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제부투혼(2)2020.07.11.
“한양에서 왔다고 했지?”
“네.”
뒷말로는 ‘원해서 온 게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김향은 꾹 참았다. 괜히 그 말을 입에 담았다가 또 누가 피를 볼지 모른다.
“묘하게 익숙해져가고 있는게 싫긴 한데.”
김향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여러가지 야채와 곡식들을 자루 안에 담았다. 처음에는 그리 무섭던 마교의 고수들인데, 부여에 도착하고 나서부터는 별로 무섭지가 않았다. 맨날 산에서 노숙할 때는 사냥도 하고, 육포만 먹어대길래 사람 같지 않아 보이던 마교 고수들도 똑같이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이들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김향에게 돈을 줘서 심부름이나 보내고, 음식도 못해 음식도 김향이 전부 해야 했던 것이다.
“그 예쁘게 생긴 언니는 대체 뭘 배웠길래 솥을 가루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향은 옥령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해줄 바에는 왜 한양에서 데려온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양으로 돌아갈 수는 있을까?”
보아하니 저들은 어리를 노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리와 광문자에 대해 자꾸만 물어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향이 아무것도 모르자 이제는 그냥 몸종처럼 데리고 다니기만 하지, 처음처럼 무서운 분위기를 만들어 물어보거나 하는 법도 없었다.
“……그 사람만 빼고.”
파천서생 마일을 떠올린 김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사람만 보면 묘하게 음침하고 기분이 나빴다. 그 사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 자신이 한참동안 기절해 있던 것도 기억이 났다. 한양 인근에서 정신을 잃었었는데, 눈을 떠보니 부여 인근이었기 때문이다.
“무림인은 다 이상해. 그…… 만우라는 사람도 그렇고.”
김향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모두 들어주겠다고 했던 만우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이 느껴졌지만 자신에게 결코 내색하지 않던 사람이다.
“자. 여기 다 됐다. 들어봐.”
“감사합니다 아저씨. 끄응.”
김향은 다리에 힘을 주어 가득 찬 자루를 들어올렸다. 어리고 잘 먹지 않아 크지도 못한 김향이 나르기에는 벅찬 자루였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서 돌아가서 이거…….”
퍽!!! 그 자루를 들고 나르던 김향의 눈에 번쩍하고 불이 튀었다. 동시에 김향은 실이 끊어진 연처럼 풀썩 정신을 잃고 고꾸라졌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 이래도 되는 거야?”
“돼! 어서 챙겨!!!”
“이, 이 아이도?”
“그러면. 우리가 했다고 어디 소문이라도 낼 참이야? 이리 오라고!”
*****
“어……어?”
주창의 남자답게 생긴 굵은 인상의 얼굴에 금이 갔다. 주창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헛간에 들어서서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쯤이면 분명히…….”
“여기에 있다면서?”
만우에게서 심기가 불편하다는 기색이 팍팍 느껴지자 제 아무리 주창이라고 해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식재료를 사러 보냈으니 지금쯤이면 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디 있냐니까?”
주창은 만우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 했다. 그도 그게 궁금했기 때문이다.
“설마…… 본주를 상대로 거짓말을? 하하하하하하.”
만우는 기가 막히다는 듯 자신이 말하고도 웃음을 터뜨렸다. 주창은 그런 만우를 보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게 된 상황 때문이었다.
“거, 거짓이 아니다. 분명히 그 아이가 가는 저잣거리와 이 헛간의 거리를 고려하여 그 아이의 이동시간을 계산하면…….”
“여! 기!!”
쿵쿵!!!! 만우가 주창의 말을 끊으면서 발을 굴렀다. 그러자 헛간의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땅에는 만우의 족적이 선명하게 남았다. 주창은 만우를 슬쩍 쳐다보면서 마련검의 검병에 손을 얹었다.
“에 있다면서. 아까랑은 말이 다르네?”
만우는 고개를 모로 꺾었다. 주창이 검병에 손을 올리고 있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자세였다. 만우는 주창에게 말했다.
“그래. 백 번 이해해서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치자.”
“난 정말…….”
“어쨌건 애가 없잖아!”
만우는 버럭 소리지르고는 심호흡을 했다. 자칫 잘못해서 공력이 폭발해 이 헛간을 무너뜨릴 뻔했다. 만우 정도의 수준에 다다른 고수라면 늘 고요한 호수와도 같은 마음가짐이 중요했다.
“만약 그 아이가 도망갔거나 했다면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그, 그건…….”
주창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어차피 애초에 김향은 은월루에 대해 몰랐을 때부터 그냥 짐에 불과했다. 옥령이 데려고 가야한다고 주장을 해서 데리고 다녔을 뿐이다. 그러니 도망가도 주창 입장에서는 딱히 손해볼 것이 없었다. 만우만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설마, 그런 것도 없어? 한양에서 애를 여기까지 데려왔으면서? 어?”
