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옹주와 호위무사(5)2020.10.31.
만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동군영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들다가 죽는 것은 개죽음이다. 그래서 무공을 맨 처음 배울 때 그토록 강조하는 것이 바로 명경지수, 부동심 따위의 마음공부다. 그건 단순히 심마에 빠지거나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 아니다. 감정에 휘둘려 개죽음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토록 강조를 하는 것이다.
“더 속이 쓰릴 거야. 화도 나고.”
만우는 꼭 쥐어진 동군영의 손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동군영의 두 눈은 여전히 터진 핏줄로 인해 시뻘건 것이 흉하기 그지없었다.
“어머. 어사 나리. 깨셨네요?”
그때 문을 열고 호선이 들어왔다. 일단 의원을 불러 응급조치를 했지만 이런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호선의 도술이 최고였다. 파앗!!! 온몸에서 느껴지던 격통이 선기와 함께 줄어들자 동군영의 찡그러져 있던 얼굴이 펴졌다. 그러자 동군영이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는 일어났다.
“어디 가게.”
“입궐해야지. 그래도 어사가 아닌가.”
동군영은 만우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만우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만우의 두 눈에는 동군영이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복수하려고?”
“……왜(倭)로 간다고 하더군.”
만우의 얼굴이 굳었다. 척사영에게 동군영이 왜 저 꼴이 되었는지 전부 전해들은 만우다. 하지만 복수심에 미쳐 실력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들었기 때문에 안 죽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 만우다. 상대는 무려 마교의 고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보니 행운으로 안 죽은 것이 아니라 마교 놈들이 일부러 죽이지 않은 것이다.
“왜(倭)?”
“그래. 분명히 들었네. 정신을 잃기 전에 자신들은 왜로 간다고.”
“그래서 네가 왜에 가서 뭘 한다고. 아니, 애초에 어떻게 간다고.”
만우는 동군영에게 물었다. 갑자기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마교 놈들이 무엇을 노리고 동군영에게 자신들의 행선지를 알린 것인지 예상이 됐기 때문이다.
“왜에서 사신이 왔다 들었네. 그렇다면 예의상 우리 조정에서도 사신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지. 그곳에 감찰로 보내달라고 할 생각이네.”
“감찰?”
“사헌부 소속 감찰관 말일세. 육조와 지방의 모든 관청에 대한 감찰권을 가진 그 감찰. 뭐, 그런 게 있네.”
만우는 조정의 복잡한 관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임금은 이번 기마대의 사건을 조사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진 정4품 장령에 동군영을 임명했다.
“기마대의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 이상, 사신단에 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 어차피 사신단에도 사신들을 감찰하기 위한 감찰관은 필요하니까.”
조정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에는 감찰관이 끼어들어 감시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건 타국에 보내는 사신단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가서 그놈들을 찾으면 어쩌겠다고.”
“……그건 가서 생각해 볼 일이지.”
동군영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만우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마교의 고수들이야. 나으리도 무림인이라는 놈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겪어봐서 알고 있을 텐데?”
그건 만우를 바로 옆에서 거의 반년이 넘게 함께 했으니 확실하게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서겠다는 소리다.
“가문에 대한 복수 이전에 그자들은 국법을 어기고 일개 무사들이 조선의 국경을 넘었고, 넘는 것을 방조했지.”
“강대한 힘 앞에서 국법이란 빛이 바라는 법이야.”
만우는 고개를 저었다. 무림인들은 무림의 법도가 따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역 같은 중대한 사건이 아닌 다음에야 명에서도 무림인들에게는 관아의 법도에 따라 죄를 묻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좋은 게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군영에게는 그게 피부에 와닿을 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건 명, 중원의 법도. 허나 이곳은 조선일세. 만우, 자네가 뭐라고 하건 상관없네.”
동군영의 두 눈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난 그놈들을 단죄해야겠네. 우리 가문뿐 아니라 그놈들의 방조로 인해 죽은 조선의 백성들이 많지. 이걸 전하께 고한다면, 주상전하께서도 분개하실 터.”
만우는 끄응하는 소리를 냈다.
‘이런 식으로 나를 불러내시겠다?’
만우와 동군영 사이가 각별하다는 것을 알고 투귀대의 머리라는 마일이라는 놈이 일부러 행선지를 발설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복수심에 불타는 동군영이 그들을 추격할 테고, 그렇게 되면 만우가 동군영 때문에라도 올 것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쫓아가기에는 늦었겠지.’
이미 그들은 한양을 넘어 전속력으로 왜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괜히 미적거리다가 만우에게 잡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리가 벌어지면 제 아무리 만우라고 해도 그들을 쫓아갈 순 없다. 거리가 이미 너무 벌어졌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말게.”
동군영은 만우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 자네에게 내 복수를 대신 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없네. 이건 내 복수니까, 자네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그렇게 말한 동군영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만우는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와락 움켜쥐었다.
“끄아아아. 차라리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던가. 동구녕 저거, 이러면 내가 찜찜해한다는 걸 알고 한 거 아니야?”
호선이 그런 만우를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만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
“어? 나리!”
어둡지만 결의에 찬 얼굴로 퇴청하던 동군영은 방매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공손하게 인사했다.
“옹주자가.”
“나리까지 그러실 거예요!”
방매의 뾰족한 목소리에 동군영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서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압도적으로 어두운 그의 분위기에 방매는 동군영의 옆구리를 쿡하고 찔렀다.
“오, 옹주자가. 궁에서 그러시면…….”
“에이. 옹주는 무슨. 저 방매예요 방매. 다들 옹주라 부르고 있어. 이거 먹을래요?”
