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장보도가 가리키는 동굴(4)2020.08.01.
소서노는 그녀 스스로를 죄인이라 칭했다. 싸울어미로써 대왕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나라의 멸망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네게 많은 것을 전해주고 싶으나, 본녀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구나.]
김향은 전신에 따스한 기운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크게 떴다. 김향이 몸을 일으키가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검은털 망토가 흘러내렸다.
[부디 싸울어미의 혼이 끊기지 않았음을, 대백제의 유산이 살아숨쉬고 있음을 보여다오.]
꽝, 꽈릉! 꽝! 소서노의 말을 듣고 있던 김향의 고개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굉음에 옆으로 돌아갔다. 소서노는 굳은 얼굴로 김향에게 말했다.
[네게 이 미궁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러니 안으로 들어가 제부투혼을 취해 네 것으로 삼아라. 본녀는…….]
김향이 손을 뻗어 소서노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기처럼 김향의 손을 지나쳐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소서노가 남긴 목소리가 김향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괴물을 상대하고 있을 테니. 넌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본녀의 유지를 받들어다오.]
꽈르릉, 꽈릉, 꽈광!!! 흡사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소서노가 말한 괴물이 이 소음의 주인공이라 생각한 김향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김향은 소서노가 사라진 곳을 향해 허리를 숙여 보였다.
“부디…….”
싸울어미의 기운의 근원, 그들이 다루는 기를 품게 된 김향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소서노를 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녀가 겪어온 치열한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겪었기 때문에 그녀의 마지막 유지를 지켜주고자 비장한 표정이 된 김향이 안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두 개?’
콰직!!! 만우 주변을 거대한 검압이 찍어눌렀다. 그러자 만우를 향해 달려들었던 목각인형들이 박살이 나서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개중 몇 개는 땅속으로 처박히기까지 했다. 끼긱, 끼기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각인형들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진짜로 살아숨쉬는 생물이 아니니 반파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도 목각인형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냥 움직이면 말도 안 하지!”
만우는 산산조각이 된 나무 파편들이 모여들더니 새로운 목각인형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무슨 강시도 아니고, 목각인형 따위가 절정의 힘을 내는 거야?”
공동에 있던 목각인형들 중 제대로 된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제 백 기도 채 되지 않았다. 수백기가 넘는 목각인형들은 놀랍게도 그 하나하나가 거의 절정급 고수에 준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그 공격이 단조롭다고는 하나, 반대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지치거나 겁에 질리지도 않았다.
“흥.”
스스렁, 철컥. 만우는 파편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면서 이룡검을 검집 안에 납검했다. 하지만 이내 눈으로 정광을 토해내면서 만우의 오른발이 땅속에 깊숙하게 틀어박혔다. 쯔걱!!! 이룡검의 백색 검신을 담고 있던 검집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무기의 가죽을 재련하여 만든 검집은 웬만한 검기나 열양지기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검집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다. 콰아아-!!! 동시에 이룡검의 검신과 이룡검의 검집이 달아오르면서 불꽃이 허공에 피어났다. 그리고 검압과 검풍이 그 불길로 만우의 전방을 모조리 휩쓸었다. 서거거걱!!!! 그리고 몰아친 검기가 목각인형들을 잘게 부수면서 고온으로 검풍이 조각이 난 파편들을 불태웠다. 화르륵-! 잘게 썰린 목각인형들의 잔해들은 불타올라 재도 떨어뜨리지 못하고 허공에서 산화했다. 흡사 땅에서 수천, 수만 개의 별이 허공으로 치솟는 듯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관을 현실로 이끌어낸 만우는 얼른 이룡검을 벽에 박아넣었다. 취이익!!! 뜨겁게 달아올랐던 이룡검의 검신이 뿌연 연기를 피워내면서 차가운 돌 안에서 식어갔다. 만우는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룡검으로도 기극(氣極)은 무린가?”
