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장보도가 가리키는 동굴(2)2020.07.25.
설운은 어정쩡하게 말을 하는 언살을 노려봤다. 눈앞의 언살만이 아니라 이 일행을 은밀하게 따르고 있는 다른 언살들도 신경에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임금이 부장으로 임명을 했기 때문에 동행을 하곤 있지만, 수상쩍은 이 실력자들이 궐에 몰래 들어왔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동행하고 있고, 엄격한 위계가 요구되는 군임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자신에게 어정쩡한 말투를 사용하기까지하니 계속해서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난 대명 황실의 명 이외에는 받들지 않는다. 그게 조선의 임금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설운의 몸에서 자욱한 살기가 일어났다. 계속해서 이것으로 문제를 삼아도 언살의 대응은 한결 같았다. 모시는 주군이 다르니, 조선의 임금이 내린 명령을 따르기는 하나 조선의 법을 자신에게 바라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은 흥분할 때가 아닐터. 선택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설운의 살기를 언살은 가볍게 무시했다. 경지가 동등하니 설운의 살기도 가볍게 흘려보내는 언살이었다. 설운은 이를 으득하고 꺠물었다.
“무슨 선택?”
싸우기 전에 지금은 지엄한 어명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한 번 참고 넘어가기로 한 설운에게 언살이 말했다.
“신출귀몰! 살풍대를 이런 보병으로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
“이들이 정예라고는 하나. 살풍대는 수많은 사선을 넘나든 정예 중의 정예. 설령 따라잡는다 하더라도 오백의 보군으로는 일백 기마를 상대할 수 없다!”
언살은 단언하듯 말했다. 설운도 알고 있었다. 원의 기마대가 가장 무서운 것은 그들의 표홀한 기동속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모두 기사(騎射)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말에서 태어나 말과 함께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원 기마대의 기마술은 감히 따라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말에 탄 궁사들이 쏘아내는 화살은 그들을 상대해야 되는 적에게는 재앙이나 다름 없었다.
“또한 그들의 전마(戰馬)는 천리도 내달릴 수 있는 상등품의 전마들. 원 기마대가 속도가 아니라 지구력으로 정평이 나있다는 것을 있지 말아야 한다!”
설운은 고개를 돌려 경보로 자신을 따르고 있는 오백 오위의 정예를 쳐다봤다.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상대는 지구력이 뛰어난 전마를 탔지만, 이쪽은 두 발로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의 살풍대와 조우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겠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방법은?”
언살은 선택을 해야한다고 했지만 사실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대로 계속해서 적의 꽁무니만 쫓는 것은 하책이오, 전서구를 띄워 살풍대의 앞을 가로막도록 주변 지역에 명령을 내리는 것은 중책이다. 그들이 살풍대를 막아낼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상책은?”
언살이 씩 웃으면서 손짓을 했다. 그러자 모습을 숨긴 채 경공으로 내달리고 있던 언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대로 저들을 몰아 부여로 내려보낸다. 그곳에는 저 살풍대를 잡아먹을 수 있는 호랑이가 버티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설 장군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언살은 설운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기에는 입가에 살기가 맺혀 있었다. 설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검주, 검주를 아는군.”
“알다마다. 아니, 잊을 수 없다마다.”
언살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만 생각하면 살기가 치솟는 언살이었지만 지금은 참을 때였다.
“무림십좌! 무림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눈부신 역사를 써내려간 조선의 검객! 그가 부여에 버티고 있으니 제 아무리 살풍대라고 하여도…….”
“그러니까. 고의적으로 살풍대를 이대로 추격하는 척을 해서 검주, 그분의 손에 맡기자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설운은 언살의 말을 끊었다. 언살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작하진 않았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
하지만 그 이전에 언살은 설운이 그를 그분이라고 극진히 공경하는 말투를 쓰는 게 거슬렸다. 설마 검주 만우가 조선 조정의 장수와 연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러자는 말이지.”
언살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원의 망령을 제거하는 것도 있지만, 만우를 처리하는 데에도 있다. 검주 만우라고는 하지만 언살들은 중원에서도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일류급 살객들이다. 연왕 주체의 밑에서 전 황제인 건문제의 주요 인물들을 엄격한 호위와 치밀한 기관진식, 진법들을 뚫고 암살하여 영락제를 황위에 올린 공신들이기도 했다.
‘화경의 고수라도 똥은 싸겠지!’
암살을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똥간 속에 숨어있다가 생리현상을 해결하러 들어온 암살 대상을 암살하기도 할 정도로 독종들이 바로 언살이다.
