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왜의 사신(1)2020.09.19.
만우는 유사길을 한참동안 괴롭힌 후에야 홀가분해진 표정을 지었다. 유사길은 결국 만우가 보고 있는 앞에서 하륜에게 약조를 해야만 했다. 고명과 인장. 어쩌다보니 임금을 도와주게 된 만우지만 개의치 않았다. 임금에게 신세를 진 것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명나라 황실에도 골탕을 먹여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언살은 죽였지만 유사길은 몸 성히 돌려보낸다. 유사길을 통해 자신이 한 일이 명나라 황실에 일어나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호전적인 군왕이라고 했지. 연왕 주체.’
연왕 주체라면 만우가 몇 번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주원장의 네 번째 아들이지만 이민족들과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 곳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연왕 주체는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오히려 강력한 정예병들을 길러냈고, 그 병사들을 몰아 건문제를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명나라의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직접 선봉에 설 정도로 호전적인 성격이었는데, 만우의 도발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지, 심히 궁금해졌다.
“뭐. 임금이 알아서 해주겠지.”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것까지 계산해서 임금이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도와준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만우는 하나씩 동군영을 위해 대신 움직여 주었다. 그 여리고 소심한 놈이 질질 짜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이렇게 동군영 대신 만우 자신이 움직이는 것이 더 나았다.
“그럼 다음은.”
만우는 팔짱을 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마교.
“주창. 그리고 나머지 투귀대 놈들.”
만우의 눈가에 살기의 귀화가 피어올랐다. 주변의 공기가 싸늘해질 정도였다. 만우는 살풍대가 등장하자 귀신처럼 사라졌던 투귀대의 고수들을 떠올리고는 이를 뿌득 갈았다.
“하오문과 은월루가 다 나섰으니까, 조만간 가져오겠지.”
만우는 팔짱을 턱 끼고는 궁의 담벼락을 넘었다. 궁을 호위하고 있는 수백의 금군들은 전부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단 한 명도 만우의 움직임을 눈치채는 이들이 없었다.
“쌉니다 싸요! 조가 한 됫박에…….”
“명나라에서 들여온 기가 막힌 옷감 팔아요!!!”
“싸다 싸! 얼굴에 한 번만 바르면 아기 피부처럼 뽀송해지는 미안수가…….”
만우는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간만에 느껴지는 평화로움에 만우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이게 사람 사는 느낌이지.”
부여에서 오랜만에 맡았던 무림의 향기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그곳은 사람은 많지만 이런 평화로움이나 사람 냄새가 없는 곳이었다. 쇠냄새와 피냄새를 가득 품은 이들만이 눈을 번뜩이며 먹잇감이 없나 이리저리 활보하는 곳이 바로 무림이다. 이제는 그게 지겨워 조선으로 돌아온 만우였다. 그리고 이게 만우가 바란 삶이었다.
“쩝.”
만우는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조선에 와서는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있지만 다 개소리다.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이다.
“더럽게도 없지. 더럽게도.”
만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기껏 왕의 부탁도 들어주고, 어르신이 부탁한 손녀까지 찾았는데 반란이 일어나질 않나, 손녀는 납치를 당하질 않나. 한시도 편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길을 비켜라! 사신 행차하신다!”
만우가 걷고 있는 대로는 광화문부터 숭례문까지 이어진 한양에서도 가장 큰 대로(大路)였다. 숭례문이 한양의 정문이고, 광화문은 궁궐의 정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로는 수시로 양반네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사신은 처음이었다. 방금 전에 명에서 온 사신을 떡 주무르듯 주무른 만우가 눈을 반짝였다.
“사신이라. 또 어디서 온 놈들이지?”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명에서 온 사신들이 이미 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사신이 왔다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다.
“길을 터라!!!!”
목청이 큰 군관 하나가 우렁차게 소리치자 길을 지나다니던 백성들이 길가로 분분히 비켜섰다. 그러면서 궁금한 눈으로 사람들이 사신의 행차를 지켜봤다.
“오!”
만우는 그 인파에 섞여 사신 행렬을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앞뒤로 조선의 군관과 군졸들이 호위를 하고 있고, 사신단의 행렬은 그 중간에 있었는데 규모가 스무 명 내외로 아주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개중 말에 올라타 품이 큰 소매에 양팔을 끼워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허리춤에는 긴 왜도와 짧은 왜도를 차고 염소수염을 기른 매서운 눈의 남자가 만우의 눈에 띄었다.
