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옹주와 호위무사(4)2020.10.27.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놈의 무림십좌니, 일패가 뭐라고 그렇게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약해서 져놓고, 이렇게 뒤끝을 부리는 명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더 강한 놈을 키워내서 자신을 잡을 생각을 해야지, 이렇게 수작질을 부리다니.
“그놈들도 특이한 놈들이고.”
만우는 이 사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미주알 고주알 늘어놓은 마일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왜 이런 것을 자신에게 숨기지 않고 털어놓느냐는 것에 마일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 방법 외에는 검주 당신을 왜로 데려갈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렇지. 그게 맞긴 해.”
만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푸라기로 짠 지붕 위에 누워서 따땃한 햇살을 맞으니 몸이 노곤해졌다.
“으하암!”
투귀대의 머리인 마일은 만우에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만우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왜로 가달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만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내가 왜 가야 돼. 그것도 그 먼 곳까지.”
뭐, 동군영의 복수를 위해 투귀대 놈들이 튀어나오면 도륙내겠다 생각을 했지만 정작 그놈들이 모든 것을 까놓고 솔직하게 나와 만우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검주 당신을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이 방법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더이다. 다른 수작질을 떠올려 봤지만 당신의 추격을 뿌리치고 조선을 벗어날 방법은 도저히 없고. 그래서 살풍대 일로 억하심정을 품었다면, 부디 왜에 와서 풀어주시지요.]
마일은 만우의 막강한 기세에도 입가에서 피를 흘리면서 꿋꿋하게 만우에게 말했다. 방귀 뀐 놈이 오히려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니 만우는 그들에게 함부로 손을 쓰지 못 했다.
“아우. 씨.”
벅벅벅. 만우는 머리를 벅벅하고 긁었다. 답이 없었다. 마교 놈들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함정이 뻔한 곳에 제 발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군영의 복수 역시도 하기는 해야 한다. 그 복수는 투귀대가 아니라 살풍대를 조선에 보낸 혈세천마에게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왜라니.
“끄응…….”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만우의 이마에는 주름만이 늘어날 뿐, 마땅한 답이 보이지 않았다. ***** 주창을 비롯한 투귀대 고수들은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을 빠져나왔다. 그런 그들의 표정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는데, 교에서 내려온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파천서생. 다른 방법은 없는가?”
폭혈도 위문이 답답한 듯 마일에게 물었다. 하지만 마일은 고개를 저었다.
“백 가지 방법을 떠올려 봤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 이외에는 성공 확률이 없습니다.”
마교에서는 수작을 부리던 무슨 짓을 하건 간에 만우를 왜로 데려오라고 했다. 하지만 마일은 백 가지 방법으로 생각을 해도 만우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 여아를 다시 납치해서라도…….”
“검주를 뿌리칠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그에게는 은월루와 하오문이 있습니다.”
“젠장.”
황금 팔십만 냥도 그렇고, 만우를 왜로 데려가는 것도 그렇고 교에서 내려온 모든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거기에 악궁 테무르와 광호검 기무를 잃었다. 거기에 낭황과 살풍대가 몰살당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지 나서지 않았다. 돌아가면 반드시 엄정한 문책이 뒤따를 것이다. 어쩌면 주창을 따르던 이들이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화경의 고수라고는 하나 교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무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위문은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할 만큼 하였다. 허니…….”
말을 하던 주창의 눈이 커졌다. 숭례문을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멀리서 낯익은 강렬한 기운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뒤로!!”
“대주님!!”
쩌저저정!!!!! 주창의 허리춤에서 마련검이 뽑혀져 나왔고 이내 주창의 신형이 한 줄기 빛살로 변했다. 허공을 격하고 나아가던 주창의 빛살은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꺾였다. 동시에 번갯불이 콩 지져먹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각자 분분히 무기를 꺼내든 투귀대 고수들의 눈이 커졌다. 좌검우도를 든 여무사, 척사영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만나는구나, 악적.”
척사영의 두 눈에서는 살기가 줄줄 흘러내렸다. 주창은 찌르르 울리는 마련검을 털어 남아있던 경력을 털어낸 뒤 척사영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짓이오?”
“네놈들의 사악한 술수에 죽은 수많은 이들을 묻어주고 내 올라오는 길이니라.”
고오오오오!!!!! 척사영의 전신에서 살기가 흘러내렸다. 주창을 비롯한 투귀대 고수들은 그것이 살풍대가 저지른 일이란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살풍대가 지나간 길에는 풀 한 포기 하나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을 나서서 돕지는 않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들과 투귀대가 같은 마교 소속이라는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헉, 헉, 헉.”
잠시 대치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허름한 차림새를 한 동군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교 고수들을 확인한 동군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촤릉!!! 동시에 동군영은 허리춤에 걸린 검을 뽑아들었다. 그런 동군영의 검끝은 그의 숨이 가쁜 것만큼이나 아래위로 흔들렸지만, 동군영의 두 눈에서는 독기가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주창은 침음성을 흘렸다.
“설마. 저자의 가족이 피해를 입은 것이오?”
“멸문이다.”
주창은 이를 꽈악하고 깨물었다. 자신들에 비해 한없이 약한 동군영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독기가 그제야 이해가 갔다. 살풍대. 그 저주받을 이름의 원 기마대가 하필이면 덮친 곳이 만우와 함께 다니는 조선의 관리인 동군영의 가문을 덮친 것이다.
“살아남은 자는 기십이 고작. 그 지역의 유지이던 가문에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죽인 그들의 원죄.”
