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신수 주작(1)2020.11.07.
“가겠다고?”
“그래.”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였다. 임금은 턱을 손에 괴었다.
“갑자기 왜 이제 와서? 그때 함께 떠났으면 되지 않은가.”
만우가 가지 않겠다고 해서 문형일을 붙여주었다. 정확히는 동군영이 이번 일에 만우를 데려가지 않겠다고 임금에게 허락을 구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동군영을 따라가겠다는 만우의 태도 변화에 임금은 고개를 갸웃했다.
“알 건 없고. 갈 테니까 알고 있으라고. 옹주도 데려갈 생각이거든.”
“방매를?”
“그래.”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임금은 은근한 시선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자네가 옹주가 좋다면 난 찬성일세. 임금으로써가 아니라 오라비로서.”
“헛소리.”
만우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임금은 등을 돌려 휘적거리며 대전을 빠져나가는 만우를 보면서 권희달에게 말했다.
“운검. 자네 생각은 어떤가.”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전하.”
언제나 듬직하게 뒤에 버티고 선 권희달의 목소리에 임금이 씩 웃었다.
“방매. 옹주와 만우의 혼인 말이다.”
“……옹주자가께서 비록 양인 신분이셨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엄연히 내명부의 일원이십니다.”
임금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인가 싶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권희달을 쳐다봤다.
“그래서. 검주가 노비라 옹주와 혼인 시키는 건 무리다?”
“…….”
만우가 오만방자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만우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은 됐다. 그리고 오만방자하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성격은 아니었다. 거기에 자랑하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다. 그냥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만우의 무(武)의 경지는 조선은 물론이고 넓은 저 중원에서도 감히 견줄 수가 없는 수준이다. 그 정도라면 아무리 노비라고 해도, 이미 조선의 무인들을 총동원해도 만우 하나를 꺾을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이미 만우에게 신분의 굴레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의 반증이다.
“내가 보기엔…… 검주만큼 훌륭한 사윗감이 없는 것 같은데.”
임금이 만우가 나간 곳을 보면서 씩 웃어 보였다. ***
“가자.”
“어? 너…….”
방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쳐들어온 만우 때문이다. 안국방에 있었던 방매는 만우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훽하고 돌렸다.
“찾아와서 하는 말이 그게 다야?”
방매는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하지만 이제 꿇릴 것이 없는 만우다. 만우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자. 나으리 찾으러.”
“나리? 군영 나리?”
“그래. 동구녕.”
만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방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별이라도 온 거야? 무슨 일이 생겼대?”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이 왔어.”
그렇게 말하던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많이 걱정한 모양이다?”
“당연히 걱정이 돼지. 그래도 몇 달이나 함께한 동료인데.”
“……동료라 이거지?”
“그래.”
방매는 뭐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눈으로 만우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만우는 그런 방매의 눈초리에 고개를 돌려 괜히 헛기침을 큼큼하고는 방매에게 말했다.
“그래서 갈 거지?”
“가야지.”
방매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조 씨 할아범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방매와 만우를 쳐다봤다.
“가긴 어딜 가려고. 향낭은…….”
방매가 구해온 사향으로 만든 향낭은 불티나듯 팔려나가고 있었다. 그런 판매 실적에 방매의 매분구로서의 도움이 톡톡하게 있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방매가 빠지면 당장 궐과 양반가에 돌아가야 하는 판매로가 끊긴다. 조 씨 할아범은 그 때문에 황당하단 표정을 지은 것이다. 일은 다 벌여놓고, 빠져나가려고 하니 말이다.
“동료를 구하는 게 더 우선이에요. 할아범.”
방매는 그렇게 말하고는 새침하게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하도 여기저기 많이 떠돌아서 그런지 방매는 순식간에 봇짐 하나를 뚝딱하고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 의외의 사람이 손을 들었다.
“저도 갈래요.”
“향이 너마저…….”
조 씨 할아범이 끄응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끼어들어봤자 좋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향이? 안 돼. 넌 남아. 어딜 따라가려고.”