“왜놈들이구나.”
만우가 히죽 웃었다. 어디선가 봤다 했더니 함주에서 맨 처음 만났던 슌스케와 그 일월조라는 놈들의 복장과 똑같은 옷을 입은 놈들이었다.
“저렇게 펄럭거리는 옷에 나막신을 신고 어떻게 싸우는 거야. 신기한 놈들일세.”
만우는 그들의 의복이 참으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조선이나 명의 의복도 품이 넓기는 했다. 하지만 활동성을 위해 입는 무복 같은 경우는 팔과 다리를 끈으로 동여매 움직이는 데 거슬리지 않게 해준다. 하지만 저놈들은 아니었다. 왜도를 차고 있는 놈들이 슌스케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무사인 듯했다. 그런데 그놈들의 상의와 하의의 품은 길다 못해 치렁치렁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발에는 맨발에 나무로 된 나막신을 신고 있었다. 저런 걸 신고 어떻게 싸우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신선……조(新選組).”
만우는 그 놈들의 검집에 새겨져 있는 각인을 보고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신선대, 뭐 이런 의미겠지? 슌스케 그놈이 일월조라고 했으니까.”
슌스케가 일월조장이었다. 왜에서는 투귀대, 정의대 식으로 ‘~대’를 붙이는 게 아니라 ‘~조’를 붙이는 모양이었다. 만우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밌는 놈들이네.”
만우는 왜무사 복장을 한 이들과, 사신으로 온 문관만 스무 명이지 그들이 데려온 하인들을 보면서 씩 웃었다.
“전부 무사들이라고? 그런데 하인 복장을 하고 있고?”
신선조라고 각인이 된 왜도를 허리춤에 차고 있는 왜무사들까지 포함해서, 그 뒤에서 짐을 이고 고개를 숙인 채 줄을 맞춰 걸어오는 하인들까지. 그들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슌스케도 그렇고, 이 왜의 무사들은 살기를 숨길 줄을 몰랐다. 그 살기를 갈고 또 갈아 예리하게 만드는 게 그쪽의 유행인 모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살기는 만우에게 고스란히 읽혔다.
“대략 백 정도. 백 명이나 되는 무사들을 끌고 온 저의가 뭘까?”
만우는 슌스케에게 신선조에 대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서는 몸을 돌렸다.
“길을 터라!!!”
*** 깡! 깡! 깡! 깡! 무로막치 막부의 4대 다이묘인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오른팔이자 신센구미(新選組: 신선조)를 창설하고 휘하에 3만 무사를 끌어모은 하켄(覇劍: 패검) 타케노(笨蛋)는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왜도를 느끼며 주변을 살폈다.
‘이곳이 조선.’
조선은 무로막치 막부에게 중요했다. 아니, 과거에도 조선, 그 이전의 고려는 모든 막부에게 중요했다. 작게는 해적들이 항상 전쟁 중인 섬나라에 비해 풍요로운 조선을 더 선호했기 때문에 해적들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리고 크게는 식량난 등 문제가 생겼을 때 원조를 요청해 식량을 지원 받을 수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선을 통해 선진문물들이 막부로 흘러들어갔기에 막부의 몇몇 예술을 좋아하는 이들은 조선을 동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못 먹을 이유가 없는 곳이로다.”
하지만 타케노는 그런 동경의 눈빛을 보내는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선은 먹잇감일 뿐이다. 그와 휘하의 3만 사무라이들이 전대 정이대장군이었던 아시카사 요시미쓰(足利義滿)의 뒤를 이어 다이묘로 등극한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를 도와 전국을 제패했다. 처음에 타케노를 따르는 사무라이라고 해봤자 채 이십이 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연전연승을 올리며 하켄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자 세력이 늘어나면서 무려 삼만에 육박하는 사무라이가 모여든 것이다. 물론 그들 중에는 진짜배기 사무라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이 천 남짓이었지만 단일 세력으로 그는 다이묘의 친위대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자랑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아래부터 기어 올라가 전국을 집어삼킨 신선조의 수장인 하켄 타케노는 조선이라고 해서 집어삼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월조. 그 등신 같은 놈들은 실패를 했지만.”
