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왜의 사신(2)2020.09.22.
타케노는 속이 부글거렸지만 꾹 참았다. 사신으로 와서 호위대장이 사신과 마찰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전장을 누비고 다닐 때 비단포대자루에 휩쌓여 배부르고 따뜻하게 지냈을 이 철없는 도련님에게 진정한 무사의 검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었지만, 타케노는 꾹 참았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소장의 검이 도련님을 지켜드리지 못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를 방지하기 위함이니 이해해 주시길.”
타케노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휙하고 돌렸다. 우즈히코는 그런 타케노를 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못 배운 천한 놈이. 어디서 감히.”
우즈히코는 타케노가 자신을 쳐다볼 때마다 깔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머리가 비상했고 눈치가 빨랐다. 그 때문에 타케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철 없고 어린데다가, 가문만 믿고 까부는 꼬마. 감히 오오타자코 가문의 적자이자 다이묘의 사위인 자신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타케노를 우즈히코가 좋게 볼리 없었다. 난세가 아니라면 백 리 밖에서 자신을 봐도 납작 엎드려야 할 놈이다. 우즈히코는 혀를 쯧하고 찬 뒤 팔짱을 꼈다. 근데 그런 우즈히코의 눈이 커졌다.
“오, 오오!!!”
우즈히코는 알아주는 색광이었다. 그는 다이묘의 사위이지만, 영웅은 호색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실제로 다이묘나, 자신의 아버지만 해도 정실과 첩이 다섯이 넘었다. 거기에 여자는 남자의 악세사리일 뿐이다. 자신 같은 훌륭한 남자의 씨앗을 가질 수 있는 것에 여자는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우즈히코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방매와 호선, 소령이 대장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여인. 저 여인을, 아니 내가 가겠다.”
우즈히코가 말을 몰아 행렬에서 이탈하자 그 뒤를 오오토자코 가문에서 붙여준 사무라이 셋이 바짝 뒤따랐다. *****
“다음!”
쾅!!! 데구르르 문형일의 곡도의 면에 맞은 계방 무인이 개구리처럼 사지를 쭉 뻗었다. 움찔 문형일이 손에 들린 곡도를 빙글하고 휘두르자 수련복을 입은 계방의 무인들이 움찔했다. 문형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세자마마와 충녕대군대감께서 지켜보고 있으시다. 그런데 계방 무인이라는 것들이 머뭇거려?”
충녕대군은 6세를 앞두고 관례를 올려 공식적으로 대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양녕대군 역시 마마라는 칭호를 받았다. 세자는 신이 난 듯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었지만 충녕대군은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폭력적인게 보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왕세자마마. 서책을 보실 시간이옵니다. 이숙 스승께서 기다리고…….”
“가지 않겠다!”
“마마!”
충녕대군이 세자의 공부 거부에 고리눈을 떴지만 그래봤자 어린 연차였기 때문에 마냥 귀여워 보이기만 했다. 세자는 예상대로 그런 충녕대군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얼마나 호쾌하고 좋으냐! 우리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이들이다. 군주로써 이들을 위무하는게 더 중요하지 않은가!”
“마마! 허나…….”
“계속하거라!”
세자의 말에 문형일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까무잡잡한 그의 피부가 유독 돋보였다. 문형일은 임금이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를 해 궁궐에 들어왔지만 그의 피부색이나 다른 여타 출신성분을 들어 계방 무인들의 무공교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재능 있는 무인들을 가르치는 것이 꽤나 보람이 있어 즐거워 하고는 있었지만, 슬슬 좀이 쑤시는 것도 사실이었다.
‘평화로우나 따분하다.’
문형일은 히죽 웃었다. 역시 인생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었다. 평화롭고 안정적이지만 따분한 것처럼, 나가면 따분하지 않은 대신 평화롭지 않고 불안할 것이다.
“문 교두!”
그런데 그때 누군가 뛰어들와 문형일을 불렀다. 문형일이 보니 좌익위 이찬이었다. 그의 부름에 문형일이 갔다.
“어쩐 일로 찾으십니까?”
