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명나라 사신 유사길(1)2020.09.05.
[만우. 자네는 먼저 올라가시게. 다행히 작은 아버님께서 건재하시니 다시 가솔들이 터전을 잡을 수 있을 때까지 여기서 돕겠네. 달포 뒤에 따라가겠네.]
동군영은 만우를 손사래를 치며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만우는 그런 동군영이 떠미는 힘에 버티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동군영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이 들었던가.’
만우는 자신의 마음이 불편한 이유가, 저 동군영의 눈물 때문이란 것을 눈치채고는 쓰게 웃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 소심하고 겁 많은, 양반한테 정이 듬뿍 들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아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내 손으로, 다른 이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아버지께서 세우신 터전의 기초를 다지고 싶네.]
만우는 그런 동군영에게 호선이나 슌스케라도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동군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문에 만우는 동군영을 그의 본가가 있는 익주까지만 데려다 준 뒤 천천히 한양을 향해 북상했다.
[어쩌면 저자는 달포가 지나도 올라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마음이 꺾인 이는 쉽게 일어서기 힘드니까.]
살풍대가 조선의 국토를 유린했다는 것은 이제 동군영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됐다는 것, 그 사실은 아무리 나이를 먹을만큼 성인에게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만우는 소서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러면서 잘 닦인 관도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미친듯이 달려내려가던 때와는 달리 여유로운 여행길이었다. 설운은 뒤늦게 도착한 우림위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한양으로 향했다. 임금에게 과정에 대해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만우는 달포에 걸쳐 한양에 도착했다. 웅장한 숭례문이 만우와 만우 일행, 그리고 정의대의 고수들을 반겼다. 어리와 광문자 역시 그들과 함께 동행했다.
“은월루주. 그리고 너.”
만우는 숭례문이 보이는 곳까지 도착하자 어리와 광문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리와 만우를 쳐다봤다.
“가서 찾아.”
“무엇을…….”
“마교. 사라진 투귀대 놈들. 그리고 살풍대 놈들이 이 조선에 들어와 죽이지 않고 만난 후 살려보낸 놈들 모두.”
“…….”
“하오문! 너희도 마찬가지다.”
은월루와 하오문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오문은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오고 있었다. 제부투혼 대신 만우에게 직접 무공을 사사받기로 한 하오문은 기를 쓰고 만우를 쫓아왔다.
“예, 호법. 그 어떤 것이든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겠습니다.”
무화 임수미가 모습을 드러내며 고개를 숙였다. 만우는 그런 임수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거처로 찾아와라. 너 혼자.”
“예. 예??”
임수미의 눈이 커졌다. 오해의 소지가 많은 말에 주변에서 헉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왜, 왜! 저 여자를 왜!”
“오라버니! 저런 여자가 오라버니의 취향…….”
“저도 가면 안 됩니까?”
방매와 소령, 척사영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만우는 한심하단 표정으로 그 셋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려 임수미를 쳐다봤다.
“설마, 너도 저딴 착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임수미가 말을 살짝 더듬었지만 그녀의 표정 관리는 수준급이다. 금세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돌아간 그녀가 만우에게 말했다.
“무공의 전수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아.”
“크흠.”
“그, 그렇다면 그렇다고 이야기를 해야지!”
방매만이 괜히 민망하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만우는 세 여자를 보면서 혀를 쯧하고 찼다.
“어. 약조를 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만우는 기천을 익힐 때를 떠올렸다. 만우는 별다른 스승 없이 기천을 익혔다. 기천의 계승자라고 부를 만한 이가 명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수련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이 보면 기함할 정도로 기괴한 것뿐이었다. 고행(苦行). 기천은 다른 여타의 무공들과는 다르게 도를 닦는 도교나 참선을 하는 불교의 그것처럼 깨달음을 위한 육체의 고행(苦行)을 전제로 했다. 그냥 육체를 단련하기 위해 훈련을 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것을 떠올린 만우는 히죽 웃었다.
“쉽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어. 포기하겠다고 하면 그걸로 끝이다. 괜찮겠어?”
임수미는 할 수 있겠냐는 눈으로 보는 만우를 보면서 발끈했지만 스스로를 다스렸다. 저런 만우의 말에 휘둘리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끌려가게 된다.
“좋은 스승이 계시니 알아서 잘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스승? 내가?”
만우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뭐, 못 버티는 건 무화, 네 참을성에 달린 거니까. 하오문의 숙원을 떠올린다면 알아서 잘 버티겠지.”
만우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걸 버틴 것인지 지금 생각하면 어깨가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강제로 시키는 스승도 없이 어렸던 만우는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라면 모든 이들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그 과정을 묵묵히 버텼다. 머슴인 자신에게 이런 은혜를 내려준 김약항에게 보답을 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말이다.
‘독한 놈이었네. 어린 나도.’
만우는 피식 웃었다. 그게 불과 십 년 전이었다. 십 년 만에 기천을 익힌 만우는 기천의 최고 경지에 다다르지 않았음에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럼 난.”
만우는 비릿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떠나기 전에 해야 할 것을 잊지 않았다.
“호선. 슌스케. 향이 지켜.”
“예.”
“알았어요.”
