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 마교가 마교했네(4) (175/400)

175. 마교가 마교했네(4)2020.09.01.

그런 죽음의 고비에서 간신히 살아나게 되면 최소한 며칠은 그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이 고비를 넘기게 되면 다들 한층 더 단단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무림맹의 정의대란 자부심이 있던 그들의 자존심이 산산조각 깨져나갔기 때문이다. 중원에서는 구파일방에 오대세가란 커다란 배경을 두고, 절정이란 적당히 높은 경지에 취해 높이 치솟았던 그들의 콧대가 호된 경험으로 꺾인 것이다. 검인이나 팽대수처럼 경지에 올랐어도 치열한 수련을 거르지 않았던 이들과 적절히 절정이란 경지에 안주하였던 정의대 고수들은 차이가 꽤나 컸다. 그 차이가 낭황을 비롯한 살풍대와 맞서면서 도드라지게 드러났을 뿐이다.

16553232587723.png‘역경을 딛고 일어나야 강해지는 법이니까.’

만우는 정의대 고수들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16553232587723.png“뭐, 어쨌든 돌아왔으니까....”

만우가 히죽 웃어 보였다. 감령과 필두가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기 싫었던 만우의 저 웃음이었다. 음흉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가 살풍대와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감령과 필두는 다시 한번 자신들의 결정에 확신했다.

16553232587734.png‘뻘 짓을 하지 않은 다음에야 두 다리 뻗고 자는 걸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1655323258774.png‘잘한 결정일 거야. 아마.’

뱀의 머리로 사느니 용의 꼬리가 되겠다. 항상 목숨을 반쯤 산과 물에 걸치고 피 말리면서 살아가느니 만우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나았다. 그게 더 빠르게 강해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16553232587723.png“말 잘 들어. 알았지?”

16553232587734.png“예, 대장님.”

1655323258774.png“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만우도 같이 생활한 감령과 필두가 편했기 때문에 그들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문형일과 마익후가 더 옆을 떠나 허전하기도 하고, 불편했던 만우다. 슌스케만 시켜먹기에는 뭔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감령과 필두는 문형일과 마익후만 부르던 ‘대장’을 이제 자신들도 부를 수 있어 만족한 표정이었다.

16553232587723.png“흐음.”

만우는 쉬겠다면서 있던 사람들을 다 내쫓은 후 객사 안에 옆방과 이어진 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곳에 김향의 방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웅-!!! 김향은 그 안에서 만우의 이룡검을 꼭 끌어안고 소서노의 영체와 비슷한 녹색 기운에 휩싸여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소서노가 연자에게 기초를 전수해야 한다면서 하도 난리를 쳐서 김향에게 이룡검을 건네주니 곧바로 저 상태에 빠진 것이다.

16553232587723.png“내공과 비슷한 것 같긴 한데.”

만우는 그런 김향의 몸을 휘감고 있는 녹색 기운을 보면서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내공과 비슷해 보이지만 미묘하게 달라 함부로 간섭할 수가 없었다. 소서노가 말하는 백제, 신라, 고구려라면 오백 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때 어떠한 무공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만우는 호기심이 무럭무럭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16553232587723.png“저놈은 진짜로 쇠를 처먹고.”

만우는 이룡검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불가사리가 괜히 쇠를 먹는 성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었다. 불가사리는 낭황의 낭아검과 살풍대의 화살촉, 창극 같은 쇠를 모조리 먹어치웠다. 말 그대로 ‘먹어’치웠다. 이룡검을 쇠에 가져다 대니 이룡검이 쩍 벌어지면서 쇠들을 집어삼키고는 우득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기 때문이다. 만우는 혹시나 자신이 김향을 방해할까 싶어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그렇게 문을 닫은 만우가 침상으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조선에서 내려온 귀빈을 대접하기 위한 객사의 방이 만우의 몫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방 안에는 공간이 남았다. 침상 앞으로 발이 드리워져 있고, 그 너머로 다도를 즐길 수 있는 탁자 같은 것이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엔 웬 남자가 앉아 있었다.

16553232587723.png“언살이라고 했나?”

하지만 만우도, 그 남자도 서로 놀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우는 처음부터 그 남자, 언살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고 남자도 놀라지 않았다.

16553232617529.jpg“그래.”

만우가 조선말로 말했지만 언살은 한어(漢語)로 대답했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53232587723.png“명에서 왔군.”

16553232617529.jpg“그렇다.”

만우의 말이 자연스럽게 한어로 바뀌었다. 언살은 만우를 향한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만우는 살갗을 콕콕 찌르는 언살의 살기를 느끼면서 혀를 쯧하고 찼다.

