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명나라 사신 유사길(3)2020.09.12.
“역시 대장님이십니다! 제가 대장으로 모신 분 답습니다! 궁궐을 휘젓고 다니다니!”
강력한 무력 때문에 앞에서는 입을 다물어도 뒤에서는 칼잡이에, 도적이라면서 손가락질을 받았던 감령이다. 거기에 관아에서 나온 병사들 앞에서는 설설 기어야 했기 때문에 애초에 관이나 귀족들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은 감령이었다. 그런데 만우는 그 모든 것을 깨부수듯 홀로 독보하면서 궁궐도 제 집처럼 드나들 정도이니, 감령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닌데?”
임금은 만우가 궁에 찾아온 이유와, 이제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한 듯했다. 명석하기 그지없는 임금이었다. 게다가 임금은 만우만 들을 수 있게 혼잣말을 했다.
“무슨 할 일이 또 있습니까!”
감령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일어섰다. 만우 옆이라면 귀족이나 관아라고 해서 쫄 필요가 없었다. 그건 감령이 원해 마지않던 삶이다.
“조질 놈이 하나 더 있거든.”
“또요?”
필두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만우는 움직이는 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늘 사건사고가 만우를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명의 반의반의반의반도 안 되는 조선에 와서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던가. 심지어 궁궐에서 붙잡혀 전각 안에 삼 개월이나 감금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만우가 일을 벌인다니 덜컥 걱정이 되는 필두였다.
“쫄리시면 뒈지시던가!”
감령이 씩 웃으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감령의 말에 필두가 발끈했다.
“무슨 개소리야!”
“장강 미꾸라지가 언제부터 이렇게 혓바닥이 길었어?”
감령이 두 주먹을 뿌득거렸다. 아다닥하는 소리가 났다.
“그냥 들이받는 거야. 언제부터 산적이나 수적인 우리가 머리를 썼다고. 우린 우리보다 더 무대포인 대장이나 따라가면 되는 거야.”
따악!
“그건 좀 거슬린다?”
“아윽…….”
산적이나 수적보다 더 무대포란 말에 손이 먼저 나간 만우였다. 마치 철퇴에 두드려 맞은 듯한 통증에 감령이 정수리를 부여잡고 몸을 꼬았다.
“너네.”
만우가 의뭉스런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감령과 필두에게 말했다.
“본주가 몸소 잊을 수 없는 경험을 만들어주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애당초 대장님을 따르겠다고 한 몸입니다. 뭐가 두렵겠습니까! 하핫!!”
감령이 잘생긴 얼굴 가득 파안대소를 담아 터뜨렸다. 더 들어보고 싶은 필두지만, 이미 늦었다. 감령이 말한 순간 만우의 얼굴에 더욱 의뭉스런 웃음이 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가자.”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필두가 만우에게 물었다. 만우는 히죽 웃으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모화관.”
***** 명 사신 유사길은 거만한 표정으로 가장 상석에 앉아 나란히 앉은 판의정부사(判議政府事) 조준(趙浚)이 따라주는 술을 잔에 받았다.
“천사(天使)께서는 지내시는 데에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조 대감을 비롯한 조선의 대소신료들께서 이리 연회를 자주 베풀어 주시는데, 불편한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유사길이 짐짓 겸양을 떨면서 말했지만 조준은 유사길이란 자가 얼마나 탐욕스런 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명황제인 영락제가 즉위하여 후방을 안정시키고자 하기 위한 방편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그가 노골적으로 탐욕을 드러내지 않고는 있지만, 그에게 잘 보이고자 줄을 선 대신들이 내민 뇌물을 남김없이 받아먹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고황제(高皇帝) 때에 온 사신들은 전부 질이 낮았는데, 지금 천사께서는 첨도어사(僉都御史)이니, 일국(一國)의 군신(君臣)이 모두 기뻐하고 또 두려워합니다.”
유사길은 4품의 도찰원 첨도어사로 영락제의 등극을 조선에 알리기 위해 홍려시소경 왕태와 내사 온전, 양영과 함께 조선에 왔다.
“헌데, 나를 초대한 하륜 대감께서는 어찌 안 오시오?”
조준은 찔끔했다. 좌정승 하륜은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로 유사길을 비롯한 명 사신들을 모두 연회로 초청한 연회의 주최자였다. 그런데 하륜이 보이지 않으니 유사길이 불쾌함을 드러냈다.
“곧 오실 것이옵니다. 아니, 저기 오셨습니다!”
