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신수 주작(4)2020.11.17.
상대는 신수였지만 만우는 말을 높이지 않았다. 말투 따위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작도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는지 빙긋 웃어보였다. 정신력이 약한 남자라면 그 미소 한 번에 상사병에 걸리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마력에 가까운 미소였다.
“예쁜게 더 좋으니까요.”
“인간적인 관점이군.”
“선계의 꼰대들이랑 지내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죠.”
주작은 웃었다. 선계의 꼰대들이란 우화등선을 한 신선들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진짜로 선계가 있다는 뜻이다.
“무릉도원. 그리 부르는 곳에 다녀오신거죠?”
주작은 만우 앞에 조신하게 앉았다. 그녀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궁장의가 마치 꽃잎처럼 보기좋게 사방으로 퍼졌다. 만우는 꽃잎이 흐드러진 듯한 방바닥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기와 악기가 느껴지더군.”
“검주, 당신이 동료로 삼은 그 아이가 있으니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아시겠네요.”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주작을 쳐다봤다.
“검주라니. 날 아나?”
“알죠. 왜 모를까요. 저 넓은 중원을 질타하셨던 분인데.”
“중원에도 신수가 있는 것인가?”
호선의 설명에 따르면 신수들은 선계에서 악수들로부터 속세를 보호하기 위한 수호자들이다. 한마디로 일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경계선 너머에 있는 존재들이란 소리다.
“물론이죠.”
아니나 다를까, 만우의 예상대로 주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의 남쪽은 주작인 제가. 북쪽은 해태 아재가 맡고 있고…….”
주작은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켰다.
“서해는 서해용왕이. 그리고 중원에는 기린 씨와 봉황 씨가 있죠.”
“용에 기린에, 봉황까지?”
“사람이 보는 이 세상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답니다.”
만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일반 양인들에게는 무림인의 세계가 딱 그랬다. 그들 중에는 무림이 있다는 것 조차 알지 못하고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인간세상도 그럴지언데, 이 세상 그 자체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이 놈은?”
만우는 한 쪽에 풀어놓은 이룡검을 가리켰다. 그러자 이룡검이 파르르 떨었다. 불가사리는 아까부터 조용했다. 처음에 대들던 그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성수 불가사리. 저희 신수와 비슷한 아이지만 선계의 골칫덩어리거든요. 그러다 선계에서 굴러떨어졌어요. 말썽 피고 도망다니다가. 그러면서 뭐, 언어도 잃었고 힘도 많이 잃었지만.”
“그래서 신수가 아니라 성수?”
“한 번 땅에 떨어지면 상제(上帝)께서 불러주시기 전까지는 올라갈 수 없거든요. 우리 신수(神獸)와는 달리.”
우우웅!!! 이룡검이 파르르 떨었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은 신성한 불(火)를 다루는 신수다. 불가사리도 삿된 기운을 먹어치우고 불태우는 존재다. 그런데 격 자체가 다른 모양이다. 물론 불가사리는 말썽을 피우고 선계에서 굴러떨어졌으니, 자신이 자초한 격의 하락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검주. 그대를 부른 이유가 있는데 그건 궁금하시지 않은가요?”
주작은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그제야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말이 많았음을 자각하고는 사과했다.
“처음보는 신수가 궁금하여 미사여구가 많았군. 그래. 날 찾은 이유가 무엇이지?”
만우는 지금 주작을 눈 앞에서 지켜보고 있음에도 주작의 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이런 경우는 만우에게 있어 처음이었다. 그런데 주작이 자신을 찾아왔다? 굳이 자신에게 뭘 부탁하지 않아도 주작 정도라면 다 알아서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짐작이 가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랍니다.”
주작은 만우의 생각이 짐작이 간다는 듯 매혹적인 웃음을 지어보였다. 만우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꼭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인생이더군.”
만우처럼 강하다고 해도, 항상 세상 일은 만우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았다. 김향이 마교에 납치를 당하거나, 살풍대가 북방의 살수를 넘어 부여까지 내려온 일들이 그랬다.