호선과 슌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팔 검객이 되었던 슌스케는 살풍대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이후로 말수가 적어졌다. 동시에 매일 저녁마다 만우에게 훈련을 받을 때마다 죽을 힘을 다해 외팔이라는 약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우에게 달려들었다. 그 결과 슌스케는 두 팔이 다 있을 때의 무위를 7할 이상 회복했다. 하지만 살풍대와의 전쟁이 자신이 약함을 돌아보게 한 것인지 그는 스스로 입을 다물고 진중해졌다. 슌스케의 기세가 점점 한 자루의 날카로운 칼이 되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만우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오면, 베기를 가르쳐 주마.”
만우가 슌스케에게 시킨 것은 하체를 단련하는 것과 호흡을 이용해 폭발적으로 힘을 끌어올리는 것, 그리고 그 힘으로 하는 찌르기 하나였다. 놀랍게도 슌스케는 찌르기 하나로 양팔을 쓸 수 있을 때의 무위를 7할 가량 회복한 것이다. 만우의 말에 슌스케의 눈이 커졌다. 만우는 김향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신이룡검을 넘겼다.
“어디 가세요?”
김향은 한 달 동안 만우와 함께 동행하면서 만우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만우는 김향에게 친절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매정하지도 않았다. 만우는 어떻게 말을 해야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무뚝뚝했지만 김향은 그런 만우가 묘하게 편했다. 자신의 과거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먼 한양부터 부여까지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고 싶은 할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을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양반 나리. 양반 나리의 복수를 해주기 위해서.”
“복수요?”
“그래.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어.”
“음…… 복수는 싫지만…… 제가 아니니까요.”
김향은 폐허가 되어 터만 남은 본가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던 동군영을 떠올렸다. 자신처럼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동군영이다. 자신과는 다르게 어른이고, 남자였지만 김향은 동군영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 그러니 김향. 넌…… 강해져라.”
“네.”
김향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강했더라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삶이 휘둘리지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녀가 강했더라면, 가족들을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드니 김향은 나중에 생길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일은 내 손으로.’
검주 만우가 그녀의 뒷배로 있었지만 김향은 그에게 기댈 생각이 없었다. 되도록이면 동등한 관계에서 그와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할아버지와 부모님에 대해서.
[그런 동기야 말로 수련을 하는 무인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법이지. 좋은 마음 가짐이다.]
신이룡검 안에서 소서노의 목소리가 김향의 귓가에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이룡검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감령! 필두!”
“예, 대장님.”
“부르셨습니까!”
모두에게 할 일을 내려준 만우가 마지막으로 감령과 필두를 불렀다. 둘이 튀어나와 만우를 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만우는 그런 둘을 보면서 씩 웃어 보였다.
“너희 둘. 조선의 왕이 사는 궁궐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예. 예?”
“아니, 저희는 별로…….”
감령과 필두가 멈칫했다. 관이라면 가장 껄끄러운 것이 이 둘이다. 산적왕과 수적왕이 궁이나 관 같은 곳을 달가워할 리 없다. 하지만 만우는 그들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럼 가자.”
감령과 필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무식한 둘이라고 해도 만우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아는 한, 궁궐은 옆집 들어가듯 그렇게 간단히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가자. 가자!”
만우가 감령과 필두를 끌고 멀어져갔다. 그런 만우를 쳐다보던 검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대주. 근심이 많으신 것 같소이다. 아미타불.”
소여래(笑如來) 일홍의 목소리에 검인이 뒤를 돌아봤다. 15명에서 11명으로 줄은 정의대에는 어느 순간부턴가 웃음이 사라졌다. 중원이 아닌 조선에서 이렇게 많은 동료들을 잃을 것이라고 예상도 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실력에 대한 회의감과 무력감이 든 것이다. 물론 팽대수나 검인, 일홍 같은 심지가 단단한 이들은 패배감에 젖지 않았다. 하지만 명문정파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심지가 굳건한 것은 아니다.
“근심이 많을 수밖에. 임금께서 부탁하신 일을 완수하지 못했지 않소이까.”
“허나 맹의 명령은 완수한 것이외다. 아미타불.”
일홍의 말이 맞았다. 맹에서는 제부투혼이 하오문에 의해 중원에 넘어와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제부투혼이 하오문이 아니라 김향이란 소녀의 손에 떨어졌고, 그녀의 뒤에는 검주 만우가 버티고 있으니 그 누구도 함부로 제부투혼을 탐낼 수 없었다. 맹에서 원하는 아주 이상적인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만 조선의 임금에게서 받은 명도 명이다. 그런 임금의 호의 때문에 임시직이기는 하지만 관직까지 제수받았다. 신의를 중요시하는 검인에게는 마뜩치 않은 결과였다.
“조선의 임금께는 사죄드리고, 대주께서는 어서 맹으로 복귀하여 마교의 준동에 대해 알리는 것이 우선이외다. 그것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하오. 아미타불.”
일홍은 합장을 하며 불호를 외웠다. 검인은 인상을 썼지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홍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살풍대와 겨뤄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리고 맹으로 돌아가 마교의 준동에 대해 알리고, 이를 중원 전체에 알려 마교를 강력하게 규탄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조선의 백성, 그리고 동군영을 위한 일일 것이다.
“조선의 일은 검주, 만 대협에게 맡기시오.”
일홍은 그렇게 말하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검인은 불편한 표정으로 만우가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