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검주의 무서움(1)2020.06.23.
동군영은 눈밑에 짙은 그늘이 생긴 채로 굉음이 터져나왔다고 신고가 들어온 곳 근처에 나가 주변을 탐문했다.
“큰 소리가 났단 말이냐?”
“네, 나리. 어찌나 컸던지 볼 일을 보느라 똥수깐에 앉아있다가 다리가 똥통에 빠져서…….”
동군영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동군영은 말을 하는 사내의 다리에 가 있었다. 똥통에 빠졌다는 소리 때문이었다.
“검흔입니다.”
척사영이 허리를 숙여 땅을 짚어보고는 동군영에게 말했다. 동군영은 눈을 크게 떴다.
“굉음이 터져나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병장기가 부딪쳐 그 정도 굉음이 일어나려면…….”
“이 주변이 날아가야 정상이지요.”
척사영은 당연하다는 것을 왜 물어보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동군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체 저 고수란 인간들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검흔만 남았다는 것은…… 무언가를 대단히 의식하고 싸운 것 같습니다.”
“이 정도의 검흔을 남길 정도면 어느 정도의 실력자여야 되는 겁니까?”
동군영의 예리한 질문에 척사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정의대의 검인 대주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최소.”
“정의대에도 딱 두 명밖에 없다는 그 정도 실력자 말입니까?”
“네.”
동군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부여현에 들어온 무림의 삼류 방파들 중에는 그 정도 실력자가 당연히 없었다. 검인이라면 교수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초절정에 한 발자국 걸친 고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구파일방이나 사림곡 같은 거대한 세력이 아니면 나오기 힘든 수준의 고수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뜻이다.
“놓치고 지나갔더라면 큰 일이 날 뻔했네요. 만우가 찾는 이들인 것 같지 않습니까?”
만우가 정의대, 기린대, 하오문을 불러다놓고 부여현을 이제 자기가 먹었다며 내렸던 명령이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그동안 동군영은 현감 대신 부여현의 업무를 대리하여 처리하느라 하루에 두 시진을 자면 많이 자는 수준이었다. 현감뿐 아니라 그 아래의 이방과 하급 관리들까지 싸그리 파직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동군영이 부여현의 모든 업무를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칠 일 전부터 꾸준히 들어왔던 신고도 계속해서 묻히다가 우연한 순간 동군영의 눈에 들어 나와본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탈출한 것이다.
‘힘들다. 고작 현감인데.’
고작 한 현의 일일 뿐인데 혼자 하려니 왜 그리도 처리할 것이 많은지. 주변에 데려온 이들은 전부 한 칼을 하는 이들 뿐인 터라 도움을 청할 이들도 없었다.
“그런데 삿갓은 왜 쓰고 다니시는 겁니까?”
척사영이 굳이 삿갓을 고집해 쓰고 나온 동군영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암행어사가 부여현에 왔다는 것은 관리들밖에 모른다. 굳이 거리에서까지 얼굴을 가리고 다닐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럴 일이 있어서요.”
삿갓 이야기가 나오자 동군영은 서둘러 삿갓을 고쳐 썼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이어서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언제 어떻게 아는 사람의 눈에 띌지 모르는 법이다.
‘왜 오지 않았냐고 닦달하시겠지.’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닦달하는 건 거절이었다. 동군영은 척사영에게 물었다.
“만우에게 말을 해야 할까요?”
“칠 일이나 공을 들였는데도 아무런 소득이 없어서 그런지 은공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이거라도 말해드리면 활기를 찾으실 것 같습니다만.”
만우가 한 가지 실수한 것이 있었다. 만우가 쫓는 투귀대의 마교 고수들은 철권이나 정의대 정도가 아니라면 삼류 방파 수준에서는 발견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흔적이 마교 고수의 흔적이라면, 무언가 쫓는 것이 있어 이곳에서 부딪친 것이겠죠?”
무공에 문외한인 동군영이라고는 하지만 검흔을 보고 ‘왜’를 추측하는 데에는 무공이 필요하지 않았다. 척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고가 들어온 곳 위주로 척 무사님이 가서 확인해 주세요.”
