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왜의 사신(4)2020.09.29.
마익후의 손에 철컹거리며 웬만한 어른의 머리통보다 큰 철권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철권을 착용한 마익후이 자세를 잡았다. 어깨를 좁히고, 두 주먹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마익후가 공력을 끌어올리자 그의 어깨에서 모락거리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아니면. 죽음?”
“이런 미친.”
괴권(怪券) 마익후. 괴검 문형일과 함께 검주 만우를 따른 낭인으로 그는 권으로 권법(拳法)의 주종이라는 소림의 백보신권(百步神券)의 계승자를 꺾고 그 위명을 강호 전체에 떨쳐 울렸다. 그런 마익후가 제대로 자세를 취하자 타케노는 이를 악물었다.
‘검.’
검이 없이는 저 무식한 놈을 대하기가 힘에 부친다는 것을 타케노가 느꼈다. 그래도 지지는 않을 자신이 있지만, 자신은 신센구미의 수장이자 동영 무사의 대표다. 그런데 고작 대장간의 야장과 비슷한 수준을 보여준다는 것은 그 자체가 창피다.
‘이런 무식한 놈이. 대체 조선에 왜!’
왜 이런 실력자가 조선에서 기껏 대장장이나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타케노는 이를 악물었다.
“뭐야. 싸움이야?”
그런데 그때 하늘 위에서 장난기가 가득 섞인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방매가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만우!!! 어깨에는…… 슌스케도 왔네?”
“우, 우웩.”
만우 때문에 허공을 나는 진귀한 경험을 한 슌스케가 헛구역질을 했다. 만우는 허공에서 슌스케를 집어던지고는 몸을 몇 번 꺾으며 내려섰다.
“야. 덕분에 좋은 구경하게 생겼네. 마익후의 권법이라니.”
만우는 재밌겠다는 듯 울타리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마익후는 그런 만우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대장.”
“그래. 잘 있었지? 팔뚝이 더 두꺼워졌다. 대장간에서 산 거야?”
“네.”
마익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타케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익후는 자신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옆에서 그 누가 말리더라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도 그를 말릴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하지만 타케노는 아니었다.
“슌……스케?”
“타케노! 하켄!!!”
동영의 사신을 봤다는 말에 그 사신들을 볼 수 있게 데려가 달라고 사정을 한 슌스케다. 안 그래도 그 사신들에 대해서 궁금했기 때문에 만우는 슌스케를 기꺼이 데려왔다.
“역시. 당신이었나!”
“실종되었다고 하더니 그 끈질긴 목숨으로 아직도 살아 있었군.”
“하.”
타케노와 슌스케는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슌스케가 사신들을 보러 가겠다고 말한 것은 오랜만에 고국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일월조. 내 일월조는 어떻게 되었지?”
일월조(日月組). 일월조는 슌스케가 조선에 끌고 온 무력집단의 이름이자 낭인단이었다. 누군가 밑에서 명령을 듣기 싫어하는 반골들이 모여 만든 집단으로 실력은 뛰어난 반면 그 수가 적었다. 슌스케는 막부의 명령을 받고 조선에 건너왔다. 조선의 반군에 원조를 하여 혼란을 일으키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임무에 실패하면서 슌스케는 고국에 연락할 방법이 없어졌다.
“일월조? 아. 네놈의 그 쓰레기 부하들이 모인 곳 말이냐?”
슌스케는 타케노의 유일한 라이벌이자 적수였다. 타케노가 몸집을 불려 전국 사무라이들이 소속된 신센구미를 만들었다면 슌스케는 소수이지만 타케노에 맞설 수 있는 소수정예의 사무라이들을 이끄는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임무에 실패한 놈들을 굳이 다이묘께서 거둬주실 필요는 없지. 안 그런가?”
“……그렇다면?”
“제 손으로 할복을 하고, 목을 내가 쳐주었지. 고통스럽지 않도록.”
타케노는 씩 웃었다. 슌스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럴 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무로막치 막부는 실패에 결코 자비롭지 않았다. 오히려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사무라이들은 차고 넘치고, 그들의 수가 과도하게 많아지는 것은 오히려 정부가 아닌 사무라이의 힘이 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적정한 수가 유지되는 것이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임무에 실패한 사무라이들은 가차없이 죽었다. 그것도 임무 실패의 책임을 온전히 스스로가 지고, 자진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 가족들은…….”
“교토에 유곽에나 가보면 아마 몸이 확 풀어져 있을 것이다. 크하하.”
