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검주의 무서움(2)2020.06.27.
“뭐가 좋다고 웃는거야?”
빠악!
“꺄앗흥!”
만우는 더러운 것을 만진 것처럼 손가락을 탁탁 털었다. 진짜 손으로 때린게 아니라 지풍으로 때렸으면서도 부르르 떠는 호선을 보니 괜히 거북해졌기 때문이다.
“정의대나 기린대, 아니면 하오문에게서 들어온 정보 없어?”
“딱히 눈에 띌 만한 건 없어요.”
호선은 만우 옆에 조신하게 무릎을 모아서는 앉았다. 만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어린아이가 투귀대 놈들의 손에 붙잡혀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김향은 어린 소녀일 뿐이다. 그 어린 소녀가 마교 고수들의 손에 붙잡혀 있으니 고초를 겪고 있을 것은 자명했다.
“그냥 쥐 죽은듯이 있다가 덮칠 걸 그랬나.”
만우는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자신의 고향인 조선에 중원에서 온 무림인들이 무림의 법칙을 들이미는 꼴이 같잖아서 깽판을 부렸던 것이 마교 고수들의 추적을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만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만우가 그때 나서지 않았더라면 부여현은 더욱더 개판이 되었을 것이다.
‘잡아 죽일 놈들은 잡아 죽이면 되니까.’
만우는 하오문의 임수미를 시켜 이곳에서 용서 가능한 놈들과 용서가 불가능한 놈들을 추려놓으라고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검인이 허옇게 탈색된 안색으로 저 멀리서 뛰어오는 것이 만우의 눈에 보였다. 만우는 상반신을 일으켜 혹시나하는 소망을 담아 검인에게 물었다.
“찾았구나?”
“아니, 그보다 더 큰일이 났어.”
“큰일?”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만우가 부여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로 딱히 ‘큰일’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일어나지 않았다. 무림인들은 만우의 서슬 퍼런 기세에 숨을 죽였고, 관리들은 동군영에 의해 모조리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여현의 백성들은 간만에 찾아온 평온함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큰일이라니.
“마교. 마교 놈들이 찾아왔어. 너를 찾고 있다고.”
“……그놈들이?”
만우의 두 눈에서 불꽃이 번쩍하고 튀었다.
*****
“배 싫어!”
“그래도 이게 더 빨라. 산도적 놈아.”
“이 미꾸라지가. 산 사나이에게 왜 자꾸 배를 타라는 거야!!!”
의주. 맹주와 덕주 인근에서 만우에게 고하고 떠난 감령과 필두는 의주에 도착했지만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감령이 육로로 가자고 하면 필두가 거부했고, 필두가 배가 훨씬 빠르다면서 배를 타고 가자고 하면 산적인 감령이 거부했다. 하지만 제삼자가 보기엔 그들은 어떻게든 조선에 머물 구실을 만드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야. 솔직하게 말하자.”
“뭘.”
맨 처음에만 해도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만우의 휘하에서 함께 살을 부대끼면서 미운 정이 든 감령과 필두다. 감령이 옥면산군이란 칭호에 걸맞은 곧은 검미를 꿈틀거리자 필두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나 나나, 그냥 가는 게 아쉬워서 이러는 거잖아?”
“아쉽긴! 누가 아쉽다고! 난 속이 시원한데?”
“솔직하지 못한 놈.”
“아니라고!!!!”
감령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단순무식했다. 반면 필두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머리가 좋았고 셈에 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필두는 혀를 쯧 하고 찼다.
“솔직히 우리, 재밌었잖아?”
필두의 말에 감령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맨 처음에는 만우에 의해 거의 끌려오다시피 했지만 어느새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만우의 아래서는 자신들의 무공이 늘어나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산적이나 수적으로 살 때보다 훨씬 더 자유로웠다.
“말도 안 돼. 산적질할 때보다 지금이 더 자유롭다니.”
“야. 솔직히 너나 나나 총채주랍시고 아래 애들 깩깩거리는 거 들어주고, 통행료 받는 액수 조정하느라 매일 머리 싸매고 있잖아.”
“그건…….”
“거기에 뭐 툭하면 황실에서 나와서 우리 토벌한다고 난리치고. 아니, 다른 놈들은 떡하니 성이나 주에 자리 잡고 보호비 받는데 통행료 받는다고 왜 우리한테만 난리인데.”