“악수를 잡아주세요.”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만우에게 주작이 앞뒤를 다 잘라먹고 말했다. 하지만 만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주작이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신수인 네가 나서야 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럴 여유가 없답니다.”
“네가 여유가 없을 정도의 일이라…… 대단한 일인 모양이군.”
“동해용왕님의 후계자가 선출하는 중이거든요.”
“후계자라. 동쪽 신수인가보군. 용왕이라면 용들은 왕국을 세우고 사는 것인가?”
후계자 다툼 때문에 주작이 자리를 비울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 악수가 나타난 것이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속세를 보호해야 할 임무를 띈 주작이 자신의 임무를 대신할 사람으로 만우를 고른 것이라는 뜻이다.
“네. 인간을 본따 만든 것이 용이니까요. 단지 그들의 강대한 힘을 고려하여 세상의 율법에 강하게 묶어놓았을뿐.”
“호.”
“저희 신수들도 마찬가지. 한 때는 일개 짐승이었던 영물들이나 성수, 신수들의 영성은 인간을 본따 만든 것이랍니다. 인간의 선한 면을요.”
“그렇다면 악수는.”
주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를 잘 하는 제자를 앞에 둔 스승이 얼굴 같았다.
“인간의 악한 면을 본따 만든 것들이지요.”
인간을 본따서 이 영물들과 신수들, 악수들을 만들었다는 소리다. 아무도 모르는 이 세상의 진실을 안 듯한 기분에 만우는 볼을 긁적였다. 사실 이 정도까지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강한만큼 그에 대한 책임이 뒤따르는 것처럼, 아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본주가 악수를 상대할 수 있나?”
“어렵겠지요.”
주작은 일고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우는 놀라지 않았다. 능선을 통채로 뜯어낸 것 같은 상흔을 봤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무릉도원의 우두머리라는 녹산이란 놈 정도면 모를까, 악수는 만우의 힘을 뛰어넘는 놈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니 나보다 강한 놈들이 많이 나오는군.”
만우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중원이나 조선에서는 자신보다 강한 이를 발견하지 못 했다. 하지만 불가사리부터 시작해 눈 앞의 주작, 그리고 악수까지. 이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았다.
“본주보다 강한 악수를 본주보고 상대를 하라?”
상대보다 강하다고 해서 결투에서 무조건 이기는 건 아니다. 항상 변수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우 정도의 강자라면 그런 변수는 만우보다 강한 강자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요소가 된다. 하지만 그 전에, 만우는 자신이 왜 그 악수를 주작 대신 상대해야 하는지 명분이 필요했다.
“찾고 계시니까요.”
“찾고 있다……라.”
“당신의 지인. 뭐, 붕우(朋友)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주작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동군영의 실종이 악수와 관련이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강자와의 싸움. 누구보다도 원하시잖아요.”
향상심이다. 무인으로써의 호승심과 향상심을 주작이 건드렸다. 만우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주작을 만난 순간부터 만우는 온 몸이 근질거렸다.
“단순히 그 정도를 제안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만우는 주작이 단순히 그런 것 때문에 자신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차피 만우는 동군영을 찾기 위해서 악수를 찾아나섰을 것이다. 주작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타오르는 듯한 주작의 적발이 찰랑거렸다.
“이러기 위함이죠.”
주작의 궁장의가 크게 부풀었다. 동시에 주작의 두 팔이 만우를 끌어안았다. 만우가 어떻게 반응을 하기도 전이었다.
“무……흡?”
만우의 눈이 커졌다. 주작의 입술이 만우의 입술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만우는 주작의 입술을 통해 뜨거운 불덩이가 식도를 통해 위장을 거쳐 단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스르륵. 따뜻했지만 뜨겁지 않았다. 주작은 만우를 옭아맸던 팔과 다리를 풀어내면서 뒤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마치 옷이 다리가 되어 대신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무슨 짓이야?”
만우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동물과 입맞춤을 했다는 것에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그런 만우의 모습에 주작이 서글프단 표정을 지어보였다. 물론 연기였다.
“신수라고는 하지만 소중한 입술인데.”
“헛소리하지 말고. 뭘 넣은거야?”
