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살풍대의 습격(2)2020.08.08.
이왕 중 하나인 독왕보다 검주가 강했다. 그러니 무림십좌를 정할 때 검주 만우를 사주(四主)가 아니라 진작에 왕(王)이나 패(覇)의 위(位)에 올려놨다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개기기 전에 알아서 기었을 테니까.
“어? 대주님. 이상한 거 안 느껴지십니까?”
교수는 술병을 들어 기린대 고수에게 술병을 집어던졌다. 그러자 이크하는 소리와 함께 말을 꺼낸 고수의 목이 자라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뭐가 느껴지긴 개뿔. 어디서 검주 그 무식한 놈이 한 따까리…… 응?”
그런데 그때 교수의 표정이 변했다. 교수는 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닥에 가져다 댔다. 흙바닥의 까끌거리는 느낌이 느껴졌지만 교수는 눈을 감았다. 드드드드!! 손바닥과 바닥 사이에 낀 자그마한 모래 알갱이들이 미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교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썅! 이거 뭐야. 말이잖아?”
“말이요? 웬 말이…….”
“기마대다!!!”
교수의 한 마디에 기린대의 고수들이 술병을 집어던졌다. 그와 동시에 교수의 시선이 주변의 허공을 훑었다. 이 정도로 진동이 느껴질 정도라면 최소한 백이 넘는 규모의 기마대다. 그렇다면 반드시 흙먼지가 일어나게 되어있다.
“동쪽입니다!!!”
“저기 관도 아니야?”
“예!”
“관군이라도 온 거야? 아니, 관청을 뒤집어엎은 놈이 있었잖아. 검주의 동료 중에!”
동군영을 떠올린 교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만약 저게 부여의 혼란을 진압하기 위해 오는 관군이라면 도망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갈고닦은 교수의 감각이 관군은 아닐 것이라고 알리고 있었다.
“매!”
“매입니다!!!!”
“매라고?”
교수의 시선이 황급히 허공을 훑었다. 그런 교수의 눈에 허공을 활강하고 있는 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매가 사는 지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매가 허공을 빙그르르 돌고 있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원(元)이라고? 원이 왜…….”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확하지 않지만 들었던 소문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악궁 테무르의 죽음. 마교 투귀대의 일원이자 원의 마지막 핏줄인 악궁 테무르가 조선 어림에서 살해당했다!!!
“없었지. 악궁이라는 놈?
“활을 쓰는 놈은 없었습니다.”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 기마대의 선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투귀대와 조우한 교수는 그들 중 활을 쓰는 놈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갑자기 나타난 저 기마대는 하나밖에 없었다.
“살풍대! 마교의 살풍대다!!!!!”
“전투 준비!!!!!”
그들의 눈에 띄기 전이라면 모를까, 살풍대가 시야에 들어온 이상 도망치는 것은 자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검주가 시키는 일을 하기 싫다고 부여 바깥으로 나온 것이 문제였다.
“붙어! 이런 씹.”
쾅!! 교수가 양손에 착용한 철권을 쾅하고 부딪쳤다. 그러자 공력이 주변으로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교수는 달려오는 살풍대를 보면서 주먹을 들어올렸다.
“말이고 뭐고…….”
검주 만우가 나타났기 때문에 교수가 고개를 빠끔 숙였지만 그는 결코 약자가 아니다. 철권 교수. 그는 무려 한 성(省)을 주름잡는 초절정 고수다. 살풍대가 악명을 떨친 기마대라고는 하나, 교수는 검주에게서 받은 정신적인 피해를 풀어낼 곳을 안 그래도 절실하게 찾고 있었다.
“오라!!!!”
공력을 피워올리는 철권 교수의 눈에 묵직한 전마 위에 올라탄 살풍대가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팽팽하게 몸에 긴장을 끌어올린 교수가 살풍대의 선두와 부딪치려는 순간, 마치 물이 갈라지는 것처럼 절묘한 기마술로 달려오던 선두가 교수를 피해 두 갈래로 나뉘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크아아악!!! 교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뒤에서 수하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교수를 우회한 살풍대가 뒤에서 진형을 꾸린 기린대에게 그대로 뛰어든 것이다.
“이 새끼들이. 감히 나 철권을 두고 한눈을…….”
