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왜의 사신(3)2020.09.26.
“음. 소금기가 스며들었군. 이걸 관리하고 싶다는 뜻이겠지?”
서로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하나는 검을 휘두르는 이이고 한쪽은 그 검을 만드는 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 원하는 것이 통했다.
“어렵지 않지. 물결무늬가 새겨진 왜도라.”
간장의 눈이 반짝였다. 도신에 물결무늬가 새겨졌단 것은 접쇠 방식을 통해 도검의 내구성을 강화했다는 뜻이다. 그 작업을 반복하면 파도가 치는 듯한 물결 무늬가 도신에 새겨진다.
“누군가. 간장.”
그때 마익후가 드리워진 가죽을 들고 나왔다. 간장은 그런 마익후에게 손을 내저었다.
“이거, 싹 새것처럼 해서 나올테니까 넌 쉬고 있어. 알았어?”
“알았다.”
마익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마익후의 고개가 타케노를 향해 돌아갔다. 마익후를 본 타케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마익후가 타케노를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 마익후는 전신을 찌르는 것 같은 타케노의 강렬한 투기에 얼굴을 찌푸렸다.
“색목인?”
마익후는 금발에 누가보더라도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다년간 만우를 따라다니면서 까무잡잡해졌다고는 하지만 살결 자체가 조선인이나 왜인과는 달랐다.
“뭐냐. 넌.”
마익후는 다짜고짜 투기를 날리는 타케노를 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웬만한 여인의 허벅지만한 마익후의 팔뚝을 보고서도 타케노는 주눅 들지 않았다. 덩치나 생김새에 주눅이 들었다면, 타케노는 하켄(覇劍:패검)이라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
“외공(外功)을 익힌 색목인인가?”
마익후는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타케노의 투기가 흩어졌다. 타케노는 그런 마익후를 보면서 더욱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너 같은 강자가 야장을 하고 있는거지?”
“뭐라는지. 모르겠다.”
마익후는 귀를 가리키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익후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조선말이었기 때문에 타케노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익후가 별로 충돌을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뭐. 나도 도가 없으니.”
타케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자신의 손에도 도가 없으니 손이 근질거려도 마익후를 계속 도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달리 발달한 신체로 봐서는 병장기가 아닌 무투를 즐겨하는 쪽인 것 같았다. 타케노는 그런 상대와는 거의 싸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한 번 겨뤄보고 싶었지만 상대 쪽에서 피하니 억지로 싸움을 걸 수도 없었다.
‘사신으로 온 거니까. 참아야지.’
타케노는 하켄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조선에 온 이유 자체를 망각하지 않았다. 그는 서로 간의 실력을 겨루는 것을 좋아하지만, 싸움에 미친 투귀(鬪鬼)는 아니다.
“다음 번에 한 번 붙자. 내가 찾아오지.”
타케노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 번 투기를 일으켰지만 마익후는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우물로 가 물을 한껏 길어 뒤집어 썼다. 촤아아악!
“커허.”
열기가 몸을 불살라먹을 것 같은 용광로 옆에 있다가 나와 시원한 물을 뒤집어 쓰면 그야말로 극락이 따로 없다. 그 때문에 마익후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런데 그런 마익후의 귀에 시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느끼하게 생긴 놈은?”
“어이. 여자. 난 오오토자코 가문의 우즈히코라 한다. 평민인가? 어?”
방매가 자꾸만 추근대면서 따라오는 우즈히코에게 도끼눈을 뜨고 쳐다봤다. 하지만 우즈히코는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여자에게 거부를 당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방매의 도끼눈에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부끄러워하지 말라. 내 여자가 된다면 엄청난 돈을 줄테니까. 어떤가.”
턱. 우즈히코가 방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방매의 눈에 불꽃이 확하고 피어올랐다. 그녀는 매분구다. 한양제일매분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능하지만, 매분구는 기본적으로 혼자서 하는 직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혼자 다니는 것을 보고 집적대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양반가에 들어가 화장품을 팔려고 하면, 개중에 꼭 발정난 양반들이 끈적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집적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놈들과 똑같은 끈적거림이 우즈히코에게서 느껴졌다.
