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검주의 무서움(4)2020.07.04.
임수미의 어깨가 가련하게 파르르 떨렸다. 꽃도 고개를 숙일 것 같은 미녀인 임수미는 가련한 절색의 미녀로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미모는 제 임무를 다할 수 없었다. 나찰사화 옥령 때문이다. 임수미 홀로 있었다면 독보적인 미모로 그녀의 가련함이 더욱 돋보였겠지만, 하필이면 옥령이 이 자리에 있는 바람에 쏠려야 할 빛이 분산됐다. 만우는 딱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이 일에 하오문이 책임이 없다고 네 목을 걸고 장담한다면, 가도 돼. 그런데 그게 아니란 걸 내가 알게 되면…….”
만우의 눈에서 시퍼런 공력이 줄기줄기 새어나왔다. 임수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제, 제부투혼을 수색하는 작업을 오늘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할게요. 주야를 가리지 않고, 하겠어요.”
만우는 피식 웃었다. 임수미는 아차 싶었다. 마치 그런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만우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래? 그럼 아래 애들이 힘들텐데. 그럼 수고~!”
임수미는 뭐라고 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우물거리다가 어꺠를 축 늘어뜨렸다. 무화치고는 허무한 결과였다. 마일은 임수미가 사라지자 속으로 ‘끙’하는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삼켰다.
‘자유자재로 사람을 다루는구나.’
단순히 검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인물이 검만 잘 쓴다고 소문이 나있었으니, 중원의 소문이란 것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 되는지 새삼 깨달은 마일이다.
“이리와 이놈아! 형님이 얼마나 네 걱정을 하는지!!”
“으아아! 잠깐. 숙부님! 숙부님! 만우! 말려주시게!!”
만우는 이제 자신을 기둥처럼 놓고 주변을 뺑뺑 도는 숙부와 조카를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슬슬 정신이 없어지려고 했다.
“나리들!!”
쩌렁!!!
“으어.”
“으아아?”
만우가 순간적으로 공력을 목소리에 담아 동군영과 동백익을 부르자 둘이 비틀거렸다. 흡사 실이 끊어진 인형 같았다. 고성에 순간적으로 균형감각이 흐트러진 것이다.
“두 분 다 진정하시지요. 나으리.”
동백익은 만우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흠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가문의 골칫덩어리인 동군영을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자 잠시 체통을 잃었음을 자각한 것이다.
“그, 그러지. 초면에 미안하게 됐네.”
동백익은 만우가 자신을 나리라 불렀음에도 만우에게 다짜고짜 말을 놓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들을 주변에 거느린 만우가 평범한 양인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리의 숙부 되시는 모양이군요. 전 나리의…… 머슴인 만우라고 합니다. 만우.”
아무리 동군영의 혈족이라고 해도 어사의 역졸이라고 밝힐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만우가 스스로를 머슴이라고 밝히자 동백익의 눈이 커졌다.
“아, 아니. 요새는 어떤 머슴이 그렇게…….”
동백익은 만우의 주변에 늘어선 사람들을 죽 둘러보았다. 이들은 조선말이 아니라 명나라 말을 쓰는 이들이었다.
“명나라 말에 능할 수 있는지…… 음…….”
동백익은 목을 긁적였다. 할 말이 궁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만우는 동군영의 뒷덜미를 덥썩 붙잡았다.
“나으리.”
“어? 어? 그, 그래 만우. 내가 방해를 한 모양이구만. 아하하. 미안하네. 미안…….”
“호선과 달밤에 수련, 어떠십니까? 오늘은 이 미천한 머슴이 바쁠 것 같은데.”
말투는 공손했지만 만우의 말에 담긴 서릿발 같은 기세에 동군영이 흠칫하더니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바쁘면 꼭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아닙니다 나으리. 하실 건 하셔야죠. 그런데 척 무사님은 어디에?”
만우는 척사영 없이 혼자 돌아온 동군영에게 물었다. 동군영은 딸꾹질을 한번 딸꾹하고는 만우에게 말했다.
“신고가 들어온 곳 위주로 가서 살펴달라고 부탁을…….”
만우는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그 때 소란스러움에 옆으로 밀려났던 마일이 큼큼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 맞다. 할 말이 있다고 했지?”
“예, 검주.”
잠시 밀려났던 마일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나왔다. 이곳에 있다가는 이상한 분위기에 휘말려 할 일을 잊을 것 같아 빨리 하고 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김향, 그 아이를 돌려드리는 대신…….”
투콰아아아앙!!!! 마일이 말을 하려는 순간, 벼락이 내려치는 듯한 굉음이 터져나왔다. 놀란 객사 안의 사람들이 굉음이 터져나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씁?”
푸확!!!!!
“엡퉷퉷!!!!!”
그 순간, 마일이 벌린 입으로 다량의 흙먼지가 훅하고 밀려들어왔다. 입안에 들어온 모래들을 뱉어내던 마일은 황망한 눈으로 만우가 있던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자욱한 흙먼지만 풀썩이는 채 그곳에 누군가 서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갔어요.”