“하지만 저도 이제는 실전을 겪어봐야 한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김향은 싸울어미의 수법을 배우고는 맹랑함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몸도 강건해지고 작은 힘이나마 손에 쥐게 되자 집안이 망하면서 움츠러들었던 원래의 성격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안 돼. 내가 허락 못 해.”
[실전으로 이제는 실력을 기를 때다.]
하지만 그때 소서노가 튀어나왔다. 김향은 그거 보라는 듯 만우를 쳐다봤다. 참고로 소서노는 김향과 만우의 눈에밖에 보이지 않았다.
“실전이라니. 장난해? 그 분야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아.”
하지만 만우는 칼 같이 소서노의 말에 퇴짜를 놓았다. 하지만 소서노는 고개를 저었다.
[무공과 투술을 같다고 보는 것이냐?]
“다를 바 없지. 만류귀종. 모르나?”
무공으로 실전을 겪든, 싸울어미의 투술으로 실전을 겪든 결국 다 같은 법이다. 결국은 싸우는 무기가 다를 뿐 싸운다는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더 이상 내 지도만으로는 한계에 다다랐다.]
“뭐? 벌써?”
만우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공의 경우에는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스승에게 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몇십 년 동안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다르다는 것이다. 싸울어미의 투술은 말 그대로 술(術)에 불과하다. 공(功)과는 다르지.]
“술과 공이라…….”
기력을 사용하는 싸울어미의 투술은 말 그대로 싸우는 술식을 가르치는 것뿐이다. 초식부터 시작해 공부를 가르치는 무공과는 엄연히 그 궤가 달랐다.
“그래서. 실전을 겪어야 한다?”
[술(術)은 좌선하여 머리를 쥐어뜯는다고 해서 늘어나는 것이 아니니까. 기력이란 것이 그런 좌선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버리고.]
“하지만 향이는 강해질 필요가 없는데.”
만우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김향은 굳이 강해지기 위해 향상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소서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예 그러면 맛보게 해주지를 말던가. 강해진다는 것에 재미를 느낀 아이를 무슨 수로 막겠다고.]
“재미라…….”
[향상심. 성취감. 그 희열. 너 역시 무인이라면 모를 리 없겠지.]
만우는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김향이 기뻐서 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각오해라. 사정을 봐주는 건 네가 스스로를 무인이라 자처한 순간부터 없으니까.”
“얼마든지요!”
김향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
“어이 동 씨! 일 똑바로 해! 그래야 밥을 준다니까?”
“알겠습니다요. 흐잇차.”
딴 생각을 하고 있던 동군영은 자신을 부르는 험악한 인상을 한 거구의 목소리에 지게를 짊고 끙차하고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해야 되지?’
동군영은 양인들이 입는 무명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갓도 쓰지 않은 상태였고 이마에는 말총으로 만든 망건 대신 무명천으로 만든 띠를 둘렀다. 양반이 아니라 양인이기 때문에 다들 동군영을 동 씨라 불렀다. 동군영은 코밑을 소맷자락으로 스윽 닦았다.
‘국법을 어긴 산적들이긴 한데…….’
동군영은 지게를 짊어 맨 채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을 들어갔다. 그러자 갑자기 어느 지점부터 너른 공터가 나오더니 나무로 만든 집들 수백 채가 모여 있는 산중고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중고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일개 산적들이 모여 만든 곳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질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골목에서는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아녀자들은 모여 나물을 다듬거나 일을 하면서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퍽이나 평화로웠다. 영남의 동래로 향하던 동군영은 잠시 쉬어가기 위해 들른 고을의 관아에서 현령의 한탄 어린 소리를 듣고 감찰로써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나섰다. 관아의 현령이 감찰인 동군영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유는 간단했다. 자꾸만 고을의 백성들이 무단으로 고을을 이탈하여 산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 고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문경새재를 끼고 있는 근방의 모든 고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다. 문경새재는 영남로의 중요 관문 중 하나로, 영남으로 들어가거나 영남에서 나오는 길목에 지어진 관문이었다. 그런데 이 무릉도원의 산적들은 간이 크게도 산세가 험준한 문경새재를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관문 근처라고는 하나 그곳의 관병들은 관문을 지키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이고, 대규모 군세를 끌고 들어오기에는 문경새재의 길이 좁고 산세가 험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후사정을 알아내기 위해 동군영이 나서서 직접 산채에 투신했다. 그랬다가 지금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산적이긴 산적인데.’