“하. 검주를 잘 안다고?”
하지만 설운에게서 돌아온 것은 코웃음이었다. 그 코웃음에 언살이 발끈했다.
“불가능하다 생각하는가?”
“아니. 내 말은 그분을 이용해 먹으려는 생각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얼토당토 하지 않다는거다!”
설운은 손을 들어 대열을 멈춰세웠다. 그에 맞춰 말을 멈춘 언살의 주변으로 언살들이 그림자처럼 솟아났다. 설운은 혀를 쯧하고 찬 이후 분노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언살에게 말했다.
“그분을 이용해 먹겠다? 그분이 그걸 모를 거라 생각하는가?”
“그냥 우리는 이대로 살풍대를 놓치면 되는 간단한 일…….”
“웃기지 말거라! 그동안 혹시라도 희생당할 조선 땅의 백성들은 어찌하고!”
설운의 입에서 고성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네놈이나 내가 머리를 아무리 굴린들, 모르실 분 같더냐?”
“검주, 그자가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그자는 모른다!”
언살은 어이가 없었다. 설운이 검주 만우를 언급할 때마다 흡사 그를 모시는 신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다. 뒈지려면 네놈이나 그분을 이용해 먹거라. 난…….”
설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우와 가장 먼저 명에서부터 만나 함께한 사람이 설운이다. 그는 만우가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그리고 자신에게 덤벼들었던 감령과 필두를 맨 처음에 어떻게 교육 시켰는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려 초절정의 고수들이 만우의 주먹만 봐도 벌벌 떨 정도로 한 번 주먹을 들면 확실하게 마무리를 짓는 것이 만우다. 그런데 살풍대를 몰아서, 그 기마대가 부여로 쳐들어가게 만드는 것을 방조한다고?
‘아마 날 쳐죽이실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필시 백성들의 불필요한 희생이 생긴다. 그리고 만우는 살풍대를 막을 임무를 맡을 자신을 반 죽여놓으려 달려들지도 모른다. 아니, 만우면 분명히 그러고도 남았다.
“이런 겁쟁이…….”
언살은 그런 설운을 보면서 혀를 찼다. 하지만 설운은 언살이 뭐라고 하건 턱을 빳빳하게 치켜들고 언살을 노려봤다.
“내 상책은 여기서 나와 그대들만 따로 먼저 움직이는 것이다.”
“……뭐?”
설운이 고개를 치켜든 채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언살이 내민 상책보다 자신의 계책이 더 낫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대가 상책이라면, 내 의견은 최상책이다. 우리가 먼저 움직여서…….”
설운은 경공을 능숙하게 쓰던 언살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낭황과 살풍대를 앞지른다. 저들의 몰이꾼이 되어 저들을 몰 것이다.”
“미친! 어찌…….”
“왜. 그대들은 경공을. 그리고 나는 말을. 다행히도 이 말은 전하께서 어명 완수를 위해 내려주신 명마. 우리들만 소수로 움직이면 얼마든지 살풍대를 따라잡을 수 있다!”
보군(步軍)을 끌고 기마대를 추격할 수 없으니,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소수정예로 움직여 적들의 앞을 가로막고 되레 적들을 몰아 보군으로 포위섬멸하겠다는 것이 설운이 세운 작전의 개요였다.
“…….”
그게 실현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기 떄문에 언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영락제로부터 받은 밀명은 이게 아니었다. 하지만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살풍대. 원의 망령인 그들을 그대들 십인이 막아서서 패퇴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전공(戰功)이 될 것인지 숙고해 보라. 그러면 내 말이 터무니 없다고만 하진 않을 것이다.”
설운은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설운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언살들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나.’
검주를 이용하자고 할 때 언살이 드러내보인 감정은 분명한 살기였다. 하지만 설운은 당장 그들이 숨긴 한 수를 끌어내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이용할 만한 날카로운 칼은 써먹으면 되겠지. 그 이후에는 검집에 넣으면 되니까.’
설운은 언살들을 이용해먹을 생각에 눈을 빛냈다. *****
“와…… 괜히 검주 검주 하는게 아니었어. 밤새 저러고 있었다고?”
작은 동굴 주변으로 개미떼처럼 모여든 무인의 수가 무려 천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들 모두 동굴 근처에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 하고 있었다. 마교와 무림맹, 그리고 무림십좌 검주 만우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렇게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되는거야?”
“닥쳐봐. 일단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어야지.”
