은 호선이 보아온 그 어떤 것보다도 악독하기 그지 없는 악기의 결정체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기와 절망, 고통을 머금은 저 심장은 악기가 가득 담긴 피를 계속해서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약점일 듯한데. 어떠한가. 할 수 있겠는가?”
호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런 사이한 방법으로 수많은 생명을 갈취한 저 악인이 자신의 약점을 그냥 드러냈을 리 없다. 그런데 그 때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만우의 목소리가 호선과 동군영의 귓가에서 울려퍼졌다.
[저 심장. 저걸 노려. 본주가 놈의 신경을 끌테니.]
호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만우를 노리고 있는 영물만 다섯 마리가 넘었다. 거기에 몇 백년을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는 혈사까지 버티고 서있었다. 아무리 주작에게서 그녀의 정화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만우도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 때 만우의 목소리가 재차 울려퍼졌다.
[뭐야. 설마....이깟 놈들에게 본주가 당할거라 생각하는건 아니지?]
호선의 두 눈이 커졌다. 만우를 쳐다보니 만우가 피식 웃고 있었다. 그러자 호선의 표정이 바뀌었다.
‘나도 이긴 괴물이야. 저 인간의 진정한 힘이 어느 정도일지는....아무도 몰라.’
호선은 만우가 한 번도 본신의 진력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이 환해졌다. 나름 열심히 도를 닦았고, 약하지 않다 생각했던 자신을 상대로 가볍게 이긴 인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혹시 모른다.
[알겠어요.]
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가 다른 영물들과 노괴물의 신경을 분산시켜주면 못할 것도 없었다. 날래고 재빠른 것이라면 조선의 영물들 중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확신하는 그녀였으니까.
“어사 나리. 절 도와주세요.”
호선이 동군영에게 말했다. 동군영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전음이라.”
혈사는 만우를 보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숨길 일도 아니었다. 혈사에게만 제 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만우에게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거. 고마워해야겠군.”
혈사는 만우를 보면서 끌끌거리며 웃었다. 그런 혈사 뒤에 선 삼두호가 만우를 보면서 살기를 폭사시켰다.
“쓸 만한 영물을 끌고 와줬어. 안 그래?”
만우는 피식 웃었다. 만우의 전신을 저릿하게 짓누르는 영물, 아니 이제는 악수가 된 그들의 기운인 과연 대단했다. 인간이 사는 인생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을 수양한 영물들에게 쌓인 기운들이다. 그것이 한 마리도 아니고 다섯 마리나 됐으니, 만우도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는 거야. 등신이.”
만우는 혈사를 보면서 비릿하게 비웃었다.
“설마. 그거 한 초식 막아냈다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주작이 걱정한 것도, 혈사가 자신만만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주작이 보기에 만우는 아직 20년을 조금 넘게 산 인간일 뿐이니까. 그리고 혈사에게도 만우는 후대의 무림 후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는 지금까지 살면서, 중원을 독보하면서도 단 한 번도 쉬운 싸움을 한 적이 없었다. 늘 정정당당보다는 암수에 맞서 싸워야 했고, 대결보다는 다수를 상대로 싸워야만 했다. 그건 만우의 실력이 지금보다 훨씬 못 할때도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만우는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다고 해서 게을리 상대한 적도 없었다. 늘 최선, 최고의 효율적인 방법을 추구했고, 그랬기 때문에 만우는 단 한 번도 검을 휘두를 때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간단하잖아?”
그렇기 때문에 만우는 늘 억눌려 있었다.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 것이다. 상대를 죽이는 것은 쉽지만, 살려야할지 죽여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늘 어렵다. 그것 끝에 사람의 목숨이 걸려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간단하게 결정을 내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만우는 늘 고민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만우는 늘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것이다. 내가 저 사람을 죽여도 되는지, 저 사람이 내게 죽어도 되는지. 저 사람을 살려야 하는지, 내 검은 사람을 살리는 검(活劍)이 될 수 있을지. 그것은 일종의 굴레였다. 강자에게 씌워지는 굴레. 강자임에도 인간성을 지켜내고 싶은 한 인간이 치열하게 고민을 한 고민의 족쇄.
“다 죽이면 되는 것을.”
그렇기에 만우는 지금, 홀가분함을 느꼈다. 의식적으로 만우를 늘 죄고 있던 그 굴레와 족쇄를, 지금만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진즉에 썩어문드러져 흙으로 돌아가야 할 늙은이 하나와.”
만우는 신이룡검을 어깨에 척하고 걸쳤다. 어느새 자신의 몸을 실체화한 소서노가 그런 만우를 보면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니구나.]
“악기에 물들어 몇 백 년의 시간이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불쌍한 짐승들.”
이성을 잃고 악기와 마흑술에 걸려 이지를 잃은 영물들. 그들은 차라리 죽는 것을 원할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 몇 백 년을 살아온 것이 아니니 말이다.
“가야할 곳으로 돌려보내주마. 혈사 네 놈도. 그리고 영물들, 너희들도.”
자연의 섭리대로라면 진작 흙으로 돌아갔어야 할 혈사와 영물들이다. 불사마공이라는 무공으로 계속해서 썩어문드러진 몸으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혈사는 물론, 영물들도 도를 쌓지 않았으면 진작 흙으로 돌아갔어야 할 이들이니까. 그러니 만우의 검은, 선택에 대한 굴레와 족쇄 없이 자연의 섭리를 원래대로 돌릴 명분을 얻은 검이다.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검. 우우웅-!!!!