조준이 때맞춰 모습을 드러낸 하륜을 발견했다. 그러자 유사길이 찡그린 눈으로 하륜을 쳐다봤다. 하륜은 임금의 즉위로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왕권강화를 위해 정치체계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재상의 권한을 축소했다. 실패했다는 소리를 듣지만, 저화(楮貨)를 설치하고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는 등의 다양한 정책을 펼친 임금의 오른팔이다.
“도첨어사. 늦어서 미안하외다. 격무에 시달리는지라.”
“허흠.”
하륜이 먼저 미안하다고 하자 유사길은 화를 내기도 무엇하여 헛기침을 했다. 하륜이 왜 안 오냐고 얼굴을 찌푸린 유사길이지만 하륜은 유사길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물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연배가 유사길보다 많았고, 태조의 국상 때도 조선의 사신으로 명에 오는 등 명 황실에도 아는 인맥이 있어 유사길이 함부로 하기에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거, 우리 도첨어사께서 본인을 오래 기다린 듯하니, 사과의 뜻으로 벌주 세 잔을 마시겠소이다. 후래자삼배주(後來者三杯酒)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하륜이 호탕하게 말하며 거푸 술을 세 잔을 마셨다. 깡마른 체구와는 달리 하륜은 말술이었다. 때문에 다른 대신들이 그와 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꺼려할 정도였다.
“이제 화를 푸시오! 하핫!”
하륜이 계속해서 웃는 낯으로 나오니 더 이상 심통을 부리는 것도 소인배 같아 보일 것이기 때문에 유사길은 이마 사이에 잡힌 주름을 폈다.
“알겠소이다.”
“그럼 한 잔 받으시오!”
하륜이 유사길의 잔에 술을 따르자 풍악이 흘러나오면서 곱게 치장한 기녀들이 나와 춤을 추고,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급속도로 좋아졌다.
“내 첨도어사를 위해 힘들게 데려온 아이가 있소이다!”
하륜이 눈을 찡긋하자 하륜과 유사길, 그리고 조준의 뒤에 있던 문이 위로 올라갔다. 그 안에서 꽃향기가 훅하고 풍겨져 나오자 유사길의 눈썹이 흐물거리며 녹아내렸다.
“한양최고기녀라 불리는 자동선이오!”
“자동선? 예부 주사 육옹이 말한 설마 그 자동선?”
유사길이 눈을 크게 뜨자 하륜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부 주사 육옹이라면 바로 1년 전 조선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 사신을 말한다. 유사길은 그에게서 귀가 따갑게 들은 조선의 기생을 떠올렸다. 육옹이 그리 감탄해마지 않았던 동이의 기녀의 이름이 자동선이었다.
“소녀, 자동선이라 하옵니다, 나리.”
자동선, 아니 어리가 눈을 내리깔고 유사길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리를 본 유사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연경에서도 저리 예쁜 여자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어흠!”
자신이 추태를 부렸다는 것을 자각한 유사길이 헛기침을 했다. 하륜이 그런 어리에게 눈짓을 했다.
“귀중한 손님이시다. 성심을 다해 모시거라.”
“예, 나리. 어르신. 술 한 잔 받으시어요.”
어리가 다가오자 유사길의 코가 벌름거렸다. 코끝을 스치는 이 향기는 흡사 봄에 피는 자괴화(刺槐花) 같았다.
“무슨 향을 쓰는 것이냐? 실로 달콤하도다.”
“소녀가 따라드리는 술이 더 맛있을 걸요?”
어리는 막힘없는 손놀림으로 술을 따랐다. 어리의 미모에 취한 유사길은 어리의 손에서 잔으로 떨어지는 가루를 보지 못 했다. 그것은 기녀들의 아양과 교태에 정신을 못 차리는 유사길 외의 다른 사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사길은 어리만을 빤히 쳐다보며 술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어리가 슬쩍 탄 가루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마셔라!”
“풍악을 울려라!!!”
유사길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 하게 하륜이 악공들을 다그쳤다. 그러자 뚱땅거리는 풍악 소리가 커졌다. 유사길과 사신 일행들은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기생들의 몸을 주물렀다.
“흐, 흐…….”
유사길이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 말술인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술이 빨리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옆에서 어리가 아양을 떨 때마다 자괴화 향이 유사길을 더욱더 몽롱하게 만들었다.
“술이 단 것인지, 분위기가 단 것인지 모르겠구나. 으하하하!”
유사길이 거친 손으로 어리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때 하륜이 유사길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넌지시 말했다.
“그래. 이번에 가시면 영락제께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내려주십사하고 이야기 좀 해주시오. 이미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지 2년이나 지나지 않았소이까.”
“흐…… 고명 인장. 그래. 하륜 대감께서 그것을 원하여 이 유 모에게 이런 연회를 베풀어주신 것이오?”
