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제부투혼(1)2020.07.07.
“…….”
주창은 침묵했다. 무림은 강자존, 적자생존의 원리가 작용되는 곳이다. 그러니 만우가 하는 말에 뭐라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당장 천마신교만 해도 만우가 말한 법칙이 적용되기 떄문이다. 승자독식. 약자는 강자의 말을 듣는다. 그게 약자가 살아남는 방식이다.
“대주.”
“후우…… 알겠소.”
주창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어리와 광문자를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만우를 실력으로 이길 수 없는 이상, 이곳의 상식은 만우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
“좋아. 난 또 마공이니 뭐니 해서 날뛰면 어디 근맥 같은 곳 잘라놓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피 안 봐서 좋네?”
히죽 웃은 만우의 얼굴에서는 살기가 흘러넘쳤다. 주창이 마련검을 검집에 꽂아넣자 척사영도 검과 도를 검집과 도집에 집어넣었다. 철컥!
“그럼. 김향은?”
“그 아이는…….”
백영과 위문, 일산도 자신의 무기를 거둬들였다. 주창이 납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결정은 그들의 대주이자 주군인 소교주 주창이 내린 것이다.
“향이. 향이가 여기에 와 있다구요?”
“그래. 너희 은월루에게 그 아이나 책임져 달라고 했더니 그것도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만우는 파리한 얼굴로 체력이 떨어져 거의 혼이 나간 광문자를 보고는 혀를 쯧하고 찼다. 핑! 털썩
“오라버니는…….”
“재워뒀어. 객사로 가면 쓸 만한 도술 쓸 줄 아는 호랑이 하나 있으니까, 걔한테 부탁하면 상처 정도는 뭐.”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주창을 쳐다봤다.
“그래서 향이는?”
“모르오.”
“……모른다고?”
만우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주창은 당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는 그런 주창을 쳐다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러면 너희들의 효용 가치가 별로 없는데?”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나갔소. 그러다가 저놈들의 흔적을 찾아서 급히 나온 것이고. 그러니 돌아가서 기다리면…….”
“올 것이다? 아니, 그 어린애한테 식량 조달을 시켰다고?”
“그렇소.”
주창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감싸쥐었다. 그 어린애, 그것도 잡아온 애에게 그런 일을 맡긴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고, 도망가지 않은 김향도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다.
“이건 뭐…… 바보들도 아니고.”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는 주창에게 말했다.
“안내해. 김향 있는 곳으로.”
“좋소. 갑시다.”
만우는 주창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마교 제일로 꼽히는 전투집단인 투귀대의 대주라 들어 음침한 마인일 줄 알았는데 뻣뻣하고 당당하기가 정파 후기지수 저리가라였다.
“이상하게 하나로 귀결되네.”
무공의 정수가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들은 적은 있지만 정파건 마교건 잘 나간다는 집안의 자식들이 다 저런 뻣뻣한 놈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 다른 애들은 주렁주렁 데리고 다녀봤자 번거롭기만 하니까 객사에 가있어. 객사. 어딘지 알지? 척 무사님이 고생해 주시고.”
척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는 고개를 돌려 주창을 쳐다봤다.
“안내해.”
“이쪽으로.”
*****
“황명을 받드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유사길은 궐내 모화관(慕華館)에 정좌하고 앉아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가 오체투지를 하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명을 뜻하는 옥새가 찍힌 교지를 소중히 받아 품은 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검은 피풍의로 몸을 가린 이에게 말했다.
“황상께 전해주시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을 수행하겠다고. 망국의 원령과 황실의 수치인 검주는 이 반도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걸세.”
“물론이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의 목소리는 무저갱에서 올라온 악마가 말을 하는 것처럼 거친 탁성이었다. 하지만 유사길은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 황상께서 우리 언살(言殺)들을 보내셨으니, 처리에 한 치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물론이네. 걱정하지 마시게.”
유사길은 자신을 언살이라 밝힌 이들을 보면서 소맷자락으로 관자놀이를 따라 흘러내리는 굵은 땀방울을 닦아냈다. 언살(言殺). 이들은 동창과는 다르게 숨겨진 명나라 황실의 강력한 힘 중 하나로 황제가 말하는 대로(言) 죽인다(殺)하여 언살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헌데 검주라면…… 설마 건문(建文) 1년에 일어난 그때 자네를 그리…….”