방매는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기는 비단 보자기를 슬쩍 열어보였다. 그러자 노릇하게 잘 익은 지짐이가 한 바구니나 담겨져 있었다.
“이건…….”
“수라간에서 슬쩍 했어요. 맛있는 냄새가 나길래.”
“오, 옹주…….”
“에이. 뭐 어때요. 어차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동군영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수라간이 어디던가. 그곳은 지존인 임금을 비롯하여 중전과 왕가를 위한 음식을 만드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음식을 슬쩍해서 나왔다는 소리다.
‘옹주시라면 그른 것은 아니지만…….’
방매라면 사성 이씨라고 해도 옹주이니 수라간에서 음식을 들고 나온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방매처럼 그걸 옆구리에 끼고 다니진 않는다.
“생각시들은 좋아하던데.”
방매는 황망해하는 동군영의 표정을 보면서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옹주라고 불리면서도 전혀 이전과 변함이 없는 방매의 모습에 결국 동군영이 풀썩 웃었다.
“정말 못 말리겠습니다.”
“사람이 변하면 금방 죽는 거래요. 어쨌든, 일은 잘 처리하고 올라오신 거죠?”
방매는 무겁지 않게 동군영에게 말했다. 그에 동군영도 가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요.”
“잘 됐네요. 나리 얼굴이 워낙 죽상이길래 그랬어요. 집에 가는 길이면 같이 가요. 이거 들고 가서 만우나 다른 사람들 먹이게.”
방매는 묵직한 보자기를 들어보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동군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그곳에 가지 않습니다.”
“엥? 왜요?”
방매가 고개를 갸웃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
“아니, 그래서! 어사 나리를 혼자 보내겠다고? 가까운 곳도 아니고 왜에? 그 무시무시한 무사들이랑 싸우러 가는데?”
만우는 아예 귀를 틀어막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방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만우가 등을 돌리면 돌린 곳으로 와 만우의 귀에다 대고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아오! 아오! 시끄러워!!!!!!”
“시끄러우면 대답이나 해! 왜 안 가!!!! 너도 봤잖아! 기마대 올 때 걔네들 싹 숨은 거! 공범이라고 공범!”
“아후…….”
방매는 궁에서 만난 동군영에게 뭘 듣고 왔는지 뛰어들어와 만우를 쥐 잡듯이 잡고 있었다. 감령과 필두, 슌스케는 방매가 가져온 보자기에서 지짐이를 꺼내먹으면서 괜히 눈치를 봤다. 그러다 불똥이 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안 가. 못 가. 내가 왜 가아악!”
만우는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자신을 잡기 위해 마교가 파놓은 함정이라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 거기에 제 발로 들어가라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그걸 방매에게 말하진 않았다.
“칫. 무섭기라도 한 거야? 뭐 네가 제일 강하다면서! 검주니 뭐니!”
만우가 반응을 안 하자 방매는 방법을 바꿨다. 도발을 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무림에서 별의별 놈들을 다 만나본 만우에게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도발이었다.
“안 가. 그래도 안 가. 응 나 약해. 그러니까 안 가.”
만우는 고집을 부렸다. 방매는 도끼눈을 뜨고 그런 만우를 노려봤지만 만우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날 수 없었다.
“복수에 미쳐서 왜까지 가겠다는 게 미친 거지!”
“가족이 죽었다잖아!!”
방매는 이상하게 동군영의 일이 마치 제 일인 것처럼 흥분했다. 그런 방매를 쳐다보는 만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왜 네가 화를 내. 넌 재물이 최고라면서. 똥구녕을 좋아하기라도 하게 된 거야?”
“이……이이! 이 망할 놈의 만우!”
방매는 이를 악물었지만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만우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빠악!
“컥!”
“커컥!!”
“우욱!”
그에 몰래 지짐이를 집어먹던 감령과 필두, 슌스케가 놀라 켁켁거렸다. 지짐이가 목에 걸린 것이다. 만우는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돌아봤다. 방매가 그런 만우를 쳐다보다가 쿵쿵거리며 나가버렸다. 만우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왜 저래. 진짜 똥구녕 나으리를 좋아하나?”
동군영을 괜히 똥구녕이라 부르는 것을 보니 만우도 골이 단단히 난 듯했다. 그때 문이 다시 벌컥 열리더니 방매가 얼굴을 불쑥 집어넣었다.
“나도 가족이 누군가에게 다 죽어본 경험이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불쌍해서 그렇다! 됐냐!!!!”
“……뭐?”
놀란 만우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방매는 문을 쾅 닫은 후였다. 만우는 방매마저 그렇게 사라지자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동구녕에 이어서 쟤는 또 왜 저래. 사람 미안하게 만들어서 뭐 어쩌려고. 으아아악! 화는 내가 내야 된다고오오오!!!!”
만우는 두 팔을 휘적거렸다. 많은 고민이 담긴 허우적거림이었다. 그때, 문이 다시 벌컥하고 열렸다.
“또, 또 왜…….”
또 방매가 연 줄 알고 고개를 돌린 만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을 연 사람이 방매가 아니라 동군영이었기 때문이다.
“너. 동구녕. 그 차림이…….”
“군영일세. 군영.”
오늘 막 부여에서 도착한 동군영이었다. 그런데 동군영은 먼 길을 떠나기 위한 차림을 다 끝마친 후였다. 허리춤에는 가죽신을 차고 있었고 밤이슬이나 비를 피할 수 있게 죽립을 쓴 모습이었다. 어디서 검을 구했는지 허리춤에는 철검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