만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창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우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애가 그냥 사라졌다고? 도망 갔으면 이 부여에서 어떻게 찾지? 아니 그러다가 애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기라도 하면.”
만우는 퉷퉷퉷하고 침을 세 번 내뱉었다.
“그래. 무효야. 방금 내가 생각한 건 무효라고!”
콰앙!!!
“큭.”
주르륵
“아오! 이 멍청한 새끼들! 뇌까지 마기로 물들어버린 것도 아니고!”
만우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열이 뻗쳐 주먹으로 주창을 후려쳤다. 굉음이 터져나왔지만 주창은 아슬아슬하게 만우의 손을 검집으로 받아냈다. 하지만 힘을 이기지 못하고 세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고!”
“으음…….”
만우에게서 불시에 습격을 받았지만 주창은 파르르 떨리는 마련검의 검집을 쓰다듬는 것 빼고는 뭐라 답할 말이 없었다. 불시의 습격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것이 그냥 주먹질이었기 때문에 화를 내기에도 뭐했다.
‘그냥 주먹질인데. 잘못 맞았으면 갈비뼈가 나갔겠는데.’
그냥 주먹질이라고 하기에는 파괴력이 과했지만 어쨌든 살기가 실려 있지는 않았다. 주창은 만우의 이글거리는 눈길을 슬며시 피했다.
“이, 일단 전후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근처 저잣거리로 가는 게 어떤가 싶은데.”
“그게 다냐? 어? 아후우…….”
만우는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임수미라도 데려올 걸, 하고 만우는 후회했다. 사람을 찾는데에는 하오문 같은 애들이 전문이었기 때문이다.
“부, 부여가 그리 넓지는 않으니 금방 찾으면 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만우 대신 저잣거리로 가는데 앞장을 섰던 주창이 골목길을 돌아서는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섰다. 뒤에서 걸어오던 만우가 손을 뻗어 주창을 옆으로 밀어냈다. 주창의 발 아래로 무언가 보인 것을 만우도 본 것이다.
“이거 야채 아니야? 그리고 이건 쌀 같은데. 조도 있고.”
골목길을 도는 부분에 땅바닥에 이리저리 널려있는 야채와 곡물들 때문이다. 그리고 주창은 만우에게 김향이 식재료를 사기 위해 저잣거리로 갔다고 말했었다.
“이거…… 누가 손으로 쓸어 담은 흔적인데.”
뒤에 서 있던 주창의 표정이 더욱 난처해져 갔지만, 만우는 누군가 손으로 쓸어담은 흔적이 가득한 것을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만우의 어깨에서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주창의 눈에 들어왔다. 그게 그냥 아지랑이가 아니란 것을 한 눈에 알아챈 주창의 어깨에 움찔하고 힘이 들어갔다.
“누가 애를 데려갔다는 소리잖아 이 새끼야!!!”
콰앙!!! 쿵! 우르르
“쿨럭!”
만우가 또다시 주먹으로 주창을 후려쳤다. 이번에도 주창은 검집을 들어 막아냈지만 몸이 날아가 옆집의 담벼락에 틀어박혔다. 주창은 밭은 기침을 내뱉었지만 주창이 부딪친 돌 담벼락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니가 책임져 이 무식한 새끼야아아아!!!”
만우의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주창의 고막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
“에이씨. 중원에서 배 두드리면서 등 따시게 살 수 있는 놈들이 뭐 먹을게 있다고 여기 조선까지 와서는…….”
한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를 험난한 무림에서 살아남은 훈장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독안귀(獨眼鬼). 명청은 사파로 분류되지만 산동성의 구석진 촌구석에 있는 삼류 방파에 불과한 지존파(至尊派)의 문주다. 그 스스로도 삼류 고수에 불과한 지존파는 말이 무림 방파지 사실은 뒷골목 무뢰배들이 뭉친 곳에 불과했다. 육합권법이나 삼재검법 등 큰 성의 무관에 가면 돈을 주고 배울 수 있는 간단한 삼류 무공들을 익힌 것이 고작인 것이다. 그런 지존파의 문주인 독안귀는 산동성에서 조금만 배를 타고 넘어가면 되는 조선반도에 ‘제부투혼’이라는 절세의 무공이 담긴 장보도가 발견됐다는 것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에 올라탔다. 그런 삼류 무림 방파의 운명이란 것이 그렇게 뒤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던질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나타난 검주와 무림맹의 정의대가 부여를 관리하겠다고 선언을 하면서 일확천금을 노렸던 명청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것도 못 들으셨습니까, 형님? 검주, 그 애새끼가 동이족이라는 거.”
