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신수 주작(3)2020.11.14.
“만날 때를 기대하도록 하지.”
“후훗.”
여자는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웃어보이더니 순식간에 전신이 타오르더니 작은 불똥 하나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마저도 불어온 바람에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사라졌다.
“그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만우는 여자가 남기고 간 천을 쓰다듬었다. 소서노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재가 눈물고개라도 하더니, 진짜 자신이 헛것을 본 건가 싶어 눈가를 문지르는 방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만우는 피식 웃었다.
“무언가 있기는 하네. 여기에.”
강렬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는 만우의 눈에 저 멀리 고개 너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척사영과 호선, 문형일이었다.
“은인!!!!”
“대협!!”
“대장니이임!!”
*****
“그래서. 그냥 두 손 놓고 있었다고?”
만우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척사영과 호선, 문형일에게서 동군영이 실종된 자초지종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런데 그 자초지종이란 것이 만우가 듣기에는 어이가 없었다.
“두 손 놓고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호선은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만우를 무릉도원으로 안내했다. 만우는 무슨 초고수들이 부딪친 여파로 인해 깎여나간 것 같은 산등성이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그 흔적이라고?”
“네. 보시다시피…….”
다른 사람들 모르게 무릉도원에 들어온 만우와 호선, 척사영과 문형일이다. 방매에게는 김향과 함께 여독을 풀 수 있도록 문경현의 객주에 남겨놓고 온 만우였다.
“거대한 맹수가 할퀸 것 같네.”
만우는 거대한 맹수가 능선을 통채로 잡아 뜯은 것 같은 흔적을 보면서 흉하게 드러난 땅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이거. 선기지?”
“네.”
호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선이 될 뻔했던 백호답게 호선은 선기에 민감했다. 200년 정도 묵은 산록, 꽃사슴이 이곳의 두목이었다는 것에 만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한 놈이야.”
만우의 말에 호선과 척사영, 문형일의 얼굴에 긴장이 스쳐지나갔다. 만우가 강하다고 인정할 정도라면 정말로 강하다는 소리다.
“호선. 이 사건이 일어난 날, 느낀 게 아무 것도 없어?”
“네. 아무 것도 느끼지 못 했어요.”
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선이 느끼지 못 한 와중에 일어난 일이라면, 그리고 200년 묵은 산록이 당한 것이라면 이건 사람이 벌인 일이 아니다.
“또 다른 영물이요?”
“영물일지, 뭘지는 모르지. 하지만 사람은 아니야.”
만우는 확신했다. 만우의 눈에는 그 날 밤의 심상이 눈 앞에 펼쳐졌다.
“야심한 시각을 노리고 기습을 한 놈이지. 덕분에 그 꽃사슴은 반항도 못 하고 당해버린 것이고. 이 흔적을 보면 알 수 있지.”
거대한 맹수가 앞발로 능선을 통채로 날려버린 듯한 상흔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기에 비해 만우가 처음 느껴보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운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놈이 있었다. 부르르!! 만우가 신이룡검을 손바닥으로 툭하고 치자 이룡검이 부르르하고 떨었다. 불가사리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불가사리는 모든 삿된 것을 쫓아내는 성수(聖獸)다. 그런 불가사리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이곳에 남은 기운의 잔재, 이 생소한 기운을 불가사리도 느꼈기 때문이다. 마기와 비슷하게 끈적거리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짙은, 조금 더 본질에 가까운 듯한 이 기운.
“악기(惡氣)인 것 같아요.”
“악기?”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만우가 주기적으로 호선을 두들겨 준 이유가, 이렇게 변질되는 기운을 막기 위함이었다. 만우가 느끼고 있는 이 생소한 기운은 호선에게서 변질되고 있는 그 기운과 비슷했다. 하지만 마기와는 다르게 더러운 기운이 아니라 불쾌하지만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정순한 기운이었다. 선과 악. 그 둘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만우는 확신했다.
“악수(惡獸)다.”
“악수라면.”