옥령이 그런 마일의 황망함에 비수를 푹하고 찔러넣었다. ***** 척사영은 연기를 피워올리는 도를 허공에 휘저어 자욱하게 흙먼지를 날려보냈다. 그리고는 왼손에 쥔 검을 역수로 뒤집어 쥐었다.
“그쪽은?”
“허.”
척사영과 주창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주창은 마련검을 늘어뜨리고는 한 손으로 척사영에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여기서 뵙는구려. 무명의 여고수.”
“무명은…… 아니고 척사영이라 합니다.”
척사영은 고개를 까닥 숙여 보였다. 좌검우도인 척사영의 기량은 만우를 만나 한층 더 발전했기 때문에 칼 같은 예기가 흘렀다.
“그사이에 더 강해지셨구려.”
“기연을 만나다 보니.”
주창의 패도적인 기운을 느낀 척사영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주창의 뒤로는 폭혈도 위문과 마정 백영, 일산 웅풍이 기운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헉, 헉, 헉.”
“괜찮으십니까?”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는 것은 본가의 율법에 어긋나는 법이라 끼어들었을 뿐.”
척사영은 숨을 몰아쉬고 있는 광문자를 향해 덤덤하게 말했다. 광문자는 피가 흐르는 어깨를 손으로 찍어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게 혈을 막았다.
“오라버니! 어서 의원을…….”
어리는 방금 전 주창의 일격을 피해내다가 광문자의 왼팔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눈물이 터지려는 것을 억눌렀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광문자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어리를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어리는 서둘러 품속에서 최상급 금창약을 꺼냈지만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대체 이 금창약을 깨끗하게 잘려나간 어깻죽지에 어떻게 발라야 할까 막막했기 떄문이다.
“나와 맞서실 생각이시오?”
광문자, 어리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숨바꼭질을 수 일이나 해야했던 투귀대다. 하지만 끈질긴 추격 끝에 광문자를 대면하게 된 투귀대였다. 광문자가 괴롭힌 것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들 독이 바짝 오른 상태였다. 그런데 그곳에 척사영이 나타난 것이다. 정확히는 민간의 신고를 조사하던 척사영이 그 와중에 일어난 폭음을 듣고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대야말로 이 조선과 맞서려 하는 것인가!”
척사영이 강하게 투기를 뿜어냈다. 그러자 주창을 제외한 위문과 백영, 일산의 얼굴에 놀람이 서렸다. 광문자는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의 소검을 꾹 움켜쥐었다.
“조선?”
조선을 입에 담은 척사영 때문에 주창이 멈칫했다. 어리는 이를 악물고 광문자의 뒤에서 주창에게 말했다.
“척가에서 나오신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절 아십니까?”
척가란 소리에 주창의 눈이 커졌다. 곡산척가에 대한 이야기는 중원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특히 일인의 힘으로 전장의 판도를 바꾼 투신(鬪神) 척준경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회자될 정도다.
“그 정도도 알지 못하면 은월루라 할 수 없겠지요.”
“은월루!”
척사영이 고개를 돌려 어리를 쳐다봤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어려 보이는 어리였다. 그런 그녀가 정녕 은월루의 수장인 은월루주인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이분은 은월루주가 맞으십니다.”
광문자는 창백한 안색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처절한 며칠을 보낸 광문자였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법을 모조리 사용해봐도 결국 꼬리가 잡혔지만 말이다.
“당신이 정말 척가의 무인이 맞다면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은월루는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웃기지 마라!”
폭혈도 위문이 앞으로 나서면서 으르렁거렸다. 폭급하면서도 맹수처럼 날뛰는 기운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 기운은 광문자와 어리에 와닿지 못 했다. 척사영이 허공에 손을 휘젓자 몰려든 위문의 기운이 마치 미풍처럼 변해 주변으로 와해됐기 때문이다.
“은혜를 져버린 것은 네놈들이다. 거짓으로 우리 신교를 농락했을 뿐더러,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보낸 본교의 무인들을 무참히 참살하였다!”
위문은 으르렁거렸다. 은월루는 마교를 농락했다. 거기에 교의 무인들까지 참살했다. 그러니 당연히 본교의 철퇴가 떨어져야만 한다.
“그렇다고 백성들의 터전인 이 부여에서 난동을 피우는 것은 좌시할 수 없습니다.”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것은 척사영도 이해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마교 고수들이 은월루주와 그 호위를 공격하는 것을 좌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조선에는 국법이 있고, 그대들이 억울한 것이 있다면 조선의 국법에 따라 지엄하신 주상전하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터!”
척사영의 말은 도리에 맞았고 이치에 맞았다. 하지만 문제는 마교 고수들이 보기에는 융통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우리가 올 일도 없었소. 그러니 척 소저는.”