16553232587723.png“옆방에 애 있다. 애 있는데 조심 좀 하지?”

콰아-!!!

16553232617529.jpg“큭!”

언살의 입에서 단말마의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만우가 눈가를 꿈틀거리자 언살 주변의 공간이 자신을 우그러뜨릴 것처럼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언살은 분하다는 듯 살기를 갈무리하며 만우를 노려봤다. 그 눈에 여전히 시퍼런 살기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만우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16553232587723.png“노골적인 살기라. 시비 걸러 온 것인가?”

16553232617529.jpg“난 명 황실에서 나왔다.”

16553232587723.png“……명 황실?”

16553232617529.jpg“내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명 황실에서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만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평민 위의 귀족, 귀족 위의 왕족, 왕족 위의 황제라는 말 그대로 명 황제는 지독히도 이기적이었다. 만우 자신을 불러놓고 마치 여흥을 돋우는 무녀의 검무처럼 검을 휘둘러 보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가 나서 황제의 친위대를 모조리 쓸어버렸다.

16553232587723.png“아. 맞다. 그중 안 죽은 놈이 하나 있었는데?”

동창과 금의위 중 살아남은 이가 딱 하나 있었다. 만우는 그제야 언살을 보면서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짝하고 내리쳤다.

16553232587723.png“너가 걔구나?”

16553232617529.jpg“걔…… 이 새끼.”

언살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금의위장이었던 자신을 장난감처럼 날려보내 놓고 까맣게 잊었다는 것이 절로 분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은 이후 언살은 모든 꿈을 버려야만 했다. 적을 막아내지 못한 금의위장이 황제 옆에 있는 것을 두고 볼 정적들이 아니었다.

16553232587723.png“어. 그런데 왜 멀쩡하냐. 내가 다른 데를 잘못 잘랐나?”

만우가 너스레를 떨었다. 언살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지만 그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만우의 너스레 사이에 슬핏 드러나는 살기 때문이다. 경거망동 했다가는 성치 않을 것이라는 은밀하고도 분명한 경고. 언살의 등 뒤가 땀으로 축축해졌다.

16553232617529.jpg‘망할. 괴물 새끼.’

만우는 명 황실에서 봤을 때보다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낭황과 살풍대 수십을 일검(一劍)으로 베어버린 것부터가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16553232617529.jpg‘폐하의 명령은 실패다.’

언살들은 암살의 귀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의 황제, 영락제는 언살들이라면, 그런 언살이 열이나 보내면 만우를 암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만우를 바로 코앞에서 대면한 언살은 이번 임무는 실패라는 것을 여실하게 느꼈다.

16553232617529.jpg‘불가능.’

완벽한 암살을 위해 최장 10년까지 숨어서 기회를 본 암살자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회자된다. 하지만 언살은 확실하게 느꼈다. 만우는 십 년, 아니 백 년을 따라다닌다고 해서 암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절대불가촉(絶代不可觸). 중원의 무도한 무림이라는 무리들이 중 하나가 만우를 가리켜 괜히 절대불가촉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다.

16553232587723.png“황제가 본주를 죽이기라도 하라고 했나 보지?”

만우가 툭 내던진 말에 언살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지만 그런 티를 내서는 안 된다. 황실 전복이 일 인에 의해 일어나는 그런 참혹한 수치가 역사에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

16553232587723.png“사실인 모양이군.”

하지만 만우는 아니라고 고개를 내젓는 언살을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언살의 표정이 굳었다.

16553232617529.jpg“아니라고 했다.”

16553232587723.png“뭐, 이해는 해. 본주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황제란 이들은 대단히 이기적이더군. 마치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오만함도 있고.”

16553232617529.jpg“무엄하다!”

언살이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만우는 그런 언살을 서늘하게 쳐다봤다.

16553232587723.png“그런데, 과연 황제의 몸속에 흐르는 피는 다른 색일까?”

16553232617529.jpg“이, 이놈!!!!”

언살의 살기가 짙어졌다. 하지만 언살의 등줄기에 맺히는 식은땀이 많아졌다. 만우라면 그런 무도한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6553232587723.png“그렇잖아? 본주를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한 것도 모자라서 검무나 추는 기녀 취급을 한 건 그들이지. 감히 본주를 말이야.”

16553232617529.jpg“크윽.”

언살이 앉아있던 의자가 부서졌다. 동시에 언살이 한쪽 무릎을 쿵하고 꿇었다. 언살의 얼굴이 붉어졌다. 만우는 기세만으로 언살을 무릎 꿇린 것이다. 언살은 어깨 위에 마치 태산이 내려앉은 것 같은 무게감을 느끼면서 이를 악물었다.