“야. 손 안 내려?”
탁! 방매가 어깨에 올려진 손을 손등으로 쳐냈다. 방매의 표독함에 우즈히코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하하거리며 웃었다.
“조선이라 모르는 모양이구나. 하긴. 이곳은 막부가 아니었지. 돈을 주겠다는 것이다. 돈.”
쩔렁! 우즈히코가 비단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 안에서는 은병이 쩔렁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우즈히코는 자신이 이것을 꺼내면 평민 여자 따위는 알아서 옷고름을 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방매는 그런 ‘따위’가 아니었다.
“이 미친 X끼가.”
뻐억!!!! 방매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다리를 올려찼다. 한때 방매의 별명은 과부제조기, 혹은 후손절단기였다. 방매에게 집적댔다가 알이 깨져나간 남정네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방매에게 호되게 당해도 당한 이들은 어디에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그런 방매를 노리고 파락호들을 동원해도 방매의 수박희에 되레 깨져나가는 것은 파락호들이었다. 게다가 그런 일이 일어난 다음이면 방매는 관아를 찾아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고했다. 그렇게 되면 개쪽을 당하는 것은 매분구에게 집적댔다가 호되게 당한 남자 쪽이었다. 그 일이 소문이 나면서 점점 방매에게 집적대는 이들이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반대로 방매의 인기가 여인네들 사이에서 마구 올라갔다. 그 때문에 방매를 먼저 찾는 양갓집 규수들이나 마나님들이 많아지면서 방매가 한양제일매분구로 불리게 된 것이다.
“어…… 어…… 어허…… 억…….”
우즈히코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하지만 후손절단기라 불린 방매의 발은 우즈히코의 국부 바로 아래에 멈춰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방매의 다리를 누군가의 손바닥이 누르고 있었다. 목표로 노린 것의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지 못한 것이다.
“건방진 계집. 감히 뉘 안전이라고.”
패액! 타케노의 끈적한 살기가 깃든 목소리와 함께 파공성이 들리자 방매가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틀면서 다리를 뻗었다. 만우에게도 인정을 받은 수박희의 각법(脚法)이었다. 하지만 팡하는 소리와 함께 방매의 눈이 커졌다.
“악!!!”
어느새 방매의 발목을 붙잡은 타케노가 방매를 허공에 집어던진 것이다. 그 속도가 상당했기 때문에 방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어딘가 부딪치면 한 두군데 부러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턱. 휘릭! 하지만 방매의 몸에는 그녀가 생각한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허공을 날던 그녀의 몸을 누군가 받아낸 것이다. 마익후였다.
“괜찮나?”
“아! 마익후!!!”
방매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마익후는 그런 방매를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마익후는 말이 어눌할 뿐, 방매를 대하는 만우가 다르다는 것을 귀신처럼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웠다.
‘미래의 주모.’
마익후는 그렇게 방매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다음 타케노를 쳐다봤다. 마익후의 두 눈이 서늘해졌다.
“선공. 맞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네 마음이고.”
조선말과 왜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타케노의 투기가 쭈욱하고 짙어졌다. 타케노의 뒤에 선 우즈히코가 소리를 질렀다.
“저 방자한 계집년을 끌고와라. 감히 내가, 오오토자코 가문의 대가 끊길 뻔 하였다! 저 년을!!!”
타케노의 투기와, 우즈히코의 태도를 본 마익후의 어깨가 부풀어올랐다. 마익후는 타케노를 향해 말했다.
“검. 없다. 상대. 안 된다.”
타케노는 마익후를 보면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마치 늑대가 으르렁대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길 수 있다?”
“못할. 것도.”
마익후에게서는 강렬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고 타케노에게서는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 둘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면서 주변으로 강력한 장력을 뿜어냈다.
“타케노! 다이묘의 명성에 먹칠하지말라!!!”
