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명나라 사신 유사길(4)2020.09.15.
“만우? 만우가 누구요?”
하륜은 고개를 갸웃했다. 만우라 하면 사람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름을 보아하니 양반의 이름이 아니라 양인의 이름이었다. 명 황제가 조선에 고명인장을 해주지 않는 것이 양인 때문이란 소린가?
“그 무슨 소리요?”
답답함에 하륜이 말했지만 유사길의 눈이 커졌다. 어리도 마찬가지였다. 유사길은 마치 귀신을 보는 것처럼 자신의 눈을 비볐다.
“허허허허. 이거 내가 술이 과했나. 하륜 대감. 혹시 대감 눈에도 이자가 눈에 보이시오?”
유사길은 눈을 비비고 또 비비다가 하륜에게 말했다. 하륜은 유사길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 놀랐다. 검은 무복을 입고, 조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 만우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웨, 웬 놈이냐!”
하륜의 고함 소리에 풍악이 뚝하고 끊겼다. 만우는 팔짱을 낀 채 술에 취해 헤롱거리는 유사길과 그 품에 안겨있는 어리를 발견하고는 혀를 끌끌하고 찼다.
“게 누구 없느냐! 밖에 누구 없어!!!!”
하륜이 다급히 바깥에 소리쳤지만 바깥에서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다. 쾅!!! 딸랑, 딸랑 어이쿠우!!! 부서질 것처럼 열린 창호지 문 너머로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와 함께 얼굴이 옥처럼 매끈한 감령과 험악한 인상의 필두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유일한 문으로 달아나려고 했던 이들이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 둘은 맨 손이었는데, 묘하게 후련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우리, 강해. 그렇지?”
“그래. 이제야 조금 느끼겠네. 누구 때문에 우리가 약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감령과 필두는 서로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의 뒤로는 하륜의 하인들과 명나라 사신의 호위병들이 뒤엉켜 쓰러져 있었다.
“패는 재미가 있네.”
“그래서 대장이 맨날 우리를 이걸로 때렸나?”
감령과 필두가 소근거렸다. 하륜의 하인들이나 명나라 사신의 호위는 따로 무기를 뽑지 않아도 맨주먹으로 때려눕힐 수 있었다. 단지 의외라면 명나라 사신의 호위라는 것들이 전부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걸친 게 삐까번쩍해서 한가락 하는 놈들인 줄 알았는데.”
“하인들보다 못 하던데. 그나마 하인들은 힘깨나 쓰는 놈들이 있더구만.”
조선이 들어서면서 호족들이나 양반들은 더 이상 사병을 보유할 수 없었다. 국법으로 사병을 보유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양반들은 자신들의 체면과 품위를 위해 힘깨나 쓰는 하인들을 데리고 다녔다. 호위를 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호위병들보다 나았다.
“당연하지.”
만우가 말하자 감령과 필두가 화들짝 놀랐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만우가 들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사신이 길을 나섰다. 황제의 명을 받은 그 사신이 말이야. 그런데 그 사신을 공격할 간 큰 놈이 있을까. 그랬다가는 구족이 죽을 텐데.”
사신은 황제의 분신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명나라 안에는 황제의 분신을 공격할 간 큰 놈은 없고, 조선에 오면 사신의 안위는 조선이 책임져야 한다. 그러니 호위의 질이 좋을 필요가 없었다.
“이,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
“하륜 대감님! 입을…….”
어리가 하륜에게 경고를 하자 하륜이 입을 다물었다. 하륜은 어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은월루의 루주. 비록 그 신분은 비천하나 임금의 총애를 받는 여인이자 정보조직의 수장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 여자는 저 무뢰한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보는 눈이 많네.”
만우는 얼음장 같이 변해버린 안의 분위기를 슥 둘러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만우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국왕한테 말하고 왔으니까. 괜찮지?”
만우는 어리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그런 취향이었을 줄이야. 의외네?”
“…….”
어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약과 술에 취한 유사길은 만우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하륜 대감이라고 했나?”
만우가 하륜에게 말했다. 하륜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려 보이는 얼굴이지만,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 큰 일이 날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륜은 가진 바 지식과 함께 뛰어난 육감으로 임기응변에 능한 실용의 달인이었다. 그런 그는 자신의 육감을 믿었다.