타케노는 외팔이 되고, 볼품없는 모습이 된 슌스케를 비웃었다.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여 살아남은 일월조장 슌스케. 자진하라. 그게 다이묘께서 내리시는 자비가 될 테니. 하하하.”
타케노는 그런 슌스케를 비웃었다. 그런 타케노의 도발에 슌스케의 입에서 한숨이 길게 새어나왔다. 동시에 슌스케의 살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도를 다오!”
“하이!”
타케노는 그런 슌스케를 보면서 부하에게 손짓을 하자 도가 날아와 타케노의 손에 잡혔다. 타케노는 슌스케와 그 뒤에 선 마익후를 보면서 도집에서 도를 천천히 뽑아들었다. 스르릉
“자. 한 팔 못 쓰는 병신과 주먹이나 쓰는 대장장이 놈.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한 번 볼까?”
“타케노오오오!!!!”
그런데 그때, 슌스케의 손에서 섬광이 번쩍하고 튀어나왔다. 타케노가 미처 반응하지도 못할 정도의 속도였다. 그것을 울타리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만우가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습 많이 한 모양이네?”
투쾅!!!!!!
“내 먹이. 끼어들지 마.”
타케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눈앞에 마익후의 널찍한 등이 보였기 때문이다. 타케노는 슌스케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런데 마익후가 나서 슌스케의 검격을 막아낸 것이다.
“비켜라!”
“시끄러워. 내가. 먼저.”
“이…… 이놈들이!!!”
타케노의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올랐다. 자신이 슌스케의 검을 보지 못했다는 것도 충격인데, 자신을 놓고 먼저 싸우겠다고 싸우는 두 놈 때문이었다.
“죽인다. 죽인다아아!!!!”
타케노의 넓은 바짓단이 펄럭이더니 번쩍거리는 도가 마익후의 등을 노리고는 뻗었다. 기괴한 각도에서 찔러 들어오는 타케노의 도격은 두 눈으로 보면서도 절로 손발이 어지러워질 정도로 쾌속하면서도 변화가 많았다. 그런 쾌(快)와 변(變)에 대응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중(重), 그리고 정(停). 따다다당!!!! 주먹을 들어 올려 방어자세를 취하고, 거대한 몸을 그 뒤로 숨긴 마익후의 철권에 따당거리며 타케노의 검이 박혀들었다. 그런데 그 때 마익후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내 부하와 가족들의 원한이다 타케노!”
“슌스케!!”
쉬이잇!!!! 슌스케의 외팔에서 섬광이 폭사했다. 타케노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한 번 겪어본 극쾌(極快)의 찌르기다. 타케노가 도를 들어올렸다. 따당, 따다다당!!! 크게 원을 그린 타케노의 도에 슌스케의 찌르기가 막혔다. 그런데 마익후의 손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다시 마익후도 슌스케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끼어들지. 말아라.”
꾸릉! 마익후가 발을 굴렀다. 그러자 꾸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이 움푹하고 파였다. 동시에 슌스케의 허리가 뒤로 꺾였다. 철판교다. 마익후의 권풍이 대기를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슌스케는 엉망이 된 앞섶은 수습할 생각도 하지 않고 튕기듯이 몸을 튕겼다. 파바박!! 타케노의 도가 슌스케를 노리고 박혀든 것이다. 동시에 허공으로 뛰어오른 슌스케가 또 다시 섬전 같은 찌르기를 뿌리고, 마익후가 슌스케와 타케노를 향해 묵직한 권격을 날렸다. 까강! 깡! 따다당! 쿠웅! 우즈히코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그리고는 정신없는 전투가 벌어지자 눈앞이 어지러워져 눈을 비볐다.
“이익. 역시 사무라이놈들은 믿을 수가 없군. 그렇게 잘났다고 으스대더니.”
우즈히코는 타케노가 데려온 신센구미 사무라이들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대놓고 욕을 해댔다. 그러자 사무라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런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우즈히코였다.
“고로!”
“예, 주군.”
우즈히코가 가문에서 데려온 인자(忍者) 고로가 그림자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우즈히코는 손을 들어 역시 정신을 팔고 있는 방매를 가리켰다.
“저 계집. 저 계집을 데려와라. 감히 이 우즈히코를 무시한 그 대가를 톡톡히 보여줄 것이야. 흐흐흐.”
음심이 동한 우즈히코는 자신 때문에 싸우고 있는 타케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면 신센구미의 수장이라고 해도 쓸모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하이!”