없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고 했다. 검주라면 그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절세고수지만 눈앞에 없으니 그들에게는 그냥 어리고 싹수가 노란 놈일 뿐이다.
“알아 임마! 그런 놈이 왜 우리 밥그릇까지 탐내냐, 이거지. 그놈 정도면 중원에서 한 성을 차지할 수도 있을 거 아니야!”
검주 만우가 정, 사, 마를 가리지 않고 어떤 세력의 밑으로 들어간다? 아마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무림십좌의 일인인 검주를 기꺼이 맞아들일 것이다. 지존파의 눈에 만우는 원하면 부건, 명예건 여자건 너무나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금수저였다.
“그런데 우리 여기서 낚시나 하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지존파의 문도라고 해봤자 열다섯이 고작이었다. 문주를 형님으로 부르는 그들은 여전히 그냥 파락호일 때의 성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슬 퍼런 검주와 정의대의 선포에 지존파의 문도들이 할 수 있는 건 백마강에 나와 낚싯대가 드리우는 것 외에는 없었다.
“나도 몰라 임마! 괜히 길거리 돌아다니다가 그놈들 눈에 띄어봐라. 좋겠냐?”
“아니죠. 알겠습니다.”
지존파 정도라면 검주가 나설 필요도 없다. 정의대의 최약체인 소령이 나서도 가볍게 정리가 될 수준의 파락호들이 바로 지존파다.
“어? 저거 뭡니까?”
아무런 입질도 없는 낚싯대를 놓고 멍하니 허공만을 쳐다보던 명청의 뒤에 문도 중 한 명이 하는 말이 들렸다. 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명청이 고개를 돌렸다.
“웬 여자애 하나 데려오는데요?”
“얼씨구. 도둑놈들인가?”
뭐 눈에는 뭐가 딱 보이는 법이다. 지존파의 문도들은 실신한 김향과 김향이 들고 있던 자루를 들고 옮기는 이들을 보고 저들이 강도임을 한눈에 눈치챘다. 하지만 이 일에 익숙한 놈들은 아닌 듯했다.
“딱 봐도 배가 고파서 누구 하나 턴 것 같은데. 낄낄.”
지존파의 문도 중 하나가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심심한데 잘 걸렸다는 표정이었다. 명청이 그런 문도를 보면서 인상을 썼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앉아 임마.”
“아니, 무공까지 익혔는데 어린아이 물건이나 강도질 하는 놈들을 두고 보란 말씀이시오?”
“음 그건.”
그들이 사파의 무리라고는 하나 무림인이라도 부르기에도 창피한 수준의 무공을 익힌 이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냥 파락호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름도 거창하게 지존파라고 붙였지만 결국 그들은 사람 하나 죽여본 적 없는 뒷골목 양아치들에 불과했다.
“검주와 정의대가 부여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나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형님. 그러니까 우리도 한 팔 거들자는 겁니다. 그러면 혹시 압니까?”
사파라고는 하지만 자신들이 사파라는 정체성도 뚜렷하지 않았다. 그저 무림인이 멋있어 보여서 무림인인 척 하는 이들이다. 스스로도 독안귀라는 그럴 듯한 별호까지 붙였지만 사실은 촌구석에서 주먹질이나 하다가 주먹을 눈으로 받아내 안대를 쓰고 다닐 뿐이다.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자?”
“네. 정파의 도인이나 중들이 자비롭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특한 일을 했다고 무공 하나 알려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 말에 혹한 명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향을 들고 있는 남자 네댓 명이 백마강의 강둑 아래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저기로 사라지는뎁쇼?”
“뭐해? 가야지.”
명청은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는 비싼 돈을 주고 산 도를 허리춤에 차고는 문도들을 거느린 채 보무도 당당하게 강도들이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강도들이 모습을 감춘 강둑 근처로 걸어간 명청은 강둑 근처에 보이는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 그곳에 강도질을 한 놈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뭐 하는 거 같냐.”
“……감자를 굽고 있는 것 같은데요 형님?”
명청은 혀를 쯧하고 찼다. 무슨 자루를 들고 오더니 그 안에 있던 감자를 꺼내 굽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발을 딱딱거리는 것이 배가 고파 못 참겠다는 것 같았다.
“배가 고파서 강도질을…… 잠깐.”
그들을 살피던 명청의 표정이 변했다. 생각해 보니 이런 곳에 작은 동굴이 있다는 것은 이곳에 오랫동안 산 토박이가 아니면 모를 것이다. 그리고 제부투혼은 백마강 유역 어딘가 있다고 했다.
“저기…… 안에 뭐가 있을 것 같지 않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