만우는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오랜만에 쓴 기천(氣天)의 초식이라 후련함도 없지않아 있었지만 이룡검도 제대로 그런 만우의 초식을 담아낼 수 없었다. 기천(氣天) 3초식 기극(氣極). 만우가 익힌 기천의 초식은 5초식이 끝이었다. 1초식 기선(氣線). 2초식 기면(氣面). 3초식 기극(氣極). 4초식 기천(氣天). 5초식 기천무(氣天舞). 검주라 불리게해 준 상승무공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단촐한 초식 구성이었다. 하지만 만우가 진짜로 무림십좌 검주의 위(位)를 받은 것은 기천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우는 기천의 단순함에 개의치 않았다. 검(劍). 검 자체를 이해한 그 깨달음, 검을 휘두르는 그 모든 행동에 만우는 검주란 위(位)를 받은 것이지 기천이라는 상승무공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발검술의 묘리로 극(極)을 뿌린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기극은 남은 백 기의 목각인형 중 구 할을 불태웠다.
“자. 그러면.”
휘릭! 만우는 이룡검이 어느 정도 식은 것을 확인하고는 검을 벽에서 뽑아들었다. 그러자 이룡검에 남아 있던 잔열에 바스라진 벽면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인형이 아니라 유령인가?”
만우는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녹색령, 소서노를 발견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소서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만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소서노는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목각인형이 몇십 기 남지 않았다는 것에 경악을 숨기지 못 했다. 이 목각인형들은 백제의 사비성의 황궁으로 들어가는 비밀통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장치였다. 백제 최고의 주술사들이 십 년에 걸쳐 만들어낸 목각인형들은 이 미궁 안을 빠져나갈 수 없었지만 일만의 병사들이 몰려와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주술체들이었다. 그런데 그게 일인에 의해 파훼가 된 것이다.
“아. 이거? 귀찮긴 했는데…….”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절정 수준의 고수가 무려 오백이다. 그리고 지치지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만이었다.
“인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단순하더라고. 덤벼드는 게.”
만우 정도나 되니까 그게 단순하게 느껴졌지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아니다. 소서노는 그제야 목각인형이 약한 것이 아니라 만우가 괴물처럼 강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굳혔다.
[입구는 멀쩡하다. 다른 곳으로 들어온 침입자인가?]
“침입자? 음…… 여기를 지키는 지박령, 뭐 그런 거야?”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녹색령인 소서노에게서는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삿된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다.
[지박령.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지. 대백제의 마지막 혼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남았으니.]
만우는 야성이 살아있는 소서노의 눈을 보면서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살아 있는 인간이었으면 흥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혹시 애 못 봤어? 어린 여아? 열 다섯인데 나이보다 어려 보이…….”
슈각!!!
만우의 고개가 옆으로 꺾어졌다. 녹색창이 기운을 풍겨대며 만우의 머리가 있던 곳을 스쳐지나갔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예리한 공격이었다. 만우는 녹색 연기가 되어 흩어진 녹색창이 소서노의 손에서 생겨나는 것을 보면서 웃었다.
“안다는 거네?”
[후인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생겨서 좋군.]
소서노도, 만우도 약간의 오해가 생겼지만 만우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검을 빼들었다. 이룡검을 본 소서노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강자.’
소서노는 만우에게서 느껴지는 투기(鬪氣)에 호흡을 가라앉혔다. 싸울어미로 수많은 전장을 내달리면서 무수히 많은 강자들을 만나본 그녀의 감은 정확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나, 이 정도의 강자가 있다?’
소서노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백제의 멸망 후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정도의 강자를 조우할 줄이야.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소서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만우의 신형이 흐릿하게 잔영을 남기며 소서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운이 좋다고 해야지.”
서걱!! 소서노는 고개를 숙여 만우의 검을 피해내면서 눈을 빛냈다. 만우의 검로가 지극히 단순했기 때문이다. 검을 든 이들이라면 배우는 기본적인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무지막지하게 빠르고, 강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소서노는 이런 이들을 많이 만나봤다. 전장. 그곳에 이끌려와 검 한 자루, 창 한 자루만을 받고 전장에 내던져진 이들 중 기적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이들. 그런 검과 만우의 검이 비슷했다. 그리고 아무리 그럴싸한 무예를 익혔다고 해도 전장에 오래 있다 보면 지극히 단순해지기 마련이다. 전장은 한 사람과 싸워서 이긴다고 끝나지도 않고,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동작에 군더더기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장의 검에 익숙해진 이들이 가장 어이없이 죽을 때? 바로 검예를 익힌, 전장에 나오기 전 자신들 같은 형에 매달리는 이들을 만날 때다. 한 칼을 주고받아 생과 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닌, 머리가 필요하고 눈치가 필요한 그런 전투에서 의외로 전장을 넘나든 이들이 쓰러진다.