“그, 그렇다.”
“여기 알아서 수습할 수 있지?”
만우는 조준까지 쳐다봤지만 조준은 바짝 얼어 있어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가장 상석에 있는 하륜이라면 다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은 만우가 손을 까닥였다.
“근데 넌 누구길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쑤욱!
“어, 어헉!”
만우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유사길의 몸이 둥실하고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몸이 만우에게로 날듯이 끌려왔다. 와장창창!!! 유사길에게 많은 공력을 쓸 생각이 없었던 만우는 유사길이 몸으로 거하게 차려져 있던 술상을 쓸고 오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옷자락이 엉망이 된 유사길이 혼이 나간 표정으로 만우 앞까지 끌려왔다.
“대, 대협은 누구…….”
유사길은 풀리려는 눈을 부릅뜨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도찰원에서 일하는 유사길이지만 그는 대단한 정의감을 가진 관료가 아니었다. 도찰원은 본래 고관대작들을 감찰하는 일을 맡은 부서이지만, 상대가 어느 정도의 권력을 쥐고 있느냐에 따라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아는, 지극히 평범한 관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유사길에게 만우는 함부로 대항하면 안 될 위압감을 뿜어내는 상대였다.
“대협? 그 소리가 바로 나오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유사길은 명에서 왔기 때문에 무림에 대해 하륜이나 다른 조선의 관리들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단한 경지에 오른 무인이다!’
손 하나고 바다를 가르고 산을 가르는 기기묘묘한 신선들이 즐비하다고 알려진 곳이 무림이다. 실제로 그는 황궁 무인들을 눈앞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당장 황제의 밀명을 받고 온 언살, 전 금의위장만 해도 대단한 경지에 무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언살도 이 정도의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본주를 죽이라고 보낸 선물들. 잘 받았다?”
어리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부여에서 살풍대와의 혈전이 끝난 뒤, 만우가 그 살풍대의 잔당이라며 부여 객사에서 자객들을 도륙한 일이 있었다. 특별한 특징도 없고, 개중 몇은 혀도 없을 정도로 혹독하게 훈련받은 자객이기 때문에 어리는 조선의 자객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고, 만우는 넘어갔다.
‘그냥 넘어간 게 이상했어!’
유사길이 끌려가면서 그의 품에서 떨어진 어리는 혀를 내둘렀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냥 넘어갈 만우의 성격이 아닌데, 그냥 넘어간다 했다. 알고 보니 누가 보낸 것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 허억!!! 그, 그렇다면…… 그, 그, 대협이 바로…….”
“어. 검주 만우.”
만우의 말을 들은 하륜의 눈이 커졌다. 영락제가 임금의 고명인장을 거부하고 있는 진짜 이유. 그 진짜 이유라면서 유사길의 입에서 나왔던 이름의 주인공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입 다물고 있어야지.’
그 때문에 만우가 양인이란 것을 알게 되었지만 하륜은 신분을 가지고 버럭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명나라 사신이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그냥 보통 양인이 아니라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만우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유사길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황실 참사가 떠오른 탓이다.
“그, 그게 대협. 제 말을…….”
“황제의 선물은 잘 받았다.”
만우는 유사길의 멱살을 쥐고는 끌어올려 눈을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렸다. 유사길은 만우의 살기에 오금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뚝, 뚝. 오금이 풀리면서 같이 고장난 것인지 그의 바지춤이 노랗게 물들었다. 만우는 윽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유사길의 멱살을 풀었다.
“커억…….”
유사길의 멱살을 풀었지만 유사길은 공중에 둥둥 뜬 채 내려오지 않았다. 만우가 공력으로 붙잡아뒀기 때문이다. 만우는 버둥거리는 유사길을 보면서 인상을 썼다.
“황제가 바뀌었다고 했지. 그래서, 이제 와서 그 때의 일을 복수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황실의 수치를 지우기 위해?”
만우는 비릿하게 웃었다. 만우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애초에 전 금의위장이 멀쩡한 상태로 나타난 순간 만우는 명 황실에서 개입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살풍대. 그것도 명 황실에서 눈감아준 것이겠지?”