호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세상은 넓고 인간이 보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일들이 인간들의 시야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악수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었다. 호선처럼 수양을 쌓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선계에 올라가 신선이 된다. 하지만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영물 중 악기에 오염이 되거나 어떻나 사유로 인해 수양을 포기하게 되면 그 영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악수가 된다. 모순적이게도 그 누구보다 순수한 기운이 선기를 담아내던 영물들의 몸이, 수양을 멈춘 순간 세상의 악의를 저절로 흡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악의가 쌓이면 악기가 되고, 그 악기가 쌓이면 영물은 악수(惡獸)가 되어 세상에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남쪽을 수호하시는 신수(神獸)께서 계시는…….”
“신수?”
만우의 눈이 반짝였다. 호선은 자신의 입을 탁하고 때렸다. 이건 자신들 세계의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인간인 만우가 알 필요는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무슨 소리지?”
하지만 만우가 관심을 보이자 호선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호선은 고개를 돌려 척사영과 문형일을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자리 좀 비워주시겠어요?”
그 둘도 호선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진작에 느끼고 있었다. 처음 볼때라면 모를까, 호선에게는 내공이 아닌 더 정순하고 순수한 기운이 있다는 것을 못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붙어다니는데도 그 눈치를 채지 못 한다면 무인이란 이름은 진작에 노름판에 내다놓고 팔아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현으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척사영과 문형일은 그런 호선을 이해해주고는 자리를 비워주었다.
“신수? 하긴. 악수 같은 놈들이 나오면 세상에 큰 혼란이 일어나겠지. 이 놈처럼.”
만우는 손등으로 신이룡검을 툭하고 쳤다. 그러자 반항하는 것처럼 불가사리가 우웅하고 울었다. 불가사리는 악수가 아니지만 어쨌든 인간세상에 나와 큰 혼란을 일으킨 놈이었다. 성수란 놈이 이럴 지언데, 악의를 쌓은 악수는 오죽하겠는가.
“살생을 즐겨하고 환난과 대흉을 불러들이며 인간의 절망과 절규를 먹고 사는 놈들.”
호선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그들을 악수라 합니다. 끝 모를 살의와 끔찍한 혐오와 증오로 무장을 하고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쳐죽이고자 하는 이들. 그들의 존재가 너무나도 공포스럽고 강력하기 때문에 선계에서는 그런 이들을 징벌하고자 신수(神獸)를 수호자로 삼아 내려보내셨다고 합니다.‘
호선이 하는 말을 들은 만우는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만우가 듣기에는 허무맹랑하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눈 앞에 호선이 있고, 불가사리는 검이 되어 허리춤에서 달랑거리고 있었으니 마냥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 신수가 누구냐니까.”
호선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이걸 만우에게 말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헷갈린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을수도 없었다. 만약 무슨 변고가 생겨 악수가 이렇게 영물들을 잡아먹고 다니는 것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적어도 시간을 끌 사람은.’
호선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신수를 본 적은 없었다. 그저 그들이 존재한다고만 들었을 뿐이다. 그 신수들은 이 땅을 수호하기 위해 선계에서 신경을 써서 하계에 내려보낸 이들이기 때문에, 호선이 500년의 수양을 쌓아 선계의 문을 두드렸다고는 하지만 실제 신선들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 알려져 있었다.
“주작. 주작이십니다.”
“……새?”
만우는 불타오르는 새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던 만우가 퍼뜩 고개를 들어 자신의 검병에 묶인 천을 쳐다봤다. 주작. 사방신수(四坊神獸) 중 불을 다루는 것이 주작이다. 동시에 주작은 남방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늘재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웬 여자는 불꽃과 함께 사라졌다.
“본 것도 같군.”
“예?”