인자는 명령 이외의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수련 과정에서 거의 감정을 잃어버린 그들은 주인이 내리는 명령에만 따르는 기계에 가까웠다. 스스슥! 그림자가 되어 다시 사라지는 고로를 본 우즈히코가 씩 웃었다. 그런데 그때, 우즈히코는 울타리 위에 올라앉아 자신을 쳐다보며 웃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놈은 또 무엇이냐?”
***** 만우는 싸움이 재밌어져 가는 와중에 슬그머니 나타났다 사라진 기척 하나에 고개를 돌려 우즈히코를 쳐다봤다. 재밌는 놈이었다.
“그림자 안에 몇 놈이 들어가 있는거야?”
우즈히코란 놈의 그림자 안에는 방금 스리슬쩍 사라진 기척 외에도 느껴지는 기운이 다섯 개가 넘었다. 저 정도면 그림자가 그냥 그림자가 아니라 대용량 그림자였다.
“동영의 사신이라. 저게 인자라는 놈들이란 소리지.”
인자는 그 이름답게 인술(忍術)이라는 그들만의 독특한 술법을 사용하는 이들이다. 그렇다고 주술사나 술법가들은 아닌 것이, 그들은 인술을 이용하는 자객이었기 때문이다.
“뭐, 광문자 그 놈만은 못하네.”
만우는 방매쪽으로 다가가는 인자의 기척을 느끼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런데. 노리는 게 방매라 이거지?”
우즈히코란 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만우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모든 사달을 일으킨 주인이 저놈이라는 것을 말이다. 방매는 확실히 보부상차림을 하고 다녀도 그 외모가 눈에 띄었다. 곱상한 것이 패랭이 모자를 쓰고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어도 여자인 것이 태가 났기 때문이다. 그것에 홀린 놈이다.
“흐흐흐.”
만우는 묘한 불쾌감을 느끼면서 실소를 흘려댔다. 그리고 방매 근처까지 인자가 접근한 것을 느낀 만우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졌다.
“요놈.”
꽈악!
“마, 만우?”
“뒷통수 좀 조심하고 다녀라. 이상한 놈들 꼬이잖아.”
만우가 발로 그림자를 즈려밟자 천천히 그림자 속에 숨어 다가오던 인자 고로가 목이 밟힌 채 땅바닥에서 버둥거렸다. 그것을 보고 놀란 방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틱, 틱. 뚜둑, 뚝, 뚜둑
“!!!”
만우는 인자의 마혈과 아혈을 짚은 다음, 몇 군데 혈을 짚었다. 그러자 인자의 눈이 커졌다. 뚜둑거리면서 저절로 뼈와 근육이 어긋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분근착골. 만우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손에는 조금의 인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내, 내 잘못인가?”
“그래. 네 잘못이지.”
“난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이렇게 하고 다니라니까.”
만우는 방매가 쓰고 있는 패랭이 모자를 꾹 눌러서 얼굴을 가리게 만들었다. 방매가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빼액하고는 만우의 팔을 퍽하고 때렸다.
“아파!!!”
“됐고. 저놈. 어떻게 해줄까?”
만우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자신을 경악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우즈히코와 눈이 마주쳤다. 방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느끼하고 재수없는 놈!”
“저놈이 보낸 거거든. 이놈.”
만우는 피식 웃으며 발작을 일으키듯 몸을 부들거리며 떨고 있는 인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지풍을 날려 혈을 풀어주자 인자가 축 늘어졌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억겁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 때문에 분근착골이 무림에서는 금기(禁技)에 속하는 것이다. 그 금기를 쓸 정도로 만우가 분노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두 번 다시 남자 구실 못하게 만들어줄까?”
“됐고.”
방매가 만우에게 말했다.
“내가 저놈을 죽도록 패버리고 싶어. 내 손으로!”
제 손으로 지금까지 자신에게 집적댔던 놈들을 모조리 처리했던 방매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순 없다. 제 손으로 직접 악적을 처단함으로써, 후손절단기의 명성을 유지해나갈 셈이다.
“후손절단기라니. 별호치고는 좀…….”
만우가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지만 방매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았어.”
만우가 다시 고개를 돌려 우즈히코를 쳐다봤다. 우즈히코는 자신의 처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웬 놈과 방매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 다시 분노한 듯했다.
“뭘 꼬나봐. 뒈질래?
만우가 우즈히코를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