“하이!”
타케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쉭하고 꺼지더니 마익후를 향해 짓쳐들었다. 마익후는 검도 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검사의 모습에 어깨를 부풀렸다.
“날. 무시하는. 것인가.”
방매는 우즈히코를 노려보면서 이를 득득 갈고 있었다. 마익후는 자신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타케노를 향해 주먹을 들어올렸다. 마익후의 단전에서 공력이 용솟음쳤다. 꽈릉!
마익후가 두 주먹을 부딪쳤다. 그러자 공력이 담긴 굉음이 터져나가면서 쇄도해오는 타케노를 덮쳤다. 타케노의 신형이 흔들렸다.
“끼요오오오!”
하지만 타케노의 신형이 흔들린 것은 음파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타케노는 몸을 흔들어 음파가 실린 장력을 흘려보낸 것이다. 파바밧!!!
“큼!”
타케노의 뒤로 흘러나간 장력은 우즈히코에게로 향했지만, 그 사이 우즈히코를 보호하기 위해 튀어나온 신선조의 다른 사무라이들이 튀어나와 막아냈다. 쉬시식!!! 타케노는 손을 세워 손날을 마익후를 향해 휘둘렀다. 비록 손에 쥔 검은 없지만, 자신의 신체를 검처럼 사용한 것이다. 마익후의 눈이 커졌다.
“제법!”
쾅! 쉬익!!! 타케노가 자신의 손을 도검처럼 사용한 것은 마익후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그만큼 검에 대한 타케노의 이해도가 깊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익후의 압도적인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은 타케노의 검에 대한 이해를 뛰어넘는다. 촤아악!
“무식한 놈.”
타케노가 침을 땅에 탁하고 뱉었다. 마익후가 통나무처럼 굵은 다리로 타케노의 관자놀이를 후려치려 한 것이다. 마익후는 덩치와는 달리 몸이 날랬고 유연했기 때문에 타케노는 그 공격을 막아낸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 때문에 속이 찌르르하고 울렸다.
“저, 저런 멍청한! 대장간에서 일하는 야장조차 이기지 못하는 놈이 하켄이란 말이냐!!!”
우즈히코는 망나니나 다름 없었다. 그 어떤 귀족도 신선조의 수장인 하켄 앞에서 저렇게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즈히코는 무로막치 막부의 부마가 된 순간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그에게는 다이묘가 뒷배로 있기 때문이다.
“시끄럽다.”
쿵! 마익후가 다리를 굴렀다. 그러자 땅이 움푹 파이면서 우즈히코가 서있던 땅이 우르릉하고 흔들렸다.
“우악!”
쿵! 그 바람에 우즈히코는 엉덩방아를 찧어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수모를 당했다 생각한 우즈히코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었다.
“크아아악! 저놈! 감히 동영의 사신인 나에게 이 수모를 준 저 놈을 죽여라! 죽여!!!”
우즈히코가 신선조의 다른 무사들을 돌아보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타케노는 그런 우즈히코를 보면서 싸울 마음이 싹 식는 것을 느꼈다.
‘그냥 뒈지는 게 더 도움이 되겠다만.’
하지만 타케노는 꾹 참았다. 그가 거칠 것이 없는 신선조의 수장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다이묘의 수하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이묘의 부마인 우즈히코에게 그가 강제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 그의 눈에 나기라도 한 다음, 그가 다이묘에 오르면 신선조는 그대로 끝장이다. 막부에는 신선조를 대체할 수 있는 잉여 사무라이가 차고 넘쳤다.
“됐다. 그만하도록 하지.”
“사과.”
타케노가 자세를 풀었지만 마익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매, 즉 미래의 주모에 대한 사과를 반드시 받아내겠다는 뜻이다. 타케노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녕 이곳이 통채로 날아가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정신은. 네놈이.”
마익후가 손가락을 흔들고는 허리춤에 매여있던 철권을 손에 끼웠다. 철커덩, 철컹!
“사과? 아니면 혼나 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