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장보도가 가리키는 동굴(3)2020.07.28.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척사영이 필요할 때 빼고는 잘 열지 않는 입을 열었다. 그녀는 방매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주, 그분을 곤란케 할 존재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척사영은 방매가 상왕으로부터 이(李)씨 성을 사성받았다는 것을 듣고는 방매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 그런 척사영의 말에 주창이 피식 웃었다.
“그런 게 있다면 우리가 다 같이 들어가도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고.”
주창의 중얼거림을 들은 그곳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쿠르릉!!! 그런데 그때 또다시 기관진식이 움직이는 것이 들렸다. 척사영과 주창이 몸을 날려 구멍을 내려다보았고, 이내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만우가 뚫어놓았던 작은 구멍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
“…….”
자가수복은 아니다. 하지만 구멍이 나면 저절로 움직여 그 구멍을 메꿀 정도로 기관진식이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다. 특히 저 미로의 외벽은 만우가 검기를 최고조로 끌어 올려서야 간신히 구멍이 났을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될 정도의 정교함이다.
“대체 누가 만들었기에!”
척사영이 고개를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기관진식이 버티고 있는 미로임에도 불구하고 척사영은 만우가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
“……에라이!!!”
꽝!!!! 후두둑!! 만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놀란 마음을 담아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제는 벽이 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만우의 몸을 통과시킨 그 구멍이 꾸릉하고 울리더니 통로 전체가 찌르르 울었다.
“와. 진짜. 죽을 뻔했네. 아니, 다리 병신 될 뻔했잖아!”
만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닷새동안 한숨도 안 자고, 쉬지도 않고 뚫어낸 구멍이 눈 깜짝할 사이에 움직여 닫히면서 하마터면 다리가 그곳에 껴서 잘릴 뻔했다. 이 통로 전체가 움직였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만약 다리가 저 구멍에 꼈다면 아무리 만우라고 해도 다리가 잘렸을 것이다. 질량의 차이에서 오는 힘은 제 아무리 만우의 육신이라고 해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뭐가 이리 살벌해!”
만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본 만우는 사람 하나 정도가 지나가면 꽉 찰 것 같은 천장이 낮은 통로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장은 또 왜 이렇게 낮아!”
만우가 고개를 모로 꺾어야만 서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천장이 낮았다. 만우는 신경질적으로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 다음 손을 복도의 벽면에 얹었다. 퉁-!!! 빈틈없이 암석을 통채로 깎아내어 만든 것 같은 이런 통로 안에서는 기감을 퍼뜨려도 통로 너머까지 뭐가 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니 발경으로 벽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려 한 것이다.
“또 통로?”
만우는 자신의 손바닥을 통해 뿜어져 나온 경력이 그대로 허공으로 넓게 퍼졌다. 이 뒤에 이런 빈 통로가 있다는 뜻이다.
“미로. 미로라.”
만우는 비릿하게 웃었다. 이런 곳에서 길을 찾느라 신경을 쓰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스르릉! 백색 검신이 어둠이 내려앉은 통로 안에서 눈부신 빛을 드러냈다.
“깔끔하게 가자.”
스르륵! 이룡검이 단단한 통로의 벽을 마치 두부 가르듯 파고 들었다. 만우는 양팔에 힘을 주면서 앞을 가로막고 있는 통로를 마치 생사대적을 둔 것처럼 노려봤다.
“애 놀라지 않게.”
카가가각!!!! 이룡검이 통로의 벽을 통채로 썰어내기 시작했다. ***** 후우우욱-! 검게 물들어있던 바닥에서 뜨거운 한기(寒氣)를 품은 호흡이 새어나왔다. 뜨거운 한기. 모순적이었지만 분명히 허공에 흩뿌려진 것은 열기를 품고 있는 한기였다. 그리고 검게 물들어있던 바닥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으으으…….”
