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명나라 사신 유사길(2)2020.09.08.
“그대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올. 웬일로 이런 기특한 일을?”
만우는 이전과는 다르게 광화문 앞에서부터 극진한 안내를 받으며 근정전까지 들어왔다. 이번에는 밤이 아니라 대낮에 들어온 것이었는데, 그 덕분에 만우는 궁을 지키는 궁궐수비대와 내시, 시녀들의 궁금증에 가득 찬 시선을 받으며 임금과 얼굴을 마주했다.
“기특이라. 참으로 오래 들어보는 말이로다.”
임금은 만우를 보면서 수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임금의 뒤에 선 상선의 눈이 퉁방울만 하게 커져있었다. 임금 앞에서 저처럼 무도하게 말하는 자를 처음 봤기 때문이다.
“이제 본주를 숨기지 않을 생각인가 보지?”
임금은 금정전의 옥좌에 앉아 만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만우는 그 정도는 넘어가주기로 했다. 똥개도 자기 집 앞 마당에서는 짖는 소리가 커진다고 했으니까.
“조선의 지존인 과인이 누군가에게 숨길 일은 없다.”
임금은 광오하게 말했다. 하지만 안변에서 일어난 조사의의 난을 거의 완벽하게 진압하고, 상왕의 거가까지 한양으로 돌린 임금은 반군을 찍어누른 압도적인 힘과 함께 명분까지 완벽하게 손에 쥐었다. 임금의 힘이 가장 융성할 때인 것이다.
“그래. 그렇다 치자고.”
하지만 임금의 성세가 아무리 커봤자 만우 앞에서는 그냥 파리 날갯짓 정도에 불과했다. 임금이 가진 그 어느 것도 만우에게 압박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여에서 고초가 많았다 들었다.”
“내가 아니라 동군영. 그놈이 그런 거지.”
예상대로 임금은 부여에서 일어난 일을 전부 알고 있었다. 임금은 만우를 쳐다봤다.
“과인이 중원에서 온 정의대라는 이들에게 제부투혼의 회수를 명했다. 헌데 실패했다 하더군. 그대 때문에.”
“국왕.”
만우의 입이 열렸다. 그 순간 대전의 온도가 영하로 떨어진 것처럼 싸늘해졌다. 만우의 목소리가 무미건조해진 것이다. 그에 놀란 감령과 필두가 황급히 내공을 일으켰다.
“전하.”
콰아아!! 동시에 임금 뒤에 서있던 권희달이 공력을 끌어올려 만우의 몸에서 흘러나온 한기, 아니 살기를 막아냈다.
“본주에게 물어볼 그대의 말이 그게 전부인가?”
권희달의 실력이 부쩍 늘어있엇다. 한 시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동시에 대전을 둘러싸고 있는 왕을 호위하는 최정예 4인인 겸사복의 무인들의 기세가 강해졌다.
“그대가 임명한 어사의 고향이 쑥대밭이 되었다. 그대의 조선이 허무하게 뚫린 탓에 망해 버린 고을과 죽은 백성이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대의 군대가 무능한 탓에 본주가 직접 나서 놈들을 벌해야 했다.”
만우는 임금의 탐욕에 분노했다. 이 상황에서 임금은 제부투혼을 먼저 입에 올리며 그에 대한 탐욕을 드러냈다.
“나, 검주 만우가 조선의 국왕에게 묻는다.”
만우의 머리카락이 거꾸로 솟기 시작했다. 동시에 만우의 옷자락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불지않는 대전 안이었지만 만우가 발출한 공력이 용권풍처럼 몸을 휘감고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국경을 외적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조선 군대의 정점이자 백성들을 지켜야 할 백성들의 어버이인 국왕. 너는 정녕 네가 해야 할 일을 하였는가?”
쿠직! 권희달의 발이 움푹 파였다. 임금 앞을 막고 선 권희달을 만우가 기세로 짓누른 것이다. 만우의 기세가 임금을 향하고 있음에도 그 여파로 감령과 필두는 절반 이상의 공력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해야만 했다.
“겸사복!!!”
콰당!!! 파바밧!!! 권희달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느낀 것인지 겸사복들을 모두 호출했다. 본래 임금의 호위는 권희달 혼자서 하거나, 겸사복에 속한 네 명의 무인들이 2인 1조로 번갈아가며 초근접 경호를 선다. 그런 그들을 모두 호출한 것은 권희달이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저 망할 놈의 괴물은 단 한 번도 무사히 넘어가는 법이 없구나.’
권희달은 이를 뿌득 갈았다. 만우가 한 번씩 궁에 올 때마다 매번 사달이 났다. 아예 임금의 거처인 강녕전이 반파된 적도 있었다.
“말하라.”
“크흑!”
권희달의 다리가 발목까지 처박혔다. 그 때 임금이 짧고 굵게 소리쳤다.