만우의 전신에서 공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만우의 주변이 삽시간에 뿌연 운무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혈사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끌끌거리며 웃었다.
“살고자 발버둥치는 것 역시 생명의 당연한 의지.”
혈사는 만우가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의 혈사는 전 무림을 상대로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영물들. 특히 혈사가 공을 들여 길들인 삼두호는 중원의 그 어떤 무인보다 강했다. 혈사는 그것을 확신했다.
“어디 한 번 보자꾸나. 무림의 후배가 어느 정도 실력인지.”
기천(氣天). 기로 이루어진 하늘과 운무가 점점 그 반경을 넓히기 시작했다. 혈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흑미호가 검은 불꽃을 토해냈다. 한 번 붙으면 꺼지지 않는다는 구미호의 불이었다. 사악!!! 하지만 절대 꺼지지 않는다는 구미호의 불이 허공에서 그대로 소멸됐다. 혈사의 입가가 살짝 벌어졌다. 그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기의 하늘을 쳐다봤다.
“호오. 대단한 공력에 대단한 예기를 가진 공격이로고.”
구미호의 불을 그냥 검으로만 갈라 소멸시켰다는 것은 검을 한 번 휘두르는 데에도 수많은 묘리가 담겼다는 뜻이다. 그렇게 별 볼일 없어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에도 묘리와 의미가 담겨있는 이들, 그런 이들을 무림에서는 대종사(大宗師)라 부른다.
“대단해. 대단하구나. 정말로.”
화르륵!!! 콰아아!!!! 후우웅!!!! 흑학과 흑미호, 그리고 삼각독사가 점점 넓어지는 기의 하늘에 원거리 공격을 쏟아 부었다. 거의 공격 하나하나가 검기를 상회할 정도의 공격들이었다. 선기가 담긴 보주, 선주(仙珠)를 잃었던 호선과는 달리 이들은 선주를 가졌음에도 혈사가 쌓아올린 어마어마한 악기에 결국 오염이 되고만 영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힘을 손실 없이 모두 쓸 수 있었다. 서거거걱!!!! 하지만 그렇게 날아든 세 영물들의 공격이 허무하게 허공에서 흩어졌다. 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섬광이 하늘을 수놓을 때마다 악수들의 악기가 담긴 공격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크와아아아앙!!!!! 투캉!!!! 동시에 한 쪽에서도 백호의 포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혈사는 히죽 웃었다. 백호로 변한 호선 위에 동군영이 타있었고, 피웅덩이 근처에는 시뻘건 피를 뒤집어 쓴 거대한 꽃사슴, 녹산이 백호와 부딪치고 있었다.
“한번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꾸나.”
혈사가 품에서 사이한 기운으로 일렁이는 검은 방울을 꺼내들었다. 섭혼령과는 다르게 보기만 해도 불길한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방울이었다. 딸랑-!!!!! 마흑술의 일종인 강화의 술(術)을 걸어놓은 지배령(支配鈴)이다. 한 번 흔들면 마흑술에 오염이 된 모든 악수들에게 혈사의 단전에서 뻗어져 나간 악기가 깃든다. 콰아아!!!!! 흑미호의 꼬리가 세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났다. 동시에 흑학은 날개가 한쌍 더 생겨났고 삼각독사의 덩치가 더 커졌다. 크르릉……. 삼두호가 몸속에 차오른 힘을 견디지 못 하겠다는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성성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혈사의 입에서 악기가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들도 나서겠느냐?”
크와앙!!!! 크엑!! 삼두호와 성성이가 소리쳤다. 그리고 혈사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삼두호와 성성이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벼락같은 몸놀림으로 기천 속으로 뛰어들었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쾌속한 움직임이었다. 꽈앙-!!!!!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처음으로 기천에 파묻혔던 만우의 몸이 드러났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만우 주변에 가득 차 있던 기의 운무가 쭈욱하고 밀려났기 때문이다. 혈사가 그것을 보면서 클클거리며 웃었다. *****
“제법이다?”
만우의 주변으로 다시 운무가 깔렸다. 만우는 놀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삼두호와 성성이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는데, 만우는 아까 전 느낀 묵직한 충격에 한 치 정도 박혀들었던 발을 땅에서 빼냈다.
“본주가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보이는 모양이구나.”
기천의 운무가 깔리면 제 아무리 기감이 뛰어난 자라고 해도 갈피를 잃게 되고, 익숙한 오감을 잃어버린 채 만우의 검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삼두호와 성성이는 정확하게 만우가 있는 곳을 알고 짓쳐들었다.
[우어어엉-!!!]
자신의 몸에 앞발을 때려넣은 삼두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가사리가 크게 울었다. 만우는 몸을 살짝살짝 흔들면서 달려들 틈을 보고 있는 두 악수를 보면서 씩 웃었다.
“개싸움 하자는 거지?”
삼두호와 성성이에게서 느껴지는 악기의 기운이 강대하기 그지없었다. 이 둘을 밀어 넣었다는 것은 개싸움을 하자는 뜻이다. 삼두호와 성성이는 무인이 아니라 짐승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공격이 철저히 본능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만우도 무공이고 초식이고 나발이고 본능에 맞춰 싸우는 수밖에 없다. 이성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다가는 당한다. 쉬익!!! 성성이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졌다. 성성이는 2미터가 넘는 키에 팔이 기이할 정도로 길었는데 그 장점을 확실하게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