입술이 파랗게 물든 김향이 실눈을 떴다. 그녀는 검은 인형에 먹힌 것이 아니었다. 좌정하고 있던 백골이 두르고 있던 검은털을 가진 망토, 그 망토가 저절로 일어나 김향의 몸을 감싼 것이다. 따닥, 딱, 딱 김향의 이빨이 부딪치면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김향의 볼이 붉어졌다가 푸르게 반복적으로 변했다. 그녀의 몸 안에서 음과 양의 기운이 번갈아가며 덩치를 불리고 있다는 뜻이다.
“추, 추워.”
김향은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검은 망토를 끌어당겼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그 때, 검은 망토에서 청량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김향의 두 눈을 비췄다. 김향의 눈이 커졌다.
[호오. 너 같이 어린 여아가 어찌 이곳에 들어온 것이냐?]
김향은 오한과 치밀어오르는 열기를 번갈아 느끼는 혼란스런 와중에도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여자를 보고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마치 성난 삯처럼 거친 기운을 풍기는 여자였다. 정리하지 않은 머리는 마음대로 뻗칠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고, 근육이 탄탄하게 잡힌 팔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허리춤에는 긴 검을 한 자루 차고 있었고 등에는 활을 메고 있는 여자였다.
“누, 누구…….”
[쯧쯧. 기(氣)도 다루지 못하는 평범한 아이가 청석균과 청석수를 먹은 모양이로구나. 하긴. 그런 영약들은 기를 다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탐식(貪食)을 자극하니 어쩔 수 없다만.]
여자는 고통스러워하는 김향을 보면서 눈을 푸르게 빛냈다.
[본녀는…… 지금이 언제인지는 모르겠다만.]
볼에 녹색과 붉은 염료를 가로로 바른 여자가 고개를 돌려 허물어진 백골을 쳐다봤다. 그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서렸다.
[저리 백골이 되었으니 필시 시간이 오래 지난 것일 테지.]
“설마…….”
[그래.]
여자가 김향을 보면서 웃었다.
[본녀는 대백제 최후의 싸울어미, 투녀(鬪女) 소서노라 한다.]
김향이 소서노의 이름을 듣고는 까무라쳤다. 하지만 소서노는 그런 김향이 까무라치기 직전까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빙긋 웃었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만에 드디어 후인이 나왔거늘, 죽일 순 없지.]
그 순간 소서노의 눈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돌아갔다. 미로가 시끄러워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소서노의 표정이 슬핏 굳었다.
[불청객이 오기 전에, 일단 아이부터 살리고 봐야겠군.]
파아아앗!!!! 소서노의 전신에서 풀내음을 품은 녹색의 기운이 차갑기만 하던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퉁! 투두둥!!!! 만우는 김향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로를 뚫었다. 직진. 전진. 흡사 자신의 인생에 우회나 후진은 없다는 듯, 이룡검을 손에 쥔 만우는 걸리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베었다. 통로의 벽면을 베어버리고, 다음 통로로 넘어가다보면 함정이 작동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만우의 방법은 간단했다. 정면돌파. 화살이 날아오면 화살을 이룡검으로 베어냈다. 창이 쏘아져 들어오면 창대를 수십 조각을 내어 분해해 버렸다. 독연기가 통로에 가득 차면 통로 벽에 작은 구멍을 뚫고 검풍으로 독연기를 빼냈다. 거대한 도끼날은 떨어지기도 전에 함정의 중추를 만우의 이룡검이 파고들어 부숴놓았다. 전진, 전진, 전진.
“아니. 대체 얼마나 깊숙이 처박아 놓은 거야?”
하지만 만우는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의 크기에 당황해했다.
“이 정도면 미로가 아니라 미궁이라 부르는 게 좋겠는데?”
제부투혼. 싸울아비의 혼이라 불리는 그것이 과거 백제의 싸울아비들이 익힌 무공심결이 적힌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무공심결을 숨겨놓는데 이렇게 거대한 미궁을 만들었다?
“……그냥 장보도가 아닐수도 있겠는데.”