손가락만 빨고 있다가 돌아가게 생긴 무림인 중 몇몇이 투덜거렸지만 상대는 무려 마교와 무림맹, 그리고 검주 만우였다. 그러니 돌아가는 상황이나 보겠다며 만우와 마교, 무림맹 고수들이 미친듯이 땅을 파내려가는 것을 구경했다.
“호선!!!”
“흐읍!!!”
호선은 식은 땀이 맺힌 얼굴로 거의 정화가 된 상서로운 기운을 만우의 몸에 쏘아보냈다. 그러자 만우의 얼굴에 서려 있던 약간의 피로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하앍.”
호선이 갑작스레 찾아온 어지러움에 비틀거렸다. 그 순간 방매가 호선의 몸을 부축해줬다. 호선이 얼굴 위로 늘어진 머리카락 몇 올을 손으로 떼어내면서 힘겹게 방매에게 말했다.
“고마워 동생.”
“아니. 무슨 휴대용 약탕기도 아니고!!!!”
방매는 만우를 보면서 눈을 부라렸지만 정작 만우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벌써 몇 장이나 언덕을 깎아내고 들어간 상태이기 때문이다.
“허억, 허억.”
흙투성이가 된 검인과 무림맹 고수들이 자신들이 파놓은 구멍에서 기어나왔다. 그렇게 기어나온 이들은 명문정파의 일원답지 않게 흙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그들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수고하셨어요. 여기.”
호선을 한 쪽에 앉혀놓은 방매와 어리가 물과 수건을 정의대의 고수들에게 내밀었다. 그들은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격전을 치른 것보다 더 몰골이 엉망이었다. 머리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흙투성이에, 얼마나 땅을 파낸 것인지 두 팔과 다리가 벌벌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어리가 뭐라고 돕겠다면서 구멍 근처에 쌓인 돌과 흙무더기를 나르고 있었다. 광문자도 그런 어리를 도와 땅에서 파낸 흙과 돌들을 열심히 날랐다. 카가가가각!!!! 계속해서 땅에 난 깊숙한 구멍에서 흙과 돌이 바깥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나는 소리는 땅을 파는 소리가 아니라 단단한 금속을 긁어내는 소리였다.
“내가 이러려고 초절정에 오른 게 아닌데.”
역시 정의대의 고수들처럼 행색이 엉망인 폭혈도 위문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만우의 무지막지한 강요 앞에서는 자신의 경지가 새삼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그의 강요를 거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바박!!! 그런데 그때 구멍에서 척사영과 주창을 필두로 한 투귀대 고수들이 솟구쳤다. 다들 행색이 엉망이었지만 그들을 본 검인을 비롯한 정의대 고수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혹시…….”
“기관진식이 작동되고 있는 미로로 의심이 가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만우는요?”
방매가 척사영에게 말했다. 척사영은 머리에 내려앉은 흙을 손으로 털어냈다. 미로가 있는 곳까지 절벽을 통채로 깎아내어 파고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미친짓에 가까웠다. 차라리 내공을 분사하여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절벽을 부쉈다면 일이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미로고 뭐고 같이 부서질 상황이었다. 그러니 남은 것은 튼튼한 고수의 육체를 이용해 직접 땅을 파내려가는 것밖에 없었다. 아무리 경지가 높고, 내공이 많으며 육체가 강건해도 사람이 두 손으로 절벽을 파내려가는데는 지난한 시간이 필요했다. 닷새. 그 닷새동안 만우를 비롯한 마교와 정의대, 그리고 하오문과 은월루의 사람들은 제대로 자지도 쉬지도 못 한 채 일을 해야만 했다. 동군영과 동백익이 식량을 보내주고 잘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줬기 때문에 거의 야영을 하듯 밤낮없이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곧바로 들어갔습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고.”
“만우 혼자 위험하게…….”
방매가 말끝을 흐렸다. 말을 하고보니 뭔가 이상하단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모인 모든 고수들이 방매를 미친년 쳐다보듯 쳐다봤다.
“내가……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방매 동생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애.”
호선이 다 죽어가는 얼굴로 방매에게 말했다. 방매는 볼을 긁적였다.
“둔갑술까지 쓸 줄 아는 영물인 나를…… 치료제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인데 위험하다고??”
호선의 말에 더 할말이 없어진 방매였다.
“닷새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땅을 파댔지.”
“그냥 판 것도 아니야. 조각하는 줄 알았는데.”
“검주가 아니라 천부적인 조각사일지도…….”
만우에 의해 강제로 부려졌던 마교와 무림맹 고수들의 의견이 지금만큼은 일치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깨닫고 불쾌한 표정들을 지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