만우는 뱃속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기운에 얼굴을 찌푸렸다. 생소한 기운이 몸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은 무인에게는 굉장히 불쾌한 느낌이었다.
“삿된 것을 불태우는 주작의 정화(淨火).”
주작의 눈가에 은은한 붉은 기운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만우는 그것이 주작의 진신(眞身)이 가진 힘의 일부분임을 깨달았다.
“지극히 정순하고 세상 무엇보다도 깨끗한 기운이기 때문에 검주 당신의 공력과도 어우러질 겁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요.”
안 그래도 만우도 그걸 느끼고 있었다. 주작의 정화는 크기가 작았지만, 그 안에 응축된 기운의 양과 그 정순함은 과연 신수의 것이라고 불릴만 했다. 이걸 온전히 녹여낼 수 있다면, 만우의 기천은 6품계인 진인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제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온전히 그대의 선택에 따라 달렸답니다.”
주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웃음을 지어보이고는 이룡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아이와도 아주 궁합이 좋을 거에요. 저 아이와 제 정화, 그리고 검주 그대의 실력이 균형을 이룬다면 악수에게 헛되에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기왕이면 확실하게 이길 수 있게 해주는게 낫지 않나?”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주작은 그런 만우를 보면서 웃었다. 만우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검주 만우.”
“떠날 생각인가?”
“그럼요. 동해용왕님의 자식분들이 워낙 혈기왕성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거든요.”
“후계자 싸움이라. 싸움구경은 해야 제맛인데.”
용왕의 자식들이면 용이다. 그런 용들이 용왕 자리를 놓고 다투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용이란 존재를 한 번 보고 싶었지만 만우는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것에 궁금해할 필요 없다. 만우 자신은 사람이지 경계선 너머에 사는 저들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아는 것이 많으면 괜히 피곤하다.
“좋은 생각이에요. 후훗.”
화르륵!!! 그런 만우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주작의 전신이 백색 불꽃에 휩쌓였다. 그리고는 처음 사라졌을 때처럼 작은 불똥만을 남긴 채 그대로 사라졌다.
“편해보이는데 저거.”
만우가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안 그래도 험준한 하늘재는 조선 그 어느 곳보다 더 빨리 해가 진다. 아니, 적어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으음…….”
힘겹게 눈을 뜬 동군영은 그런 밤하늘이 그대로 눈에 꽂힌다는 것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동군영 자신은 목조로 만든 가옥 안에서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동군영은 눈을 크게 떴다.
“뭔가가 분명…….”
엄청난 굉음과 함께 가옥이 무너지더니 동군영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었다. 그런데 몸을 내려다보니 다행히 몇 군데 긁힌 것을 제외하고는 다친 곳이 없었다. 몸을 일으킨 동군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터였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나무밑둥이 보이는 것이 누군가 잘라내어 인공적으로 만든 산중의 공터였다. 그리고 그곳에 무릉도원의 사람들이 나란히 누워있었다. 다행히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것을 보니 죽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동군영은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만이 유일하게 정신을 차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수십 명의 사람들 중 자신만이 일어났다는 것에 동군영은 위화감을 느꼈다. 우우우우우-!!!! 그런데 그 때, 어딘가에서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고통과 절규가 버무러진 울음소리였다. 동시에 동군영의 눈에 밤하늘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밤하늘을 잡아먹는 것 같은 불길한 검은 안개가 퍼져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 끝에는 산중 공터 끝자락에 난 동굴이 있었다. 동군영은 그 동굴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어댔다. 저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동군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보는 것만 해도 몸이 저절로 떨리고, 공포에 질릴 정도로 끔찍한 무언가가 저곳에 있었다.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터져나오는 고통과 절규 섞인 울음소리가 동군영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으, 음…….”
동군영은 두려운 마음이 와락 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자신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려찍었다.
“무엇이 저 안에 있는지 네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동군영!”
어차피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에 도망갈 수도 없었다. 이런 야밤에 험준한 산을 혼자 돌아다닌다는 것은 맹수의 밥이 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이기 떄문이다. 동군영은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는 불길한 기운이 뭉클거리며 풍겨져 나오는 동굴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