만우는 돌아가면서 헤매로 만들어놓은 미로를 검으로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입구에서 가까운지 출구에서 가까운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만우는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푸확!!! 파편이 허공을 비산하면서 거대한 구멍이 뻥 뚫렸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만우이 저벅거리며 걸어 나왔다. 발아래 밟히는 파편들이 바스라졌다.
“미로는 드디어 끝인가?”
만우는 거대한 동공을 보고 눈을 빛냈다. 혹시나 김향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김향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공간이야 여긴?”
만우는 꽤 큰 동공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목을 뚜둑거리며 이리저리 목을 돌렸다. 드디어 몸을 쭉 펴도 머리가 천장에 닿지 않는 공간이 나왔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뚫고 나가면…….”
이룡검을 고쳐쥐던 순간, 만우의 고개가 뒤로 휙하고 돌아갔다. 저 너머에서 강렬한 파동이 사방으로 퍼지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끼리리릭! 끽! 타닥! 끼이익! 그런데 그때,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챈 동공에서 거대한 기관진식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냥 무시하고 가려던 만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인형?”
어두운 동공 안이 갑자기 밝아졌다. 기관진식이 작동하면서 화섭자에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만우는 그렇게 불이 붙은 화섭자 아래로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인형들을 보면서 눈가를 좁혔다.
“사백. 오백.”
동공의 크기는 지금까지 만우가 헤쳐나온 통로의 크기를 합친 것보다 더 컸다. 그리고 그곳에 오백 개 정도 되어보이는 목각인형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서있던 목각인형들의 관절에서 끼긱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밌네.”
만우는 이 동공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단순한 기관진식이 아님을 깨달았다. 목각인형들은 인형일 뿐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고 있다면 답은 한 가지다.
“부적, 진법. 여러가지도 가져다 틀어박았네.”
부적이나 진법, 아니면 만우는 자신의 감각을 건드리는 이 낯선 기운이 목각인형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일 것이라 확신했다.
“뭐.”
패액! 만우는 이룡검을 허공에 털었다. 그러자 그 위에 내려앉아 있었던 먼지 조각들이 검풍에 휘말려 날아갔다. 처억. 만우는 이룡검을 어깨 위에 걸쳤다. 그런 만우 앞에 두고 목각인형 군단이 소리 없이 따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위압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만우는 그런 목각인형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없애고 가면 되지. 없애고.”
따가닥!! 목각인형들의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변하며 만우를 향해 쇄도했다. ***** 김향은 긴 꿈을 꿨다. 그 꿈 속에서 김향은 투녀 소서노가 되어 수많은 싸울아비들과 함께 전장을 내달렸다. 그리고 백제의 마지막 명운을 결정지은 황산벌 전투의 5000인으로도 참전했다. 그 마지막 전투에서 대장군 계백을 필두로 한 5000인은 전멸을 앞둔 전투 직전 투녀 소서노에게 싸울아비의 혼이 담긴 제부투혼을 그녀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백마강 유역의 작은 동굴에 숨겼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동굴이지만, 실지로는 사비황성과 연결되어 있는 지하미궁이었다. 그곳에서 투녀 소서노는 그녀에게 부여된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고, 그 작은 방에서 생을 마감했다. 치열하고 처절한 인생을 살다간 싸울어미, 투녀 소서노. 고구려를 세운 시조왕 주몽의 조력자이자 두 아들을 데리고 세운 백제의 여대왕 소서노의 이름은 계속해서 대물림됐다. 싸울어미. 전장을 내달린 싸울어미들을 이끌던 싸울어미 부대의 대장들은 대대로 소서노란 이름을 가져다 썼다.
“핫.”
[깨었느냐?]
김향은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던 오한과 열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 때 거친 소서노의 목소리가 김향에게 들렸다.
“아…….”
김향은 녹색령(靈)이 된 소서노를 보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인생을 방금 전까지 함께 했기에 묘한 감정이 와락 치밀어오른 것이다. 소서노는 그런 김향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되었다. 그건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니.]
“정말…… 백제의…….”
[그래. 대왕을 끝까지 모시고자 하였으나 결국 이곳에 제부투혼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 바로 본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