신선조가 가장 많은 사무라이들이 속한 것으로 알려진 세력이라면 일월조의 슌스케는 백 명 남짓한 사무라이를 이끄는 놈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놈이 이끄는 백 명의 사무라이들은 전부 진짜배기들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월조는 신선조와는 달리 낭인으로 막대한 돈을 받고 의뢰를 수행했다. 그런 일월조에게 다이묘는 막대한 의뢰금과 함께 조선에서 일어난 반란을 도우라는 밀명을 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떠난 일월조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이묘께서 심약하신 게 마음에 걸리는 군.”
전대 다이묘는 중국으로부터 공헌왕(恭獻王)이란 칭호를 받았다. 공헌(恭獻)은 예의 바르고 공손하다는 뜻으로, 전대 다이묘를 기특하게 여겨 내려진 별호다. 그리고 현재의 다이묘 역시 그런 전대 다이묘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아 온유하고 심약했다. 그가 전국 제패를 한 것도 타케노 같은 사무라이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장(智將)들의 번뜩이는 책략 덕분이다. 어쨌건 다이묘는 일월조가 연락이 두절되자 조선에서 이를 알고 추궁할까 더럭 겁이 나 타케노를 조선사신대의 호위대장으로 삼아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사신으로 삼은 이가 다이묘의 사위인 오오토자코 우즈히코(大戸迫宇津彦)였다. 이제 막 솜털이 빠지고 수염이 나고 있는 어린 놈을 보낸 것이다. 뭐, 문중에서는 똑똑하단 소리를 듣고 있는 듯 한 놈이었으나, 그 성격이 심히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는 어린 놈이었다. 깡, 깡, 깡, 깡! 팔짱을 낀 채 말안장 위에 앉아있던 타케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금속성을 보아하니, 근처에 대장간이 있는 모양이었다.
“대장간이라.”
타케노는 중얼거리면서 허리춤에 매달린 왜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애병이자 수라를 거쳐오면서 몇 번이나 그의 목숨을 지켜주기도 했던 명도였다. 그런 명도가 바다를 건너고, 동래의 포구에서 이 먼 한양까지 올라오는 동안 제대로 된 관리를 받은 적이 없었다. 올라오면서 본 조선의 대장간이란 곳이 전부 타케노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도성이니 괜찮은 대장간이 있다는 것인가?’
사무라이들이 즐비하고, 문보다는 무(武)를 중시하는 막부에서는 대장장이를 적극적으로 키워냈다. 그렇기 때문에 실력있는 대장장이들이 많았는데, 조선은 아니었다. 나라에 의해 엄격하게 야장들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고을이나 그런 곳에서 만난 야장들은 기껏해야 호미나 낫 같은 것을 만드는게 고작인 이들이었다.
‘북쪽에 가면 질 좋은 철이 나오는 곳이 있다고 들었거늘.’
타케노는 그 쪽으로 신경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타케노는 말을 몰아 사신대를 이끄는 장수에게 말했다.
“마 장군. 근처에 대장간이 있는 것 같은데, 잠시 들렸다 갈 수 있겠소이까?”
마식은 타케노의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거친 수염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혔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재량으로 약간의 시간은 줄 수 있소. 오래는 머물 수 없소이다.”
숭례문을 통과한 순간 이미 이 행렬이 궁에 보고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신단의 호위대장이 부탁하는 것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맙소이다.”
타케노는 그렇게 말하고는 말머리를 돌려 우즈히코에게 다가갔다. 신기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던 우즈히코가 타케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인가.”
우즈히코는 명문가의 자제였다. 거기에 부마이기도 하니 그 신분이란 것이 막부에서도 최상위였다. 그와 반해 타케노의 신분은 최하층민에 속했다. 그는 성씨조차 없는 천민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검 하나로 신선조의 수장에까지 오른 것이 바로 타케노다. 그런 타케노도 우즈히코에게는 반말을 들어야만 했다.
“잠시 근처 대장간에 다녀올까 합니다.”
“대장간? 여정이 길었기 때문에 이 몸이 몹시 피곤하다. 대장간은 다음에 가라.”
우즈히코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타케노는 그런 우즈히코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검을 예리하게 갈아두는 것은 모든 무사의 기본이다. 하지만 우즈히코는 검 한 번 쥐어본 적이 없는 샌님이다.
‘이런 놈이 부마라니.’
오오토자코 가문과 혈연으로 맺어지기 위해 다이묘가 내린 결정이지만 불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검을 늘 예리하게 갈아두는 것은 성스러운 예법과도 같은 일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에잉…….”
우즈히코는 못마땅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