“과인은 조선의 임금이다!”
“그래서!”
권희달이 앞에서 막아주고 있다고 하지만 임금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얼음장 같은 가면을 뒤집어 쓴 채 만우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조선의 임금은!!!!”
임금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대전을 가득 메웠다.
“사사로운 감정보다, 사사로운 과인의 신하의 안위보다!”
임금에게서 제왕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만우가 일으킨 절대고수의 기운과는 다르지만, 임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만우를 흔들었다.
“이 국가, 이 나라의 이익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느니라.”
“이익.”
“그렇다! 그대 말처럼 나는 군주로써 할 일을 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과인이 군주가 아닌가? 이번 일로 조선이 부강해진다면, 과연 어떤 것이 더 옳은 것인가!”
임금의 말은 궤변이었다. 하지만 근거 있는 궤변이었다. 위정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달라지는 것이 세력이고 국가다.
“무공. 이번 일로 과인은 무공이란 것에 대한 필요성을 통감하였다. 무공을 익힌 군사들이 있다면 그렇게 무력하게 백 기의 기마대에 이 국토가 뚫렸을까?”
“…….”
“이번 일로 과인의 군사들에게 더욱 수비를 굳건히 하고 경계에 힘쓸 것임을 강조할 수 있었다. 또한 많은 장수들과 군졸들이 이번 일에 분개하여 힘써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
“그럼 이번에는 검주 그대에게 과인이 묻는다. 이번 일로 미래에 일어날 큰 희생을 막아냈다면, 그리하여 나라가 부강해진다면 과인의 선택이 그른 것인가?”
“빌어먹을. 이래서 먹물 먹은 놈들이 난 싫어.”
화아악!!! 만우가 기운을 가라앉혔다. 임금에게 따진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이 없던 일이 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임금은 왕좌 위에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앉아 만우를 내려다봤다.
“국왕. 네 말이 틀리지 않듯, 본주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허니 그대의 무능으로 죽어나간 백성들에게 사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임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권희달은 자신과 겸사복들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지자 이마에 맺힌 식은 땀을 닦아냈다.
‘따라잡을 수가 없구나. 대체 저자의 무공은 어디에 닿아 있단 말인가.’
같은 화경이라고 해서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화경이라도, 그 안의 고하는 검을 막 잡은 이와 검에 능숙한 검객의 차이보다도 훨씬 더 거대하고 컸다. 같은 화경임에도 권희달은 만우의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잊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이 조선을 우습게 본 이들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거든 백 배, 천 배로 갚을 것이다.”
“그리고 제부투혼은.”
만우의 눈이 가라앉았다.
“조선의 것이 아니라 본주의 것이다. 본주가 찾아낸 것이니. 조선은 조선의 방식을 찾아 부강해져야 한다. 무림의 방식이 아니라.”
“과인이 욕심을 부렸다 생각하는가?”
만우가 궁에 온 것은 제부투혼을 자신이 가졌음을 임금에게 통보하기 위함이었다. 만우는 산발이 된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임금을 돌아보았다.
“욕심? 강함을 탐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군주의 도리가 아닐 터.”
평화는 강력한 무력에 의해서만 나온다. 무림인인 만우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것은 패도(覇道)의 길을 걷고 있는 임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무공에 눈을 돌린 것이고.
“허나 무공은 아니다. 그대는 조선을 무림으로 만들려 하는 것인가?”
무림은 강자존과 약육강식이 판을 치는 곳이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천형적인 구조를 타고 난 것이 바로 무공이고 무림이다. 피와 죽음을 통해서만 강해지고, 단단해지는 것이 무공이기 때문이다. 그런 무림에서 약자는 필요 없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약자는 도태되고, 약자를 잡아 먹은 강자는 더욱 강해진다.
“국가가 약해서 도태된 이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이 국가인가?”
“…….”
“약하다고 하여 정녕 그 약자가 국가에 기여할 바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대, 국왕은 어떠한가.”
만우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 몸을 돌렸다.
“그대보다 검을 잘 쓰는 이는 그대 옆에 있는 운검이다. 그렇다면, 운검이 국왕이 되어야 하는가? 국왕의 덕목이 강함 뿐인가?”
스팟! 만우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졌다. 임금은 만우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면서 만우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었다.
“국가를 무림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도태된 약자를 보살피는 것은 국가이며, 약자라고 해서 국가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
임금은 고개를 돌려 권희달을 쳐다봤다. 권희달은 만우의 기세에 노출이 되어 기혈이 막힌 겸사복들의 기혈을 두드려 뚫어주고 있었다.
“전하. 하명하신다면 금군을 동원하여…….”
“멋진 말이지 않는가?”
“예?”
권희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임금이 난데없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검주의 저 말. 참으로 울림이 있는 말이지 않느냐, 이 말이다.”