유사길이 반쯤 풀린 눈으로 히죽거리며 웃었다. 고명과 상국을 자처하는 명나라가 주변 속국들의 국왕을 인정한다는 칙서이고 인장은 명나라 황제가 내리는 일종의 도장을 말한다. 그것을 받아야만 명 황실로부터 인증을 받은 정통성 있는 국왕이 되는 것이다.
“헌데 쉽지 않은 일이오!”
“어째서 말이오?”
하륜은 몸이 달은 표정을 지었다. 영락제는 계속해서 조선의 국왕에게 고명과 인장을 내려주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으시지 않소이까. 패륜에 천륜.”
“…….”
하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패륜과 천륜은 국왕을 비롯하여 하륜 등의 공신들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국왕의 허물 중 하나다. 두 번 왕자의 난.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기까지 한 현재 국왕은 두 번의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의 피를 보고 왕위에 올랐다. 그 충격으로 상왕은 한양을 떠났다. 옥새도 현재 국왕에게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친모가 아니라고는 하나 현비 강씨의 문제도 있거니와.”
“그건 전부 음모에 지나지 않소이다. 그 예로…….”
하륜은 유사길에게 말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 문제가 나오면 조선의 대소신료들은 할 말이 없었다.
“상왕께서 환도하신다고 하셨소이다. 오시고 계시오.”
“……정녕 그렇단 말이오?”
영락제는 자신이 혁명을 일으켜 왕위에 앉았다. 그렇기 때문에 집권 초기에 후방의 소란스러워지지 않기를 바랐다. 명 주변의 국가 중 가장 날카로운 칼을 숨기고 있는 것은 단달이나 북방의 오랑캐들이 아니었다. 군자국(君子國) 조선. 그 땅의 크기는 비할 바 없을 정도로 작으나 백성들이 옹골차고 날래고 용맹한 장수들이 많아 원의 강대한 기마로 구성이 된 대군으로부터 끈질기게 살아남은 국가. 그들은 그 끈질김만큼이나 가진 바 저력이 대단해 얼마든지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댈 수 있었다. 거기에 영락제의 통치에 역심을 품은 이들과 조선이 결탁하기라도 한다면? 나라를 궁핍하게 만들, 한없는 내전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영락제는 조선과 친교를 유지하면서도, 고명과 인장을 내려주지 않음으로써 조선을 조련하려 했다.
“허나 그리한다 하더라도 황제폐하께서는 윤허하지 않으실 것이외다.”
유사길의 눈은 풀려 있었다. 그의 혀는 아직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지만 하륜은 풀린 유사길의 눈을 보면서 눈을 빛냈다. 찡긋. 하륜은 유사길이 볼 수 없게 어리에게 눈짓을 했다. 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의 품에서 작은 침이 빠져나왔다. 톡.
어리는 부드럽게 손을 움직여 유사길의 어깨 부근, 견정혈(肩貞穴)에 침을 놓았다. 치명적인 사혈(死穴)이 아니라 사람의 긴장을 이완해주는데 지대한 효과를 발휘하는 혈자리였다.
“혹시 영락제께서 마음에 들지 않으신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오?”
“딸꾹.”
유사길은 술이 불쑥 올라오자 입을 막고 딸국질을 했다. 머리가 어질거리지만 어깨에 뭉쳐있던 피로가 쫙 풀리는 것이 저절로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어, 이게 약주요? 하하핫.”
유사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신통하다는 눈으로 술을 쳐다봤다. 술을 마셨을 뿐인데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라니.
“마음에 드시면 이 하 모가 첨도어사께서 마음껏 드실 수 있게 보내겠소이다. 그러니 대답해 주시오. 이거 마음이 급해서 그러오.”
하륜이 엄살을 부리며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때 유사길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렇소. 천륜과 패륜? 솔직히 말해 황상께서 그런 말을 하실 처지이시오?”
유사길의 말에 하륜이 흠칫 놀라 눈을 굴렸다.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왕도 욕한다곤 하지만 상대가 무려 황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이 풍악 소리로 시끄럽고, 다른 사신들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킬킬. 담이 작소이다. 담이.”
“이 하 모는 평생을 서책만 붙잡고 살아온 터라 첨도어사의 담력을 따라갈 수가 없소이다. 과연 호걸이시오!”
하륜은 웃으면서 술잔을 따랐지만 머릿속에 복잡했다.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어찌하여.’
“궁금하오. 말해주시오!”
“좋소! 이런 술까지 대접을 받았으니 이 유 모, 입을 그냥 닦을 수는 없지.”
유사길이 씩 웃었다. 유사길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때문이오.”
“응? 못 들었소이다.”
하륜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어리는 아니었다. 어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명 사신의 입에서 그 사람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만우 때문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