“네놈이야 말로 어디서 한눈을 파느냐?”
바로 귀 옆에서 울려퍼진 듯한 늙구수레한 목소리에 교수의 눈이 커졌다. 교수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앞을 가득 메우고 짓쳐들어오는 검이 눈에 들어왔다. 쉬잇!!! 날이 마치 맹수의 이빨처럼 삐죽하게 솟은 톱날검, 낭황의 애병으로 유명한 낭아검(狼兒劍)이었다. *****
“야, 야?”
만우는 손을 뻗어 들어지는 김향의 허리를 한 팔에 감아쥐고서는 당황한 얼굴로 김향을 탈탈 흔들었다. 하지만 머리에 생긴 혹과 정신을 맞바꾼 김향은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잘하는 짓이로다.]
“시끄러! 네가 방해해서 이런 거잖아!”
[내가 방해를 했다니.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서노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물론 자신이 만우를 오해해서 달려들긴 했다. 하지만 만우는 자신을 가볍게 제압할 정도의 실력이 있음에도 자신과 어울렸다. 물론 김향의 기운을 쫓아오면서 그것이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저렇게 어린아이를 혼자 놔두다니. 그대도 보호자 자격은 실격이니라.]
“아우. 말 많네!”
콰가가각!!!! 김향과 함께 자유낙하하던 만우의 신형이 허공에 우뚝 멈춰섰다. 이룡검을 벽에 꽂아넣어 떨어지던 몸이 멈췄기 때문이다.
“여기 뭐야 대체. 지하로 얼마나 깊은거야?”
[나도 모른다. 만들어진지 워낙 오래된 곳이니까.]
“흐음...사비성, 그러니까 옛 부여의 황성과 이어진 미궁이라.”
[하지만 이 아래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가장 깊은 곳에 숨겼으니까.]
“그곳에 숨긴 바람에 나 없었으면 얘 다칠 뻔한거. 알고 있지?”
만우는 소서노에게 두 눈을 부릅 떴다. 하지만 소서노는 피식 웃었다.
[설마 본녀가 그런 것도 고려하지 않고 저 아이를 혼자 보냈으리라 생각하는가? 저 아이가 입고 있는 망토 하나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 대단한 기물이라고? 이게?”
[그렇다. 싸울어미의 대장인 투녀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기물이니라.]
소서노는 의기양양하게 웃어보였다. 만우는 그런 소서노를 피식하고 비웃었다.
“그래봤자 본주한테 졌잖아?”
[……하지만 다른 이였다면 그대도 쉽게 이기지 못 했을 것이다.]
“다른 이? 누구?”
만우는 킬킬거리며 소서노를 놀렸다. 소서노는 발끈한 얼굴로 만우에게 말했다.
[계백 대장군! 고구려의 양만춘! 신라의 김유신!]
“한 나라를 호령한 대장군들이네? 본주가 그 정도 수준이라고 인정해 주다니. 이거 황송할 따름이야.”
만우의 기를 죽이려 한 것이지만 오히려 만우가 기가 살자 소서노는 끙하고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런데 그때 만우의 표정이 굳었다.
“저 아래에. 제부투혼이 있다고? 그거, 책이야?”
[마음공부와 몸놀림, 발놀림, 검놀림과 창놀림이 적혀져 있는 책이다!]
소서노는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하지만 만우는 그런 소서노는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쭉 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끄응하는 소리를 냈다.
“저게…… 대체…… 뭐냐?”
공력으로 안력을 돋군 만우의 눈에 이 구덩이의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낡은 책이 한 권 놓여있었는데, 그 옆에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위를 쳐다보고 있는 낯선 생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뭐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만우의 말에 소서노는 오히려 더 놀란 표정이었다. 만우는 기기묘묘하게 생긴 낯선 생물체의 생김새를 소서노에게 말해주었다.
“몸은 곰 같고, 코는 뱀처럼 길어. 무소의 눈처럼 눈이 서글거리고 털이 빳빳한게 바늘 같기도 하고…… 꼬리는 저거 뭐야. 호랑이 꼬리야?”
[…….]
소서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니, 창백해졌다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이지만 확실히 표정이 바뀌긴 했다. 그 순간 만우가 있는 곳으로부터 10장 정도 아래에 있던 그 기이한 생물체가 휙하고 뛰어올랐다. 팍!!!