동군영은 척사영에게 부탁했다. 동군영이 돌아다니는 것보다 척사영이 빠를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척사영은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후욱!!! 척사영이 고속으로 사라지면서 후폭풍이 없었더라면 정말 척사영이 그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푸후.”
흙먼지가 일어났기 때문에 동군영은 손을 들어 얼굴 앞에 대고 부채를 부쳤다. 그런데 그 때 흙먼지가 가라앉고 난 뒤 저 멀리서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동군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나…… 헉!!!!”
놀라 눈이 퉁방울만 해진 동군영이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그때 저쪽에서도 동군영을 본 것인지 흙먼지가 사라지고 난 뒤 모습을 드러낸 남자 하나가 동군영을 불렀다.
“이보시오.”
“…….”
동군영은 숨을 턱하고 멈췄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쫓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동군영은 뒤에서 자신을 따라잡기 전에 골목길을 돌아 저잣거리의 인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보…….”
뒤를 힐끗 돌아본 동군영은 자신이 본 것이 확실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군영이 같았는데.”
익주동가. 익주(益州:익산)의 터줏대감이자 넓고 비옥한 평야에서 벌어들이는 소작으로 부를 축적한 익주동가의 동만익은 두문동의 참사의 유일한 생존자로 조선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양반이었다. 익주와 부여는 말을 타면 하루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종종 익주동가에서 상업이 발달한 부여에서 서책이나 붓, 종이 등을 사가곤 했다.
‘죄송합니다, 삼촌.’
동만익의 동생이자 동군영에게는 삼촌인 그에게서 도망쳐 나온 동군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동군영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익주동가의 사람들이 부여현에 오면 늘 머무는 곳이 바로 부여현의 객사라는 것을 말이다. *****
“대주.”
폭혈도 위문이 광풍처럼 달려와 주창 앞에 부복했다. 주창은 갑작스런 소란에 인상을 살짝 썼지만 위문을 질타하진 않았다.
“무슨 일이냐?”
“그 여자, 대주께서 예전에 조우하였던 그 여고수를 부여에서 목격하였습니다.”
“척……사영이라던가?”
“예!”
주창의 눈이 커졌다. 그때 자웅을 겨루지 못한 여고수의 출현은 주창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여자라고 해서 화경에 오르지 못하란 법은 없지만 남고수에 비해 여고수의 수가 더 적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중원도 아니고, 조선에서 화경급의 여고수가 탄생할 줄이야.
“어디?”
“부여현 내에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은월루와 저희가 부딪친 흔적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웬 삿갓을 쓴 남자가 옆에 있었는데…….”
곰곰히 생각을 하던 위문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만한 체형을 가진 이가 누구였는지 떠오른 것이다.
“검주. 검주 만우와 함께 다니던 조선의 관리였습니다.”
“검주.”
주창과 위문의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있었다. 허름한 헛간의 한 구석에는 웅풍이 코를 골면서 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이 셋 이외에 나찰사화 옥령과 마정 백영, 그리고 파천서생 마일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덜컥. 그런데 그때 누군가 헛간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위문이 순간적으로 도병을 붙잡았지만 그 전에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음식 냄새에 도병을 움켜쥔 손에 들어간 힘이 스르르 풀렸다.
“밥이요.”
그곳에는 김향이 서있었다. 원치 않게 투귀대의 손에 끌려와 한양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이곳, 부여현까지 도착한 김향이지만 김향은 처음처럼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지 않았다. 정확히는 부여현에 들어온 투귀대가 검주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움직임을 극히 조심하면서부터 김향이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식량조달. 주창을 비롯하여 다른 투귀대원들은 조선말이 대단히 서툴렀다. 부여현에 하도 중원에서 들어온 무림인들이 많아 튀진 않았지만 마교 고수들이 품고 있는 마기와 살기는 대단히 이질적인 기운이기 때문에 돌아다니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교 고수들도 먹어야 힘을 낼 수 있다. 그걸 위해 나선 것이 김향이다.
“어디 수상한 행동이나 은월루를…….”
“그게 벌써 오 일째 거든요.”