교두의 업무 이외에는 딱히 문형일에게 주어진 업무는 없었다. 그는 특별히 왕에 의해 채용이 되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찬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상전하의 어명이네. 동영에서 온 사신단이 궁에 도착하지 않았으니, 교두인 자네가 나가 확인을 하라는 교지일세.”
“저요?”
문형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찬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쯧하고 혀를 찼다.
“그래. 뭐 어려운 일은 아니네. 자네밖에 여유 시간이 나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 어차피 지도대련은 이제 끝날 시간이 아닌가.”
이찬의 말에 계방 소속 무관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문형일과의 지도대련은 배우는 것이 많았지만, 정말 구토를 하는 자가 나올 정도로 혹독하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색목인이라는 것 때문에 우습게 본 이들도 있었으나 지금은 문형일은 우습게 보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문형일이 설운과의 비무에 설운을 꺾는 모습을 보인 후였다. 설운은 좌익찬에 불과했지만 좌익위인 이찬 다음의 실력자로 권희달에 이어 차세대 조선제일검이 될 것이란 소리를 듣고 있는 촉망 받는 무관이었다. 거기에 반군 진압군의 부장으로 조사의의 반군을 괴롭힌 공에, 이번에 원의 기마대의 침입을 막아내기까지 한 무관이었다. 그런 설운을 문형일이 기이한 곡도 한 자루로 찍어누른 것이다. 그러면서 문형일이 한 말은 그를 은근히 무시하던 계방의 무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야. 너 많이 늘었다? 이제 좀 힘든데?]
문형일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면서 설운을 일으켰다. 설운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음에는 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0년도 일러. 하핫.]
문형일이 그 정도로 고절한 무사인 줄 몰랐던 계방의 무관들은 그 이후로 조용해졌다. 그리고 문형일은 그 다음부터는 별 무리 없이 계방의 무관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물론, 무림인 출신에, 중원에서도 이방인 신분이었던 문형일의 교육 방식은 항상 혹독했다. 그가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흘린 한 방울의 땀이, 전투에서의 한 방울의 피가 된다! 굴러라! 열심히 굴러서 벽을 깨라!]
어쨌든 그렇게 무서운 호랑이 교두인 문형일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계방의 무관들이 경례를 일사불란하게 하고는 삽시간에 해산했다. 혹시라도 문형일의 마음이 변해 붙잡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저 망아기 같은 놈들이 자네 말은 잘 듣네 그려.”
본래 무인들을 다루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다들 한가락 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었기 때문이다. 이찬은 그런 그들을 훌륭하게 조련한 문형일을 보면서 칭찬했다.
“이게 다 대장님한테 배운 겁니다. 아. 저는 그냥 나가서 데려오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부탁함세. 워낙 왜놈들이 거친 놈들이 많아서 말일세. 패악이라도 부리지 않을런지 걱정이 되는구만.”
“음……거친 놈들이라.”
문형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왜구들은 감히 명나라의 해안가까지 배를 타고 기어들어와 죽여도 또 다시 생겨나는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놈들의 호전성에 대해서는 문형일도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슌스케 같은 놈이려나?”
문형일이 씩 웃었다. 안 그래도 평화에 슬슬 질려가던 참이다. 가끔 쌀만 먹는 것이 아니라, 이런 별식도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거친 놈들 때문에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대가 되는 문형일이었다.
“쓸데없는 소란은 피울 필요 없네. 명심하게. 사신단이란 것을.”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갔다 오겠습니다.”
문형일이 곡도를 허리춤에 척하고 걸면서 이찬에게 목례를 했다. 이찬은 교지를 손에 쥐고 사라지는 문형일을 보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괜찮겠지……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닐 거야. 그렇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던 이찬의 허리를 누군가 콕콕거리며 찔렀다. 그것을 느낀 이찬이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했다.
“이찬!”
“예, 왕세자마마.”
세자가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볼을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그 뒤에 선 충녕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었다.
“실컷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왜 그만둔 거야!”