‘화려하게.’
소서노의 창끝에 만변(萬變)이 담기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화공의 붓 같다가도, 연초의 연기처럼 움직이는 창의 움직임은 가히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소서노의 창이 움직일 때마다 창영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시선을 빼앗았고 창이 찌르르 울릴 때마다 창이 그리는 그림이 달라졌다.
“흐음.”
만우는 화려한 창영이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창주(槍主)보다 나은데.”
무림십좌의 일인인 창주(槍主) 조관일은 우직한 무인이다. 그는 상산 조가의 일인으로 상산 조자룡의 후손으로 조가창법을 대성한 화경의 무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소서노의 창술이 그 창주 조관일의 창보다 더 나았다.
“백제라. 재밌던 시대였군.”
저런 창술의 고수를 두고도 망한 백제를 떠올리니 만우의 몸이 뜨거워졌다. 그때는 대체 얼마나 많은 강자가 있었고, 얼마나 뛰어난 검이 있었을까.
“흘러간 역사에 대한 본주의 최대한의 예의니.”
스르륵. 만우의 이룡검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소서노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찔한 느낌과 함께 사방에 일렁이는 거대한 기의 하늘이 되었기 때문이다. 땅이 어딘지, 자신이 땅을 밟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기이한 기분이 들었지만 소서노는 창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이 정도 되면 소서노도 필사적이었다. 죽었으니 필사적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소서노는 이를 악물었다. 콰아아-!!! 기(氣)를 두른 창두가 배의 선수처럼 기의 바다를 가르고 나아갔다. 하지만 소서노는 어느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배는 떠 있을 뿐이지.’
백제의 부여는 백마강을 바로 옆에 끼고 있다. 그 때문에 어려서부터 배를 봐왔고,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했기 때문에 바다에도 나가본 적이 있었다. 배는 거대한 바다 위에서 바다의 힘을 받아 떠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런 바다는 언제든지 배를 집어삼킬 수 있다. 지금처럼. 콰아아아!!!! 잔잔하던 기의 하늘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창두 하나를 내밀고 나아가는 소서노를 잡아먹을 것처럼 사방에서 덮쳐들었다. 소서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기의 하늘,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검의 예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영(靈)의 상태라곤 하지만 결국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氣)에 타격을 받으면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여기까…….’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녀를 집어삼킬 것처럼 덮쳐오던 기의 하늘, 기천이 소서노를 중간에 둔 채 두 갈래로 나뉘어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갈래를 만들어낸 하얀 검신을 자랑하는 검이 소서노의 눈에 들어왔다. 파앗! 동시에 소서노의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기의 하늘이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추었다. 원래의 공동으로 돌아온 주변의 풍경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서노의 앞에 만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쑤욱.
“자.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3초식에 이어 4초식까지 한꺼번에 쓴 만우는 이룡검을 후후하고 불었다. 이룡검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역시 기천을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천년한철로 만든 이룡검도 무리였다.
“본주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그쪽을 살려준 것으로 보여주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니.”
만우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서노에게 성큼 다가와 손가락 끝에 기를 담아 소서노의 이마를 따악하고 때렸다.
[악?]
멍하니 있던 소서노의 눈에 빛이 돌아옴과 함께 만우가 손가락으로 소서노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김향. 조그만 여아. 저곳에 있는 것인가?”
[……맞…….]
“됐어. 그러면.”
만우의 전신에서 가공할만한 공력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소서노는 그 기운을 옆에서 느끼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전력으로 갈 거니까.”
김향이 어디 있는지를 알았으니 됐다. 방향을 알았으니 뚫는 것은 일도 아니다. 아무리 단단하고 복잡한 것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넌.”
만우는 그대로 눈을 돌려 소서노를 쳐다봤다. 야성이 철철 흘러넘치던 소서노가 지금은 질린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만우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했다.
“그 애가 왜 그렇게 됐는지 내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줘야 할 거야. 아니면…….”
만우는 끝까지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소서노는 무식할 정도로 기운을 쏟아내는 만우의 무력시위를 보면서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쯔걱!!! 다시 한번 이룡검이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