만우의 말에 호선의 눈이 커졌다. ***** 문경새재의 관문은 영남 밖에서 영남 안으로, 영남에서 한양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영남의 목구멍이라 불리기도 했다. 넓고 잘 닦인 관도와는 달리 옛 홍건적을 피해 몽진하기도 했던 공양왕이 지났던 하늘재는 떳떳하게 새재를 넘을 수 없는 이들이나 보부상, 길을 더럽히는 천민들이 넘던 눈물고개다. 하지만 더 위로 올라가면 하늘재는 무려 신라시대 때 난 길이며, 그 유명한 고구려의 온달이 하늘재를 얻기 위해 전장에 나갔다가 죽은 비극적인 역사가 흐른 길이었다. 새재길이 새로 생겼다고는 하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기 때문에 하늘재에는 객주가 열려있었다. 그곳에 하늘재를 오가는 사람이 들려서 밥을 먹거나, 자고 가기도 하고 물건을 교환하는 장이 열리기도 한다. 하늘재를 오르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거래되는 것은 대부분 부피가 작고 가벼운 것들이다. 만우는 자신의 손에 들린 천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포목점에 가면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 같은 천인데, 이걸 달아놓으면 오겠다고 했다.
‘주작.’
만약 정말 그 여인이 신수(神獸) 주작이라면 만우가 그런 기시감을 느꼈던 것이 말이 된다. 신(神)은 아무 것에나 붙는 것이 아니다.
‘강했지.’
만우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던 주작을 떠올리고는 손끝이 찌릿하게 떨려온다는 것을 느꼈다. 강자를 만났을 때, 호승심이 불타오를 때 나오는 육체의 신호다. 만우의 몸도 강자와의 비무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쏟아내고, 그것을 받아낼 수 있는 상대와의 싸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있을때 느껴지는 그 긴장감과, 그것을 이겨냈을 때의 희열.
“너무 오래 쉬었나?”
만우는 쓰게 웃었다. 무림에 있을 때도 강자와의 비무를 위해 온 강호를 독보하고 다녔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조선에 들어오면서 평화롭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것을 거의 세뇌걸듯이 스스로에게 되뇌였기 때문에 몸이 이러는 것이리라. 평화롭고 평범하게 산다는 것. 그건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검과 피, 죽음과 함께 살아온 만우에게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이루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흐음.”
만우는 주작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살짝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객잔 지붕에 그 천을 매달았다. 그리고는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파라락!!! 동시에 나오면서 열어놓았던 창문으로 방향을 꺾었다. 경신법에 검을 휘두르는 것 만큼의 재능은 없었지만, 그래도 경지가 경지이니 이 정도는 가능했다.
‘조선에 와서 미묘하게 강해지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지.’
하지만 무인에게 강해진다는 것은 기쁘기 그지 없는 일이다. 만우는 7품계로 이뤄진 기천에서 5품계인 도인(道人) 단계에서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다. 길을 걸어가는 자를 뜻하는 도인에서 다음 단계인 6품계 진인(眞人)으로 넘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 경지가 조금씩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선에 와서 무공에 몰두하지 않아는데도 그랬다. 만우는 무인으로 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으로 왔는데, 모순적이게도 무공 경지가 다음 6품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우스운 상황에 만우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주작이 오기 전까지 운기조식을 하기 위해 눈을 감았던 만우의 눈이 두 시진이 지나자 저절로 뜨였다. 운기조식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다. 처음과는 달리 기척을 분명하게 드러낸 채 올라오는 이 때문이다. 덜컹. 만우가 허공섭물로 문을 잡아당기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전에 하늘재를 올라오다 보았던 평범한 인상의 아낙네가 서있었다. 문이 저절로 열렸지만 아낙네에게는 놀란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숨긴 외인(外人)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을텐데.”
만우가 말하자 부드럽게 웃던 아낙네의 전신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노랗고 붉은 화염이 아니라 손을 대면 얼 것처럼 보이는 시린 백색의 불꽃이었다. 화르륵!!
“어차피 이 모습도 제게는 숨긴 얼굴일 뿐인데요.”
백색 불꽃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주작의 본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타오르는 듯한 적색의 머리카락, 거기에 선홍빛의 눈동자를 가진 주작은 경국지색이란 말이 아까울 정도의 미녀였다.
“너도 그렇고. 호랑이도 그렇고. 왜 그렇게 미녀를 좋아하지?”
만우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