이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무릉도원이라 불렀다. 도교에 나오는 신선이 사는 세상에는 굶주리는 자가 없고 핍박 받는 자가 없다하여 그러기를 바라면서 붙인 이름인 것이다
‘산적의 우두머리는 사람이 아니고.’
헌데 이 산적들의 우두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호선이 말해준 것이니 틀림없었다. 호선과 척사영, 그리고 문형일은 산적두목을 경계하게 만들까 싶어 들어오지 않았다. 호선가 척사영, 그리고 문형일은 멀지 않은 곳에 호선의 도술로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산적의 우두머리, 그러니까 두목이 호선보다 어린 영물이기 때문이었다. 산록(山鹿). 이백 살 정도 먹은 꽃사슴. 호선은 그렇게 말했다. 이백 년 동안 살아 영성이 생긴 산록이 이 산채의 두목이었다.
‘꽃사슴치고는 엄청 험악하게 생겼드만.’
실제로 산적두목의 이름은 녹산이었다. 산록을 거꾸로 한 것이다. 그리고 꽃사슴란 이름과 맞지 않게 엄청나게 험악하게 생긴 거구의 남자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애들이랑 놀아주고. 꽃밭을 가꾸고. 농사를 하고 씨를 뿌리고.’
이곳이 무릉도원인 이유는 산채임에도 불구하고 피와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명의 활기로 가득했다. 호선은 그게 저 영물, 두목인 녹산 때문이라고 했다. 영성을 가지게 된 영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선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했다.
“동 씨. 오늘은 할당량 다 채웠지?”
“네, 네.”
“아니. 남자가 왜 그렇게 목소리가 작아! 어깨도 피고. 어?”
동군영은 할당된 작업량을 끝내고는 어깨를 주물렀다. 자신보고 목소리가 작다면서 어깨를 두드린 노인의 아귀힘 때문이었다.
“뻐근하네.”
이곳은 억지로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대신 정해진 일을 해오면, 식량을 배식해 줬다. 그런데 그 양이 적지 않았다.
‘의적이라고 했지.’
산적이지만 이들은 양민들의 무고한 생명을 해치거나 그들의 재산을 탐하지 않았다. 무릉도원의 산적들은 철저하게 부자들의 곳간만을 노렸다. 영남은 부유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재에서 조금만 내려가도 근처 고을에 가면 곳간에 곡식을 그득하게 쌓아놓은 유지들이 많았다. 그런 곳을 털어서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리고 확실히 영물인 듯, 녹산이 관리하는 밭이나 산중에서 나는 나물들이나 버섯, 약초들은 일반 작물에 비해 그 크기가 세 배는 컸다.
“행복하고 근심걱정이 없는 곳. 탐관오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백성들의 무릉도원.”
이곳으로 근방 고을의 백성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간단했다. 먹고 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무릉도원의 소문이 퍼지니 백성들이 야반도주를 해서 몰려드는 것이다. 유지들의 착취와 세금에 의해 미래가 없는 삶보다 가까이 있는 희망 있는 삶을 택한 것이다. 그 때문에 동군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버렸다.
‘그냥 두고 보자니 녹봉을 받는 관리로서 국법을 어긴 이들을 눈감아 주는 것이 되고. 그렇다고 이곳을 토벌하자니…….’
이들은 국법을 어긴 이들이다. 거기에 산중에 세금을 내지 않는 고을을 만들어 나라에 피해를 입혔다. 거기에 유지들이라곤 하지만 도적질까지 한 이들이다. 그러니 토벌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이곳을 토벌하면 이곳으로 도망쳐온 백성들은 어떻게 될까.
‘희망인데.’
관리로서 국법을 우선시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백성들의 얼굴에 걸린 행복을 우선시해야 하는 것인지 갈피가 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