“억?”
그 속도가 가히 빛살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만우는 기겁하며 벽에 박힌 이룡검을 뽑아들고 벽을 발로 박차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쿠웅!!! 그런데 그 기이하게 생긴 생물체가 간발의 차이로 벽에 머리를 처박았다. 만우가 아니라 흡사 이룡검을 노리고 날아오른 듯한 모양새였다.
“흡!”
쿵!!! 뛰어올라 반대편에 이룡검을 박아넣은 만우가 손바닥으로 주변 공기를 밀어내며 기이한 생물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꽈앙!!!
“큭.”
만우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간 장력(掌力)이 생물체의 몸을 두드렸다. 2초식 기면(氣面)이었다. 덩치를 보아하건데 웬만한 곰보다 컸는데, 쇳덩어리를 두드린 것처럼 몸이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푸우우-!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만우의 장력을 몸으로 받아내고도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때 소서노가 옆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만우를 향해 말했다.
[성수(聖獸) 불가사리(不可殺伊)!!!]
“뭐라고?”
소서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긴 코를 부르르 떤 불가사리가 만우에게 달려들었다. 퍽!! 후웅!!! 가까스로 피해낸 만우지만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 가깝고, 그것도 겪어보지 않은 짐승에 가까웠다. 허공에 붕 떠오른 만우의 발목을 코로 낚아챈 불가사리가 만우를 구덩이 안으로 던져버렸다.
[이, 이런!]
성수 불가사리와 눈이 마주친 소서노가 창을 꼬나쥐면서 눈을 굴렸다. *****
“방매 동생.”
“우와! 깜짝이야!!!!”
방매가 진짜 놀랐다는 표정으로 손을 파르르 떨었다. 하마터면 옥령의 얼굴 위에 기다란 화장품 자국이 남을 뻔했다.
“놀랐잖아요 호선!”
축지술을 통해 갑자기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호선은 평소처럼 배시시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이었다.
“척 무사님은?”
“저기 아래…… 끝났나 보네요. 소리가 안 들리는거 보니까.”
방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으로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호선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방매에게 말했다.
“어서 관아로 돌아와. 지금 당장.”
“무슨 일이에요?”
먼저 화장을 다 하고 옆에서 방매가 화장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던 소령이 호선에게 말했다. 호선은 소령에게 말했다.
“그쪽의 어린 아가씨도 정의대라고 했지요? 그곳의 사람들을 관아로 불러모으세요.”
“아니, 그러니까 왜요?”
“저거.”
호선은 손가락을 들어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북쪽을 가리켰다. 부여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더 정확히는 부여현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거대한 살의를 품은 이들이 다가오고 있어요. 이곳이 목표인 것 같은데…….”
“거대한 살의?”
소령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주창과 위문, 웅풍, 마정 그리고 마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옥령이 손을 들어올려 방매의 손을 붙잡았다.
“아무래도 나중에 해줘야 할 것 같네요.”
“네?”
옥령은 일어나 주창을 향해 목례를 했다. 방금 전까지 척사영과 어울린 흔적이 옷에 묻은 흙먼지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으로 그대로 남아있는 주창이 옥령에게 말했다.
“이동한다.”
“예, 대주.”
주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령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 인간이 저런 표정을?’
지난 며칠간 화산파의 제자인 소령이 보아온 주창은 그 누구보다 마교도 같았지만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명문가의 후계자처럼 보였다. 주창에게서는 명문의 후계다운 여유가 절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 닥쳐도 당황할 것 같지 않았던 주창의 얼굴에 있던 표정이 사라졌다. 소령은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교와 관련된 일인가요?”
소령이 주창에게 물었다. 그간 지켜본 결과 마교의 고수들은 전부 싸우지 못해 안달이 난 이들처럼 느껴졌다. 당장 대주이자 소교주인 주창만 하더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척사영과 위험하기 그지 없는 비무를 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위협으로부터 몸을 피한다? 마교는 위협이 다가오면 그 위협을 정면에서 때려부수지 몸을 피하지 않는다. 주창은 몸을 돌리려다가 멈칫하고는 고개만 돌려 소령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