“그, 그건 아닙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사신 따위가 뭘 안다고.”
살풍대가 조선까지 무사히 온 것도 마교와 황실의 목표가 일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의 망령인 살풍대는 명 황실에서도 주시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중원을 가로질러 조선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황실이 눈감아 주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본주를 아는 것 같으니 본주가 어떤 놈인지도 잘 알고 있겠지.”
황실 참사가 있은 이후 명 황실에서는 만우에 대한 모든 정보를 끌어모았다. 그리고 그 결론은 단 하나였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지.]
만우의 특기가 상대방을 진창으로 끌어내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명 황실은 그렇게 말하며 만우를 무시했다. 그런데 그게 새롭게 황제에 오른 영락제의 눈에 띈 것이다. 황실에 수치를 안겨준 조선의 무인.
“사람을 초청해놓고, 떼거지로 덤볐다가 깨졌으면 반성을 해야지. 복수를 하겠다고 죄 없는 양민들을 학살해?”
유사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멱살이 그대로 잡힌 채 공중에 떠있기 때문에 옷이 기도를 누른 것이다. 그 때 하륜이 나섰다.
“거, 검주 대협!”
하륜은 눈치가 빨랐다. 황실 참사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만우가 생각보다 훨씬 더 거물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대협이라고 부르며 만우의 팔에 매달렸다.
“사, 사신입니다. 대협께서 명나라 군대를 전부 막아주실 것이 아니시라면 여기서…….”
“아이고 나으리.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만우는 여전히 유사길의 멱살을 공력으로 잡아쥔 채로 하륜을 보면서 아까와는 다르게 비꼬듯 말했다.
“주상전하께서 분명 소인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무 심하게만 하지 말라고. 그러면 윤허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어명으로 말이지요.”
“그,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합니다!”
하륜이 만우의 팔에 대롱거리며 매달렸다. 만우는 그런 하륜을 보면서 혀를 쯧하고 찼다. 특이한 양반이었다. 거기에 다 늙은 중늙은이가 매달려 애절하게 말하는 것도 그리 썩 유쾌하진 않았다. 턱 쿵!!!
“커헉, 쿨럭, 쿨럭.”
쿵하고 엉덩이로 땅바닥에 떨어진 유사길이 목을 어루만지면서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정말로 저승 문턱까지 갔다 온 유사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손수 본주가 네 놈의 목을 잘라 명 황제에게 보내고 싶으나.”
“히, 히익!”
유사길이 겁에 잔뜩 질려 벌벌 떨었다.
“여기 계신 나으리가 부탁하셔서 봐주는 줄 알거라.”
“예. 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유사길은 꾸벅거리며 만우 앞에 고개를 숙였다. 만우는 주먹을 어루만졌다.
“이거. 튼튼하지도 않은 놈이니 몇 대 쥐어팼다가는 사경을 헤맬 터이고. 빌어먹을.”
언살을 보내 자신을 죽이려 하고, 살풍대의 통과를 허락케 하여 조선에 피해를 입힌 명나라다. 그 명나라의 대표로 와있는 것이 사신 유사길이다. 그런데 자신의 분노를 풀 수 없다는 것에 만우는 이를 빠득하고 갈았다. 만우는 이렇게 갈 수 없다고 느낀 것인지 손가락을 까닥했다.
“안 되겠다. 그냥 가긴 아쉬워서 못 가겠어.”
만우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까닥해 유사길을 부르고, 하륜에게 말했다.
“나으리. 이리로 오셔서 앉으시지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시던 것 같은데.”
만우의 부리부리한 눈이 유사길을 훑었다. 유사길은 비루먹은 개처럼 만우의 시선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원하는 것 모두 이야기하시지요. 아마 들어줄 겁니다. 제가 보고 있을 테니까요, 나으리.”
만우의 말에 하륜의 눈이 번쩍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하륜은 지극히 실용적인 사람이다.
“얼마든지요.”
털썩. 하륜이 냅다 자리에 앉자 유사길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하륜은 만우를 가리키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야기 하시지요?”
팔짱을 낀 만우가 유사길을 뚫어져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