산적과 수적들은 한숨의 역사를 살아왔다. 산적과 수적, 도적이기 때문에 늘 황실의 토벌 대상이 되곤 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황건적 등 도적으로 일어나 황실을 위태롭게 만든 역사적인 사건들 때문에 도적들의 움직임에 황실은 항상 과잉 대응을 하였다.
“잘못 잡히면 산채 하나가 통째로 싹 죽고. 그사이에 다른 도적놈들이 우리 자리 차지하겠다고 난리치고. 생각해 봐. 마교니 뭐니 하는 애들 나오면 제일 만만한 게 우리들이야.”
녹림칠십이채. 장강수로십팔채. 이름이야 그럴듯한 연맹이지만 결국 그 근본은 산적과 수적 놈들일 뿐이다. 개중에는 물론 감령이나 필두처럼 출중한 무인들이 나오긴 한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고수의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마교나 무슨 꿍꿍이를 계획하는 집단들이 무림 진출의 교두보로 항상 삼는 것이 녹림과 장강이다. 한 마디로 동네북이란 뜻이다.
“왜 그렇게 절대고수, 절대고수하는지 알겠더라. 그거 알아? 나 수적된 이후로 검주 대협 아래 있을 때 처음으로 한 번도 안 깨고 잔거?”
“……알지.”
감령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 총채주들은 늘 독살이나 암살의 위협에 시달린다. 무식한 놈들이 많기 때문에 자리를 노린답시고 독을 풀거나 암살자를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가난이 싫어서 수적이 됐어. 강가에서 자랐는데, 수적 아저씨들은 항상 잘 먹더라고. 그래서 수적이 됐지. 힘도 좋고, 무공에서 재능이 있어서 눈에 띄게 되어서는 어찌어찌 총채주가 되었지만.”
필두는 팔 위로 드러난 우둘투둘한 흉터를 손바닥으로 훑었다. 하루도 쉬운 날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흉터들이다.
“너. 네 수하들을 버리겠다는 거야?”
감령이 필두를 보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두는 피식 웃었다.
“산도적 놈들은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난 그놈들이 내 수하라고 생각한 적 없어.”
필두의 눈은 허공 저 너머를 응시했다. 기억 속 어딘가를 더듬는 것이다.
“내 진짜 친구들은 다 죽었어. 수적? 그래. 쓸 만한 놈들이 있지. 하지만 그놈이 다 그놈이야.”
필두는 감령을 쳐다봤다.
“알량한 의리에 목숨 걸지 마라. 네가 의리가 없다는 게 아니라 다른 놈들도 너처럼 의리가 있을 것이라 믿지 말란 소리야.”
필두는 진심을 담아 감령에게 말했다. 감령은 무식하고 직관적이며 단순했다. 자신이 녹림칠십이채의 총채주에게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피식 웃은 필두는 고개를 돌렸다.
“난 가지 않을 거야.”
“버린다고? 총채주 자리를?”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는 휘하에 열여덟 채의 수채를 다스리는 권력의 정점이며 수만 수적의 왕이다. 녹림칠십이채가 산적들의 왕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봤자 무슨 일만 터지면 동네북이야. 그리고…… 내가 이제 조용히 살아도 나를 핍박할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느꼈거든.”
이곳 조선이라면 그게 가능할지 모른다고 필두는 생각했다. 무림에서야 자신은 수적 나부랭이에 불과하지만, 조선에서는 아니다. 이곳은 그 살벌한 무림이 없었다. 하지만 필두는 힘이 있었다. 힘이 있다고 해서 수적들 위에서 군림하던 것도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평화롭게, 평범하게 살아도 배를 곪던 어린 시절처럼 될 이유는 전혀 없다. 힘이 있으니까. 힘이 있는 평범함. 모순적이지만, 조선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그리고 원한다면.
“검주. 그 인간 밑에 있으면 엄청 시끄럽고 힘들 것 같긴 하지만, 내 목숨 걱정하고 도적이 된 내 인생을 한탄하면서 살 필요는 없잖아?”
“으…… 복잡해!”
감령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금방울이 딸랑거리며 울었다. 감령은 고개를 휘휘 저은 뒤 필두에게 말했다.
“그래서. 결국 안 가겠다는 거지?”
“말이 길었지만, 그렇다는 거지.”
“이런 제길. 의리 없는 놈!”
감령은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감령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필두의 눈앞에 붕붕 휘둘렀다.
“이걸 한 대 쳐버릴 수도 없고.”
“너도 가기 싫어서 이러는 거잖아?”