16553232587723.png“그리고 애초에 숨어 있는 놈들까지 이렇게 짙은 살기를 흘리고 있어서야.”

만우는 비릿하게 웃었다. 동시에 언살의 눈이 커졌다.

16553232617529.jpg“들켰다! 도마…….”

16553232587723.png“늦었어.”

앉아있던 만우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동시에 아무 것도 없는 방의 구석과 허공에서 사혈이 짚어져 뻣뻣하게 굳은 채로 죽은 언살들의 시체가 쿵쿵거리며 떨어졌다. 푸화아악!!! 만우의 움직임이 얼마나 빨랐던지 만우가 사라지고 나서야 거센 광풍이 방 안에 몰아쳤다. 그리고 눈 몇 번 깜짝일 사이에 금의위장 출신의 언살을 제외한 다른 언살들이 모두 시체로 변했다.

16553232587723.png“감히 애를 노려?”

16553232617529.jpg“……역시. 네 약점은 저 아이였던 것이군.”

언살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만우는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16553232587723.png“정녕 저 아이가 본주의 약점이라 생각했다면 너희들의 오산이지.”

언살의 눈이 커졌다. 비릿하게 웃는 만우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비춰졌기 때문이다. 만우가 흘리고 있는 살기가 언살의 목줄기를 조였다.

16553232617529.jpg“커, 커헉…….”

16553232702423.png

  언살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극성에 오른 허공섭물이었다. 만우의 가공할 만한 살기는 언살에게만 집중되고 있었고, 언살은 악마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환영을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16553232587723.png“저 아이를 건드린다는 건 내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만우는 한 자 한 자 씹어먹듯 끊어 말했다.

16553232587723.png“본주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지름길일 뿐이야.”

16553232617529.jpg“커흐윽…….”

언살의 입가로 걸쭉한 침이 흘러내렸다. 만우의 살기를 마주한 언살은 심장과 폐가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멈춰선 듯 피가 통하지 않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16553232587723.png“멍청한 놈.”

만우는 마지막 언살의 목숨까지는 거둬들이지 않았다. 살기를 풀고 내공을 갈무리하자 공중에 매달려 있던 언살이 툭하고 떨어졌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만우가 싸늘하게 말했다.

16553232587723.png“어디 한번, 명의 하늘이 바뀌는 걸 보고 싶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봐.”

16553232617529.jpg“…….”

언살의 눈에 서린 살기가 꺾였다. 만우는 그런 언살의 몸을 바깥으로 내던졌다. 우당탕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언살의 꼴 보기 싫은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16553232587723.png“후우.”

명 황제가 보낸 암살단이다. 만우는 명 황제가 자신을 없애기 위해 암살단까지 보냈다는 것을 알고는 싸늘하게 웃었다.

16553232587723.png“받고만은 못 사는데.”

언살의 눈빛은 이미 꺾여 있었다. 만우가 그를 살려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명 황제에게 보내는 만우의 경고장이다. 자신을 건들지 말라는.

16553232587723.png“사신이 와 있다고 했던가?”

설운에게 한양에 명의 사신이 와있다는 것을 들은 만우다. 명 황제에게 받은 것을 돌려보내기 위한 선물로 딱 적당한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그 사이에 동군영의 비명소리가 섞여있다는 것에 고개를 갸웃한 만우가 창을 열었다.

16553232734147.png“아버지, 아버지가?”

16553232617529.jpg“예…… 흑흑.”

그곳에는 피딱지가 엉겨붙어 엉망이 된 몸을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를 맞이한 동백익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동군영이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16553232734147.png“정녕…… 거짓이 없는…… 것이렸다?”

동군영은 힘들게 끊어서 말했다. 피딱지가 엉겨 붙은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는 피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만우가 창틀을 밟고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바깥으로 나갔다.

16553232587723.png“무슨 일입니까 나으리.”

만우가 동군영에게 물었다. 동군영은 고개를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동군영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만우의 눈이 커졌다. 동군영은 소심하기는 하고, 약하기는 하지만 심지가 굳은 남자다. 그랬기 때문에 동군영이 운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동군영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16553232734147.png“만우. 만우. 본가가…… 아버님이, 어머님이…….”

16553232587723.png“……?”

16553232734147.png“본가가. 익주에 있는 내 본가가 원의 기마대에 의해 짓밟혔고, 아버님과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턱.

16553232617529.jpg“군영아!!!!”

정신을 잃은 동군영이 말을 하다말고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그런 동군영의 몸을 받아낸 만우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16553232587723.png“……결국. 살풍대인가.”

1655323276313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