투귀대는 모두 약이 바짝 오른 상태였다. 하오문의 도움을 받아 은월루로 의심이 되는 이들을 계속해서 추적했고, 그 와중에 광문자와 어리를 실제로 발견도 했다. 그런데 대체 얼마나 눈치가 빠른 것인지, 투귀대가 전부 모이기도 전에 항상 광문자가 등장해 어리를 데리고 빠져나간 것이다. 검주도 신경을 써야하는 와중에 경공이 월등하게 뛰어난 광문자를 상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기에 광문자는 늘 기관진식을 설치해 투귀대의 시간을 빼앗았고, 오 일 전에는 처음으로 역습까지했다. 도망간 줄 알았던 광문자가 역으로 투귀대를 추적해서는 투귀대가 먹을 음식에 독을 풀고 달아난 것이다. 투귀대원들이 돈이 있음에도 움식을 구하지 못해 훔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훔쳐갈 음식에 미리 독을 뿌려놓은 것이다.
“어차피 갈 곳도 없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그나마 아는 사람들이 있던 곳에서 날 데려온 분들이 누구신데.”
김향이 투덜거리자 위문은 헛기침을 했다. 이 맹랑한 계집아이는 자신들 앞에서 도저히 기가 죽거나 겁을 먹질 않았다. 마일이 김향에게서 정보를 알아내고자 심령술까지 썼지만, 김향에게서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정신을 잃었던 김향이 부여현에 도착해 정신을 차렸다는 점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광문자의 독을 걱정하느라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이고, 제대로 먹지 못했다면 은월루를 쫓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 옥령 언니한테 또 음식 전해주러 갈게요.”
김향은 광주리를 주섬주섬 챙겨들었다. 주창이나 백영은 김향과 말을 하지 않았다. 성격이 마교보다는 정파에 가까운 백영은 김향에게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고 주창은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위문이나 웅풍, 옥령 정도가 김향과 대화라도 했는데 위문은 입맛을 쩝 다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새면 안 된다?”
사실 김향이 사라져도 위문은 상관없었다. 솔직히 옥령이 데려왔지만 투귀대에게 김향은 사실상 짐이나 마찬가지였다. 검주까지 알고 있는 아이인데, 괜히 자신들에 데리고 있다가 김향이 화라도 당하면 검주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끔찍한데.’
옆에 투귀대주인 주창이 있지만 위문에게는 검주의 기억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하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을 정도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안 새요. 갈 곳도 없다니까. 한양으로 돌려보내 주든가. 칫.”
김향은 새초롬하게 말하고는 헛간의 문을 열고 사라졌다. 주창은 김향이 나간 뒤 고개를 돌려 위문을 쳐다봤다.
“위문. 가서 마일에게 전하라.”
“예, 대주.”
위문이 주창의 말에 부복했다.
“김향. 저 아이를 이용해 검주와 협상한다.”
“……예? 협상?”
위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주창의 얼굴을 봤다가 화들짝 놀랐다. 얼마나 고민이 깊었던 것인지 주창의 얼굴이 십 년은 더 늙어보였기 때문이다. 검주와 협상이 아니라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주창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검주와 협상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낭황과 살풍대가 오면 검주는 끝이다. 그전에, 김향이란 아이를 조건으로 내세워서라도 은월루와의 일을 마무리 해야 한다.”
“존명!”
가라앉는 듯한 주창의 목소리에 위문이 커다랗게 복명복창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
“아. 날씨 좋다.”
만우는 한가롭게 슌스케가 끄는 수레 위에 누워 버드나무 이파리를 질겅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며 여유를 만끽했다. 후욱! 잠시 후 어디선가 바람이 몰려오는 소리와 함께 수레 위에 나풀거리는 장삼을 입은 호선이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갑자기 나타난 호선의 모습에 슌스케는 더 이상 놀라지도 않는 눈치였다.
“다녀왔어요.”
“그래. 소득은 있고?”
“그럴 리가요.”
호선은 팔자 좋게 웃어 보였다. 이파리를 질겅거리던 만우의 입가가 굳었다. 슌스케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예쁜데 멍청하다니. 호랑이의 한계인가?’
요즘 들어서 보면 호선이 맞는 것을 좋아하는 변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만우에게 맞는 행위 자체가 낙선의 기운을 누르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낙선의 기운을 누르면서 느껴지는 쾌감은 맞는 것을 좋아하는 변태가 좋아하는 희열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슌스케가 오해할 만한 것들은 차고 넘쳤다.