이찬은 계방의 좌익위이기 이전에 동궁, 왕세자의 호위다. 이제 마마란 칭호까지 받은 세자는 공식 후계자로 암묵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이찬은 표정을 짐짓 엄하게 지었다.
“왕세자마마. 무예는 몸을 강건케 만드는 정도로만 하시옵고, 이제는 마마께서 지혜를 쌓기 위해 가실 시간이옵니다.”
“이숙 스승에게 가려고?”
“예, 마마.”
빈객 이숙은 임금이 특별히 세자에게 붙여준 학자이다. 하지만 워낙 책을 보는 것을 싫어하고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는 세자는 틈만 나면 도망나가기에 바빴다.
“형님. 가요. 오늘은 이숙 스승께서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신다고 하셨어요.”
“넌 그게 재밌더냐?”
“형님은 그게 재밌지 않으셔요?”
“난 무예가 더 좋다.”
이찬은 어느새 충녕의 손에 붙들려 끌려가는 세자를 보면서 슬며시 피어오른 입가를 손가락으로 꾹하고 눌렀다. 자신이 웃는 것을 세자가 본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지혜는 네가 쌓고, 난 무예를 쌓으면 될텐데. 지혜가 필요한 일은 네가 도와주면 되지 안으냐.”
“그런 말 마시고 형님. 그러다 아바마마께서 무학대사님을 부르면 어떻게 하시려고.”
“……가자.”
무학대사가 올 수도 있다는 한 마디에 세자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세자라는 것도 통하지 않는 무학대사는 세자의 천적이었다.
“이찬!!”
“예, 마마. 따라가겠사옵니다.”
이찬이 자신을 찾는 세자와 충녕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
“밖에 사람. 많다. 많이 왔다.”
마익후의 팔근육은 만우와 헤어질 때보다 더 커진 듯했다. 거기에 그의 피부가 뜨겁게 타오르는 불에 반사되어 번들거렸다.
“사람? 웬 사람?”
“밖에. 사람.”
“에이. 뭐 사러 왔나 보지. 누가 또 호미나 낫을 갈러 왔나?”
간장은 철사처럼 사방으로 삐죽거리는 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인상을 스물이 아니라 마흔으로 보이게 만드는 주술이 걸린 수염이었다.
“아니다. 아는 사람이다.”
“아는 사람이라고?”
마익후는 조선말도 띄엄띄엄 단어로만 말했다. 한어(漢語)도 그런 식으로 말했지만, 의사소통을 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금발을 뒤로 쓸어넘긴 마익후가 쇠를 두드리던 망치를 내려놓았다. 간장은 마익후보다 먼저 풀무와 용광로의 열을 막기 위해 드리운 가죽을 들어올리며 대장간 밖으로 나갔다.
“응? 왜인(倭人)?”
간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허리춤에 왜도를 두 개나 빗겨찬 왜인, 타케노가 서있었기 때문이다. 타케노는 간장을 보고는 말했다.
“야장(冶匠)인가?”
“뭐라는 거야.”
타케노가 왜어(倭語)로 말했기 때문에 간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타케노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언어의 장벽 때문이다. 타케노는 허리춤에 빗겨차고 있던 왜도 두 자루를 풀었다. 그리고는 도지에서 도를 뽑아들었다. 샤라랑
“……오!”
간장의 눈이 커졌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타케노가 왜도를 빼들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보다 간장은 왜도가 뽑혀져 나오면서 울려퍼진 영롱한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좋은 도검!”
타케노가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여긴 알아보는 이가 있군.”
지금까지 한양으로 오면서 대장간을 여러군데를 거친 타케노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가 찬 도검의 비범함을 눈치챈 야장이 없었다. 그런데 간장은 소리만 듣고 반응한 것이다.
“내가 아끼는 애병이다. 날을 세우고 기름칠을 해다오.”
우렁우렁한 고리눈에 철사 같은 수염을 가지고 있어 험악해 보이는 간장이었지만 타케노는 개의치 않았다. 간장의 몸에서 느껴지는 화기(火氣) 때문에 그가 야장이란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