부르르르!!! 척사영의 검과 도에서 일어난 공명음이 주창을 옥죄어 들었다. 주창 역시 공력을 끌어올려 그런 척사영의 기운에 맞섰다.
“같은 마교라 했으니 네놈들이 감당하라.”
스스슥!!! 척사영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는 듯 싶더니 주창이 들어올린 마련검과 척사영의 좌검우도가 격하게 얽혀들었다.
“군사!!”
“…….”
마일은 척사영과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는 주창을 쳐다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기 때문이다.
‘저 여고수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한양도성이 바로 지근거리였다. 그렇다는 것은 만우가 바로 지척에 있다는 뜻이다. 이미 그의 심기를 한 번 거스른 자신들이 척사영을 해치운다?
“빌어먹을. 난 나서겠소.”
위문이 이를 악물면서 앞으로 나섰다. 언제부터 이것저것 재고 무림인인 자신들이 부딪쳤단 말인가. 일단은 소교주이자 대주인 주창을 돕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야아아아아!!!”
하지만 그 전에 위문은 자신에게 짓쳐드는 동군영을 보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쩡!!!
“으악!!”
우당탕탕!!! 위문이 내저은 손등에 동군영이 옆으로 날아가서는 쓰러졌다. 위문은 그런 동군영에게 차갑게 말했다.
“그대가 검주의 지인이라고는 하나 검에는 눈이 없다!”
검을 들고 달려든 상대를 살려서 보낸다는 것은 마교 고수의 사전에는 없었다. 하지만 검주의 지인이라는 것이 위문의 손속에 사정을 두게 만들었다. 알게 모르게 어느새 투귀대 고수들의 머릿속에 검주란 존재가 그토록 크게 자리 잡았다는 뜻이다.
“닥쳐라!”
동군영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검을 곧추세웠다. 만우에게 꾸준히 검술을 지도 받았지만 동군영은 검술에 재능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만우가 가르치는 것이라 웬만한 병사 한둘쯤은 상대할 정도가 되었는데, 동군영의 두 눈에서는 독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네놈들의 목을 베어 부모님의 영전에 바칠 것이다!”
동군영은 일전의 그 소심한 관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사이좋은 어머니는 물론이고 비록 서먹한 부자관계라고는 하나 아버지의 싸늘한 시체를 잊을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그 장면이 떠올랐다. 말발굽에 이리저리 밟혀 엉망이 된 부모님의 시신. 그 시신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이상, 동군영의 이 독기와 복수심은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으아아아!!”
동군영은 입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다시 위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문의 눈가에 살기가 깃들었다.
“나를 원망 마라!!”
검을 들고 달려든다는 것은 무사로써 검에 자신의 목숨을 걸겠다는 뜻이다. 위문의 폭혈도가 허공을 격했다.
“위문! 손속을 두시오!!”
그때 마일이 눈을 부릅떴다.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이미 내지른 도였지만 위문은 혀를 쯧하고 차면서 손에 힘을 뺐다. 쩌엉!!!!
“으아악!!!”
위문의 도와 부딪친 동군영의 검이 깨졌다. 그러면서 깨진 검의 파편이 동군영의 몸을 스쳐지나가면서 붉은 혈선을 남겼다. 동군영은 호구가 찢어져 피가 뚝뚝 흘렀지만, 깨진 검손잡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 동군영을 본 척사영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흡!!”
꽈릉!!!! 두 줄기의 벼락이 주창의 마련검을 때렸다. 주창은 그 경력을 뒤로 흘러내면서 마기를 끌어올렸지만 주창을 밀어낸 척사영의 신형이 동군영 앞을 가로막았다. 우르릉!!
“잠깐! 무사님도 잠깐 멈추십시오!”
위문을 향해 좌검우도를 들어보인 척사영에게서 뇌성이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순간 마일이 손을 휘저으며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형장은 들으시오. 우리는 이제 왜(倭)로 향할 것이오. 그대의 목숨을 거두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여기서 물러나시오. 대주.”
마일이 주창에게 눈짓을 했다. 마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주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를 어서 의원에게 데려가시오. 우리 앞을 막지 말고.”
“왜라. 왜(倭).”
척사영은 동군영을 보고서는 입술을 앙 깨물었다. 동군영 때문에라도 여기서 이들과 결판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았으니 됐다.
“목을 씻고 기다리거라.”
척사영이 살기를 흘려대면서 말했다. 주창을 비롯한 마일과 투귀대는 그들을 뒤로 하고 몸을 돌렸다. 척사영은 피투성이가 된 채 기절한 동군영을 안아들면서 사라지는 투귀대를 힐끗 쳐다보고는 한양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동군영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눈을 부릅떴다.
“윽.”
“몸에 구멍도 뚫려본 나으리가 엄살은.”
동군영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탕약 냄새가 은은하게 나고 있었지만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 동군영의 얼굴이 밝아졌다.
“만우, 자네.”
“그렇게 엉망으로 깨지고 다니라고 가르쳐준 검이 아니야 나으리.”
“…….”
만우의 핀잔에 동군영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어떻게 정신을 잃었는지 그때가 떠오른 것이다.
“눈 먼 칼에 맞아 비명횡사하지 말라고 가르쳐 줬지만, 무모하게 상대도 안 되는 적에게 달려들라고 가르쳐준 것도 아니야.”
만우는 살갗이 부서진 검조각에 여기저기 베여 하얀 붕대를 한 동군영을 보면서 혀를 쯧 하고 찼다.
“……어쩔 수 없었네. 부모님의 원수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 꼴이 나니까 속이 시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