“…….”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 그의 말이 맞다. 과인의 방식이 잘못 되었어.”
천 년이 지속될 이 조선이란 국가를 부강하고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기본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은 무공이란 편법을 이용해 군사력만을 강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국가의 강함은, 단순히 군사력만을 놓고 말할 수 없는 법이다. 군사력이 강한 나라만이 강국이라면, 저 먼 중원은 그리도 많은 내전을 거치지 말았어야 한다.
“소장은 무식하여 전하께서 왜 그리 감격스러워 하시는 지는 모르겠으나.”
권희달은 창백한 안색으로 비틀거리는 겸사복의 무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한 가지는 확실하옵니다.”
“무엇이 말인가?”
“검주 만우. 저자가 천하의 무례한 자라는 것을 말입니다.”
권희달은 만우의 힘을 간접적으로 느꼈으면서도 그에게 투지를 드러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의 기개가 마음에 들어 흡족해진 임금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맞다. 그자는 무례한 자다. 허나 과인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니, 느낀 바가 적지 않다. 상선! 상선은 들라!”
임금의 호출에 상선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허리를 조아리는 상선에게 임금이 말했다.
“명에서 온 정의대주 겸 어사 검인에게 하명하여 그의 어사직을 회수하고, 죄를 묻지 않겠다 전하라. 또한 비단 열 다섯 필과 은병 백 개를 하사하여 그들의 노고를 달래주어라.”
“예! 전하!”
“또한!”
임금은 만우를 떠올렸다. 피도 눈물도 없는 무뢰한이라고 생각했던 만우가 동군영에게 마음을 쓰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특한고로.”
만우는 휘두르는 자까지도 다치게 할 만큼 위험한 명검(名劍)이다. 하지만 그 검이란 것을 꼭 자신의 손으로만 쥐고 휘두를 필요는 없다. 그런 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적떼가 오지 않게 만들수도 있고, 내가 휘두르는 것이 위험하면 나보다 더 검을 잘 쓰는 이에게 그 명검을 맡기면 된다. 그런데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한 그 명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춘추관 기사관 겸 어사 동군영의 익주본가에 일어난 참사에 과인 역시 심히 유감하는 바, 그를 위무하는 차원에서 동군영의 부(父) 동만익을 정4품,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추증한다.”
“명을 받드옵니다!”
다른 대신들이 있었다면 화들짝 놀라 임금을 만류하였을지 모른다. 본래 추증(追贈)이라 하면 죽은 이에게 관직을 내려주는 것으로, 동군영보다 높은 품계를 내려줄 수 없었다. 그런데 정육품 기사관인 동군영보다 높은 정사품 봉정대부를 받는 경우는 단 하나, 죽은 이가 공신일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한 마디로 임금은 동만익을 공신 대우를 하겠다고 선포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다름 아닌 두문동의 참사를 겪고 살아남아 현재의 국왕과 왕조를 고려의 후신이라고 믿지 않는 동만익에게 관직을 추증한 것이다.
“또한 이번 일로 피해를 입은 고을과 부여현, 익주에 향후 삼 년간 조세를 현재의 오할로 줄이고 관아에 어명을 내려 구휼미를 불출토록 하라.”
“명을 받드옵니다 전하!”
상선이 뛰어나갔다. 교지를 작성하고, 내려보내기 위해 도승지를 찾아가기 위함일 것이다. 임금은 만우가 감령, 필두를 데리고 나간 곳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듣고 있다면, 적당히 하시게. 그래도 명의 사신이니 적당히.”
*****
“흥.”
만우는 근정전(勤政殿) 지붕에 올라 팔짱을 끼고 있다가 코웃음을 쳤다. 감령과 필두는 만우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대장님. 그런데 정말 괜찮습니까? 그래도 한 나라의 국왕인데…….”
필두가 걱정된다는 듯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한 나라의 국왕인데, 궁에서 이 난리를 치면 아무래도 저희를 보는 시선이…….”
“시선이?”
“음. 아닙니다.”
필두는 고개를 숙였다. 만우는 그런 필두를 보다가 피식하고 웃었다. 덩치와는 다르게 걱정이 많고 섬세한 필두였다.
“저기 보여?”
만우는 손을 들어 보수 공사가 한창인 곳을 가리켰다. 바로 강녕전이었다.
“왕의 침소지. 저게 왜 부서졌을까?”
만우가 한번 부쉈던 강녕전은 급히 보수공사를 통해 복원이 되긴 했다. 하지만 공을 들어 지어야 할 왕의 침소가 급히 한 복원으로 완벽할리 없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보수 공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설마.”
“그래. 한 번이 아니라는거지.”
“……무각에 갇혔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는데.”
필두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하지만 감령은 짜릿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딸랑! 금방울이 감령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면서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감령은 하하핫하고 대소를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