“그 말은 하고싶지 않소.”
언살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로 변하며 살기가 짙어지자 유사길이 딸꾹질을 했다. 유사길은 알았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토실토실하게 찐 그의 턱살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설마…….’
“허나 황상께서는 그때의 수모를 갚고자, 천년만년 성대하게 펼쳐질 명의 원기를 위해 검주, 그 포악한 자를 죽여 없애고자 하시었소.”
유사길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엄한 황제의 명이다. 그러니 그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유사길은 건문 1년,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전(前) 황제인 건문제가 등극하던 그때 일어난 황실 참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황실에서 내로라던 동창과 금의위 고수 열이 당했다 했던가.’
관과 무림은 상호불가침의 약속을 맺었다. 그것은 명을 세운 태조가 한 약속이었다. 무림이라 불리기도 했고, 크게는 중원 각 지역의 강력한 세력인 그들의 도움이 없이는 강력한 원의 군대를 몰아내고 북을 정벌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과 무림의 세계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결국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중원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던 검주 만우, 그자에 대한 소문이 황제인 건문제의 귀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무림인이라고 하나 그 역시 짐의 신민! 불러들여 그자의 검을 보고 싶다! 무림의 검이 강한지, 짐의 검이 강한지 보고자 함이니!]
태조는 명의 안정화를 위해 무림의 힘이 중요하니 그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건문제에게 그리도 강조했었다. 하지만 어려서 혈기가 넘치는데다가, 강력한 명의 황제가 된 건문제는 그들의 힘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어했다.
[어느 정도이길래 태조께서 그리 하셨는지, 그 뜻을 이은 황제로서 보고자 함이다!]
아무리 그들이 건국공신, 개국공신에 준하는 공을 세워 태조로부터 약속을 받아냈다하더라도 이 땅에 사는 이상 황제의 신민이다. 황제인 건문제의 입장에서는 검을 패용하고 관의 무리도 아닌 이들이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보였기에, 그들의 힘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불러들인 것이 검주 만우. 다른 무림십좌의 구좌의 고수들은 제각기 한 세력을 이끄는 수장이나 각 문파나 세력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만우만은 아니었기에 그런 만우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래서 건문제는 만우에게 실력을 보여 달라 요청하였고, 만우는 그 자리에서 오연히 서서는 황제의 명을 거절했다.
[명의 황제라고는 하나 본주는 명의 신민이 아니다!]
만우는 자신의 출신이 조선이었기 때문에 명이 황제의 명령으로 내리는 것을 당차게 거부했다. 그것도 황궁 한가운데서, 수만의 호위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서 거절을 한 것이다. 다른 이들은 분노했지만, 건문제는 만우의 그런 기개에 기꺼워했다. 그렇기 때문에 건문제는 만우에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황궁 최고수 10인을 쓰러뜨려라. 그렇다면 널 보내주마.]
만우가 목을 꺾어서 봐야 하는 높은 옥좌에 앉아서 건문제는 명령했다. 만우는 그런 건문제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본주의 검에는 눈이 없다. 황제라 하여 눈이 없는 검에 눈이 생길까?]
그리고선 낡은 철검을 뽑아들면서 말했다.
[나오라. 죽어도 좋은 자들로만.]
만우의 오만방자함에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동창과 금의위의 고수들이 분기탱천하여 뛰어나온 것은 자명했다. 그리고 일어난 황궁 참사.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유일한 고수가 바로 이자.’
살기를 뿜어대는 언살을 보며 유사길은 끄응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자비가 없는 만우에 의해 아홉 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금의위장. 황궁 최고수라고 해도 화경 고수 하나 없었기 때문에 저들은 날고 기어도 만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우를 죽이고자 달려들었던 이들은 자신들이 품었던 살기에 합당한 대가를 받았다.
[이 정도면 되었소?]
그리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금의위장도 사실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만우는 일부러 건문제에게 보여주려는 듯, 사람의 목숨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저울질을 했던 건문제에게도 철퇴를 내렸던 것이다. 금의위장의 근맥을 모두 끊어놓고, 검면으로 금의위장을 후려쳐 건문제가 앉아 있는 옥좌까지 날려 보낸 것이다. 화살처럼 날아온 금의위장의 몸을 막아내기 위해 황제 주변을 지키던 동창 고수들과 금의위 고수들이 몸을 날렸지만 무려 열 명이 넘는 동창과 금의위의 고수들이 병신이 되었다. 만우의 공력을 막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겠소.]