옥면산군과 역수교어. 두 초절정 고수가 조선의 나루터에서 하는 행동치고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감령도 이내 두 팔을 늘어뜨렸다.
“돌아가서 우리 둘이 힘을 합친다면?”
“수적과 산적을 합치자고?”
필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필두는 피식 웃었다.
“그게 될 것 같냐? 우리가 언제부터 친했다고.”
“뭐! 사해가 동도라고 했는데. 그냥 윗대부터 그랬으니까 습관적으로 으르렁거린 거지, 우리 사이에 이해관계 같은 건 없잖아?”
감령의 말이 맞았다. 산적과 수적은 절대로 만날 일이 없다. 담당하는 분야가 엄밀히 다르기도 하고, 활동반경 자체가 절대로 만날 수 없는 곳에 서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분야에서 비슷한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 습관처럼 으르렁거려 온 것뿐이다.
“그래도 안 가. 안 돼. 안 바꿔. 돌아가.”
필두는 손을 들어 감령에게 휘휘 내저었다. 감령이 다시 한번 발끈하려는 순간 필두가 코를 움켜쥐었다.
“이게 무슨 냄새야 갑자기?”
“냄새?”
감령이 코를 킁킁거렸다. 물 냄새가 짙게 나는 강가에, 조선 어디에서나 흔히 맡을 수 있는 똥 냄새가 났다.
“말똥?”
하지만 그냥 똥이 아니라 말똥이었다. 그러자 말 특유의 체향이 느껴졌다. 감령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나루터 한 곳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 말인데?”
“말이라고?”
중원이야 워낙 땅이 넓고 크기 때문에 말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아니다. 말 자체가 귀했고, 산악 지형이 많아 특히나 이 북쪽에서는 말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관아나 양반들이나 가지고 있는 것이 말이었기 때문이다.
“워…… 어디서 저렇게 많이. 말이라도 내다 파나?”
감령이 중얼거렸다. 필두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선이 말을 내다파는 말의 산지라고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거의 다 왔네.”
감령은 가까워지는 커다란 선박을 보면서 고민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필두가 감령의 팔을 끌었다.
“어? 어? 어디 끌고 가, 임마!”
감령은 당황한 표정으로 필두에 의해 질질 끌려갔다. 필두가 공력까지 끌어올려 감령을 끌었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감령은 질질 끌려갔다.
“야 임마!!!! 아무리 나를 보내기 싫고, 네가 중원으로 가기 싫…… 어? 얼굴 표정이 왜 그래? 표정이 더러워졌네.”
감령은 필두의 긴장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필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한가득 서려있었다. 필두 이놈이 이런 얼굴을 보일 때는…….
“검주? 그 양반이라도 주변에 온 거야?”
“아니.”
감령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필두는 강쪽에 시선을 박아둔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배. 갑판 위에. 안 느껴져?”
“뭐가 느…….”
감령의 표정이 돌변했다. 필두가 말한 것을 감령도 느낀 것이다. 감령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무림에서 돌연 사라졌던 인물이 조선에 당도한 갑판 위에 서있었다.
“낭황?”
“우결지.”
감령과 필두가 동시에 말했다. 갑판 위에 선 허리가 굽은 노인, 그 노인은 중원에서 구파일방이나 사림곡, 마교에 속하지 않은 무림인이라면 경외해 마지않는 인물이었다. 낭황 우결지. 대문파 소속이나 거대한 세력의 소속도 아니면서, 낭인 신분으로 화경들의 인정을 받는 초고수. 같은 초절정이라고는 하나 감령이나 필두는 낭황 우결지의 전설과도 같은 소문을 수도 없이 들어왔고,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마교에 투신했다더니…… 저기, 살풍대다.”
“…….”
선박에서 내린 낭황 뒤로 따라붙는 기골이 장대한 거인들을 보는 감령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의 절반을 매섭게 밀어버린 변발을 하고, 전원 7척이 넘어 보이는 거대한 장신을 자랑하는 철벽같은 이들. 마교에 투신했다 알려진 살풍대였다. 원이 중원에 남긴 상처와 악명이 너무나도 거대했기 때문에 살풍대는 아직까지도 모두의 악몽 속에 생생했다. 말과 함께라면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다 알려진 원 황실 소속의 친위대이자 최강의 기마대. 원 황실의 멸망과 함께 마교로 사라졌다 알려진 살풍대가 낭황 우결지와 함께 조선에 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