주창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척사영은 자신만큼이나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기량이 한 단계 성장한 주창을 보면서 눈을 빛냈다. 자신과 비등한 실력을 가진 상대와의 실전을 거부할 척사영이 아니다.
“비키시오. 아니면 뚫겠소.”
고수에 대한 예의는 여기까지다. 주창의 말이 끝나자 투귀대의 고수들이 모두 기운을 일으켰다. 척사영 역시 마주 기운을 끌어올리다가 멈칫했다.
“내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네요.”
척사영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자 주창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하지만 잠시 후, 주창의 고개가 패액하는 소리와 함께 위로 꺾였다.
“설마…….”
“맞아요.”
파라라락!!!! 옷자락이 광풍에 나부끼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요란스레 울려퍼졌다. 위문은 하늘을 쳐다보고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이, 이건…….”
“검주 만 대협, 은인의 부탁으로 부여를 혼란케 하는 이들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후욱!!!!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주창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건 단순히 공기가 무거워진 것이 아니었다. 공력을 발해 상대방을 의지만으로 찍어누르는 의형상인(意形傷人)의 경지다. 절정에만 들어도 할 수 있는 기예지만, 화경인 주창에게도 이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진다는 것은 상대의 실력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소리다.
“검주…….”
“뭐야. 은월루. 너네가 여기 왜 있어?”
투욱 대단하지 않은 등장이었다. 화려하게 등장한 것도 아니고, 주변을 초토화시켜 실력을 내보이면서 등장한 것도 아니다. 옆을 지나가다 들린 것처럼, 허공에서 고양이처럼 가볍게 착지한 만우지만 그런 만우의 등장에 위문과 백영, 웅풍은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하압!!!”
파앙!!!! 투귀대 고수들의 상태를 눈치챈 주창이 마기를 폭발시켜 만우가 뿜어내는 압력을 중화시켰다. 주창도 같은 화경의 고수기 때문에 그 정도는 가능했다.
‘무슨 공력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쉽다는 것은 아니다. 만우는 자신의 공력으로 이 주변을 이미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 안에서는 간단하게 공력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두 배 이상으로 힘들었다.
“후우, 후우.”
“괴물…….”
“저자가…… 검주.”
위문은 숨을 몰아쉬었고 백영과 웅풍은 질린 표정으로 만우를 쳐다보았다. 만우는 주창을 보고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여. 오랜만?”
“…….”
“아. 걱정 마. 너네 애들 만나고 오는 길이거든.”
“군사와 사화를 만나셨소?”
“그래. 그러니까…….”
만우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주창의 목에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다. 방금 무언가가 자신의 목을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목 주변이 서늘해졌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살아 있지.”
“…….”
“…….”
만우의 살기를 정면에서 받아낸 위문의 입가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살기와 내공은 엄밀히 말해 전혀 다른 기운이다. 살기와 내공을 섞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아예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간에 영향이 없다. 하지만 대개 공력이 높은 고수들은 수많은 생명을 자기 손으로 거둬본 이들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서도, 죽여본 경험에 있어서도 만우는 마교의 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만우의 살기를 정면에서 받아낸 위문의 내부가 진탕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웩!!!”
위문이 토혈을 하면서 비틀거렸다. 만우의 살기에 기혈이 꼬인 것이다. 만우는 그런 위문을 보면서 혀를 쯧하고 찼다.
“왜 이렇게 허약해? 마교 고수라는 놈들이?”
중원에서는 공포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군림하는 것이 바로 투귀대지만, 만우 앞에서는 언제든지 손목을 비틀 수 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주창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검주께서 약자를 핍박하는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소!”
주창은 만우의 앞을 막아섰다. 만우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창이 기운을 일으켜 만우의 기세를 흘려보내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약자? 인정하는 거야?”
“으드득. 그렇소!”
마교 고수가 스스로를 약자라 인정했다? 중원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다들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주창은 더 이상의 투귀대 고수를 잃을 수 없었기 때문에 먼저 인정했다. 만우는 재밌다는 듯 씩 웃은 뒤 기운을 거둬들였다.
“애들 좀 그만 울려라. 저런 어린 애가 울고 있으면 안쓰럽지도 않냐?”
“……우리는 받아야 할 것을 받으러 온 것이오. 은월루와의 채무 관계는 검주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오.”
주창은 턱을 들고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래. 근데 말이야.”
만우는 주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긴 양인들이 사는 곳이야. 네놈들이 부수고 다닌 게 얼만지 알아? 너희들이 난리를 친 덕분에 내 면이 안 살잖아. 내가 관리하겠다고 한 곳인데.”
“그건…….”
“그러니까 이 안에서는 금지야. 서로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것도, 그러자고 주변 때려부수는 것도. 만약 이게 마음에 안 든다?”
툭툭. 만우는 이룡검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럼 무림인답게, 무림인만의 방식으로 해결하자고. 목숨 걸고.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