얼어버린 건문제를 뒤로 한 채 만우는 두 발로 유유히 걸어 황궁에서 걸어 나왔고, 이후 이 일은 황궁 참사라 이름이 붙여진 채 불문에 붙여졌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본 이들이 워낙 많아 암암리에 소문이 퍼졌고, 황실의 수치가 된 것이다.
“명 황실에 수치란 존재할 수 없소. 추락한 자존심을, 검주의 죽음으로 다시 되살릴 것이외다.”
언살은 살기를 풀풀 피어 올리면서 복수심을 불태웠다. 유사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쩌실 생각인가? 수행원으로 등록을 한다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있을 것 같네만.”
그런 건문제를 밀어내고, 정난을 통해 7월에 황위에 오른 것이 바로 연왕 주체다. 건문제의 숙부이자 태조의 네 번째 아들인 그가 새로운 명의 황제가 되었고 유사길은 그 사절로 조선에 왔다. 조만간 조선의 사신과 함께 명의 서울로 들어갈 예정인 유사길에게 은밀히 언살들이 도착해 교지를 보여준 것이다.
“살풍대의 목적이 검주인 것으로 우리는 파악하고 있소.”
“살풍대…… 그 귀신같은 놈들도 검주를 노린다는 말인가?”
유사길은 경악했다. 살풍대는 원나라와 전쟁을 겪었던 이들에게는 가히 공포 그 자체였다. 살풍대의 말발굽에 짓이겨진 생명이 몇 명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 평원을 내달리는 살풍대는 말 그대로 공포의 화신이었다.
“마교에 투신한 테무르. 그자가 조선에서 죽었소. 검주에 의해서 말이오.”
“그래서 오는 것이라면…… 이해가 가는군. 차도살인을 노리는 것인가?”
유사길은 턱을 쓰다듬었다. 살풍대가 검주를 노리고 있다면 언살에게는 이득이다. 원 황실의 망령인 살풍대와 황궁 참사를 일으킨 검주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조선에 무림맹의 고수들이 들어와 있다 들었소.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시오?”
유사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의 사신으로 조선에 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주워들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무림맹에 관련한 일이었다. 유사길처럼 명에서 들어온 이들이니, 입이 싼 대신들 중 몇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주고자 그들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부여. 부여란 곳으로 가겠다, 조선의 국왕을 직접 대면하고 부탁하였다 하였네.”
“부여?”
언살의 눈빛이 변했다.
“설마. 그 무림맹의 고수들에게도 황명이 내려왔는가?”
“그렇소. 그리고…….”
언살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렸다. 살기가 흘러넘치는 미소였다. 근맥이 다 잘렸던 전 금의위장이자 언살로 돌아온 이가 어떻게 걸어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귀와도 같은 눈빛과 미소였다.
“검주. 그자도 부여에 있소이다.”
놀라는 유사길에게 언살이 말했다.
“잠시 며칠 머무르면서 떠날 채비를 하겠소. 나머지 일은 그쪽에서 알아서 잘 처리해 주시리라 믿겠소이다.”
*****
“어, 또 혼자 왔느냐?”
“네. 제가 제일 흥정을 잘한다고 저보고 가라고 해서요.”
김향은 자신을 아는 척하는 저잣거리의 상인에게 아는 체를 했다. 식재료를 파는 그 상인은 김향에게 손가락으로 탐스럽게 익은 사과를 가리켰다.
“오늘은 저 사과도 사가지 그러냐. 네가 모시는 분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식성이 꽤나 좋으신 것 같은데.”
“식성…… 후, 그렇죠. 많이 드시는 분들이긴 하죠.”
김향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늘을 날고 나무 위를 달리는 무인들이라 그런지 한 끼에 먹어치우는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렇다고 먹는데 돈을 아끼지도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들이 사가면 달포는 족히 먹을 양을 사흘 안에 먹어치우고 또 다시 사러왔으니 상인이 김향을 반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